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액수만 보면 적지 않은 규모지만 당시에는 TSMC가 미국 정부의 요청에 따르기 위해 형식적으로 투자한다는 해석이 많았다. 미국에 건립되는 반도체공장이 TSMC 전체 파운드리사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TSMC의 애리조나 신공장은 웨이퍼 생산량 월 2만 장 수준으로 계획됐다. 이는 12인치(300mm) 웨이퍼 기준 TSMC 전체 생산량의 2% 수준에 그친다. 5나노급 반도체 생산량만 고려해도 애리조나 신공장의 비중은 전체의 20%에 못 미치는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최근 TSMC가 미국 투자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TSMC는 향후 3년 동안 파운드리사업에 1천억 달러(약 1118조4천억 원)를 투자한다고 4월 밝혔는데 이 투자의 상당부분이 애리조나에 추가 투입될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로이터는 TSMC가 애리조나에서 기존 공장에 더해 5곳의 공장을 추가 건설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공장규모나 반도체공정 수준의 구체적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공장을 새로 건립하는 데 상당한 시일이 걸리고 반도체기술도 계속 고도화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TSMC의 애리조나 신공장에는 기존에 준비되던 5나노급 공정뿐 아니라 더 수준 높은 공정도 적용될 수 있다.
나노(nm)는 반도체의 회로폭을 말한다. 반도체는 회로가 미세해질수록 성능이 높아진다. 현재까지 상용화한 가장 수준 높은 공정은 5나노급으로 삼성전자, TSMC에서만 제공된다.
삼성전자와 TSMC는 여기에 더해 2022년 3나노급 공정 대량생산에 들어간다는 목표를 세웠다. TSMC가 애리조나에서 3나노급 이하 공정을 추진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기술매체 EE타임스는 “TSMC의 미국 생산능력 확대방안은 분명히 애초 계획을 초과할 것이다”며 “공장 6곳이 순차적으로 가동됨에 따라 점차 첨단공정이 늘어날 것이다”고 바라봤다.
TSMC가 미국에 파운드리 생산라인을 늘릴 것으로 예상되면서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의 반도체 일감 확보가 앞으로 더 어려워 질 가능성이 나온다.
파운드리사업은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기업)가 개발한 반도체를 수주해 위탁생산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미국에는 이런 반도체 일감을 주는 팹리스가 몰려 있다. 애플, 퀄컴, 브로드컴, AMD, 엔비디아 등 세계적 반도체기업이 미국에 본사를 둔다. 파운드리기업이 미국과 접근성을 높이면 반도체 수주에 더 유지해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도현우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지난해 TSMC의 애리조나 투자 발표 당시 “이번 투자로 TSMC는 미국 고객과 더 밀접한 관계가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 삼성전자 오스틴 파운드리공장.
물론 삼성전자도 미국 팹리스를 공략하기 위해 현지 파운드리사업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현재 기존의 미국 오스틴사업장을 증설하거나 아예 다른 지역에 새로운 사업장을 건설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시장에서는 삼성전자가 오스틴사업장에서 운영하는 14나노급 이상의 기존 공정을 확대하는 대신 TSMC 못지않은 첨단 공정 구축에 나설 공산이 크다고 본다.
이는 삼성전자가 파운드리사업 양적 규모에서 TSMC에 못 미치는 대신 기술력으로는 TSMC와 비슷한 수준에 와 있기 때문이다.
김기남 삼성전자 DS부문 대표이사 부회장은 올해 주주총회에서 “삼성 파운드리사업은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선두업체와 비교하면 점유율이나 생산능력, 고객 수에서 부족한 게 사실이다”며 “그러나 첨단공정 경쟁력은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로서는 정해진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시장 조사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2021년 반도체시설 투자에 280억 달러(약 31조3500억 원)를 투입할 것으로 예정됐다. 이는 천문학적 규모이지만 TSMC의 올해 시설투자 300억 달러(약 33조6천억 원)에 다소 못 미친다.
더구나 삼성전자는 파운드리사업만 하는 TSMC와 달리 메모리반도체에도 투자해야 한다. 증권업계에서는 올해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투자규모를 12조 원 안팎으로 예상한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가 미국에서 파운드리 투자를 단행할 경우 TSMC를 상대로 경쟁력을 보일 수 있는 3나노급 공정 위주로 집중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미국 블룸버그는 노근창 현대차증권 연구원을 인용해 “삼성전자가 ‘2030년 시스템반도체 1위’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미국에서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다”며 “TSMC는 애리조나에서 3나노급 공정을 발전시킬 것이며 삼성전자도 그렇게 할 것이다”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3나노급을 넘어 2나노급 공정에 진출할 가능성도 나온다. 최근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고객사인 IBM이 2나노급 반도체를 개발했고 다른 주요 팹리스도 2나노급 반도체를 연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나노급 반도체를 위한 생산라인 구축도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미국의 투자환경은 반도체기업들에게 매우 우호적이다.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화상으로 열린 반도체 긴급대책회의에서 반도체 재료 웨이퍼를 집어들고 있다.
미국 정계는 미국 반도체 생산을 확대하기 위해 반도체기업 시설투자에 2024년까지 최대 40%의 세액공제를 지원하는 내용의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 정부에서도 법안을 시행하기 위한 예산 확보에 나섰다. 이와 함께 삼성전자와 TSMC 등 선두 반도체기업을 끌어들이기 위한 물밑작업도 이뤄지는 것으로 파악된다.
실제로 로이터는 TSMC가 미국에 반도체공장 5곳을 추가 설립하기로 계획한 데 미국 정부의 요청이 영향을 미쳤다고 전했다.
삼성전자의 미국 투자도 곧 구체화할 것으로 예상되는 대목이다.
삼성전자는 20일 백악관에서 열리는 반도체 공급망 관련 2차 화상회의에 초청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지나 라이몬도 상무부장관도 회의에 참석한다는 점에서 반도체 투자와 관련한 이야기가 오갈 것으로 보인다.
라이몬도 장관은 4일 미국 내 산업단체 행사에 참석해 “반도체 공급난의 중장기적 해결방안은 투자를 확대해 미국에서 더 많은 반도체를 만드는 것이다”며 반도체 인프라 육성 의지를 보였다. [비즈니스포스트 임한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