[비즈니스포스트]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근로시간 개편안에 반대하는 노동계와 시민사회를 어떤 논리로 설득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인다.
일각에선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출신으로 노동계에 오랜 시간 몸 담았던 이 장관이 자기의 일생을 부정해야하는 모순적 상황에 몰렸다는 시선이 나온다.
▲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3월9일 서울시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외신기자 정책 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10일 정치권에 따르면 근로시간을 주 최대 69시간까지 가능하도록 하는 근로시간 개편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주무장관인 이정식 장관이 노동계를 얼마나 잘 설득하는냐에 달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근로시간 개편안 중에는 근로기준법을 고쳐야 하는 사안이 많다. 하지만 국회 의석 과반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등 야당이 정부 개편안에 반대하고 있는 만큼 국회 통과를 위해서는 근로시간 개편안의 당사자인 대다수 일반 근로자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등을 비롯한 노동계가 정부의 근로시간 개편에 수긍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야당으로서도 근로시간 개편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기 어렵다.
이 장관은 정부의 노동시간 개편으로 총 근로시간이 현행보다 더 줄어드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주 52시간제 틀에서 단위 기준별 연장근로시간은 '월' 52시간(12시간×4.345주), '분기' 156시간, '반기' 312시간, '연' 624시간이다. 정부 개편안에 따르면 1주일에 12시간 밑으로만 쓸 수 있는 연장근로시간 관리 단위를 노사 합의를 통해 월·분기·반기·연으로 확대하면 월은 48시간(52시간의 92%), 분기는 140시간(156시간의 90%), 반기는 250시간(312시간의 80%), 연은 440시간(624시간의 70%)으로 줄어든다.
이 장관은 9일 외신기자 정책토론회에서 "디지털·저탄소 혁명, 저출생·고령화 등 환경 변화 속에 시대에 뒤떨어진 노동시장의 의식·관행·제도를 혁신하는 것은 국민에게 좋은 일자리 기회를 드리기 위한 중차대한 문제"라며 "제도의 유연성을 더해 노사의 선택권을 확대하고 노동자의 건강권과 휴식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생산적이지 못했던 장시간 근로로부터 탈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장관은 노동계 현안에 밝은 만큼 노동계와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 장관은 고용노동부 장관에 임명되기 전 30여 년 동안 현장형 노동운동가로 일하며 한국노총에서 사무처장까지 역임했다. 한국노총 활동의 전략·전술을 짜는 이론가라는 평가를 받으며 한국노총에서 ‘정책 브레인’으로 여겨졌다.
노사분쟁 조정과 대정부 교섭 경험이 풍부한 점은 장관으로서 노동계와 대화에 역으로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장관은 노사관계개혁위원회, 노사정위원회 등의 사회적 대화에 참여했다. 노사정위원회 전문위원과 노사발전재단 사무총장을 지내면서 노동 현안을 사회적 대화로 풀어내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여러 차례 피력했다.
다만 노동계의 거센 반발이 이어지고 있어 이 장관이 이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진통이 예상된다.
민주노총 소속 청년 노동자들은 9일 기자회견에서 "근로시간 제도 개편 방안에 청년들의 분노가 들끓고 있다"며 "과로사로 내모는 현 개편안을 즉각 폐기할 것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한국노총이나 민주노총 등 기존 노조들과 대화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사회적 대화의 한 축으로 주목받는 MZ노조도 정부의 근로시간제 개편안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새로고침노동자협의회는 9일 논평에서 "연장근로 관리 단위 확대는 국제 사회 노동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한국은 연장근로 상한이 높고 산업현장에서 연장근로가 빈발해 연장근로 관리 단위 확대를 도입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지적했다.
노동계 및 정치권 일각에선 한국노총 출신으로 노동계에 몸담고 있었을 때 최저임금 차등적용이나 직무·성과급제에 반대했던 이 장관이 자기 인생을 부정하는 행위를 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는 시선도 있다.
이 장관의 친정인 한국노총은 6일 이 장관이 근로시간 개편안을 발표한 직후 성명문을 내 "산재 과로인정 기준인 1주 64시간을 꽉 채우라는 말"이라며 "죽기 직전까지 일 시키는 것을 허용하고 과로 산재는 인정받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정부가 제시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현재도 주 52시간을 넘겨 일하거나 포괄임금제 아래에서 일한 만큼 보상을 받지 못하는 중소기업 근로자들은 최대 근로시간마저 늘어나게 되면 더 과로에 내몰릴 수 있다는 우려에 이 장관이 어떤 해법을 내놓을 지도 관심사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8일 논평을 통해 "현행 최대 52시간에서 69시간으로 대폭 최대근로시간이 확대되면 충분한 휴식을 보장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걱정 크다"며 "연장노동 총량관리가 도입되면 산업재해 과로인정 기준의 한계 노동시간인 주 64시간 노동이 일반화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도 7일 성명에서 "정부가 제시하고 있는 내용은 모두 사용자의 편의를 위한 개혁일 뿐 노동자들의 건강권과 휴식권은 악화될 것"이라며 "사용자의 입장만을 대변하여 근로시간 선택권을 절대적으로 강화하려는 정부의 태도를 강하게 규탄한다"고 말했다. 김남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