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이 미국에서 벌이는 배터리 다툼이 정치적 판단의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판결을 놓고 조 바이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여부만 남아있는데 바이든 대통령이 SK이노베이션 배터리공장이 있는 조지아주의 요청에 얼마나 귀를 기울일지 주목된다.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14일 배터리업계에 따르면 미국 조지아주가 SK이노베이션 배터리공장의 존립을 위해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요청하는 상황에서 LG에너지솔루션이 만약의 경우 이 공장 인수에 참여할 수 있다고 나서 조지아주 움직임에 시선이 몰린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은 미국 행정부의 국제무역위 판결 검토기한인 4월11일까지 조지아주 민심을 잡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것으로 전망된다.
국제무역위는 앞서 2월10일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소송에서 LG에너지솔루션의 손을 들어줬다. 이 결정은 미국 행정부의 검토를 거쳐 4월11일 안에 집행 여부가 결정된다.
SK이노베이션은 바이든 대통령이 국제무역위 판결의 집행을 거부할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있다.
SK이노베이션 배터리공장이 위치한 조지아주의 민심은 바이든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일 ‘지렛대’ 중 하나로 꼽힌다.
SK이노베이션은 국제무역위 판결이 그대로 집행되면 조지아주 배터리사업에서 철수할 수도 있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때문에 조지아주정부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요청하며 SK이노베이션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에 앞서 12일 브라이언 켐프 조지아주지사는 바이든 대통령에 보낸 서한에서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공장이 앞으로 2600명을 고용할 것이다”며 “SK이노베이션 공장은 미국 자동차산업을 전기차 중심으로 전환하고 지역 노동자에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대통령의 목표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켐프 주지사는 “국제무역위가 내린 SK이노베이션 배터리 수입금지조치를 뒤집어달라”며 “조지아인 수천 명의 생계가 대통령의 손에 달렸다”고 호소했다.
SK이노베이션의 조지아주 배터리 투자는 조지아주 역사상 최대 규모의 외국인 투자다.
연방정부의 보조금을 받지 않고 진행되는 유일한 배터리 투자라는 점에서 조지아주를 넘어 미국 전체 차원에서도 상징성이 적지 않은 투자사례다. 때문에 켐프 주지사가 이 점을 들어 바이든 대통령을 설득하려할 것이라는 시선이 주를 이룬다.
LG에너지솔루션도 조지아주 민심잡기에 나서고 있다.
조지아주 지역매체 AJC에 따르면 김종현 LG에너지솔루션 대표이사 사장이 직접 라파엘 워녹 조지아주 상원의원에 서한을 보내 SK이노베이션 공장을 인수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김 사장은 서한에서 “외부 투자자가 SK이노베이션 조지아주 배터리공장 인수에 나선다면 LG에너지솔루션이 운영 파트너로 참여할 수 있다”며 “LG에너지솔루션은 조지아주를 돕기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조지아 주정부가 쉽사리 LG에너지솔루션 편으로 돌아서기는 쉽지 않아보인다.
SK이노베이션은 현재 10GWh 규모의 배터리 1공장과 12GWh 규모의 2공장을 조지아주에 짓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은 지난 2월 말 미국 행정부 고위관계자들을 만나 조지아주 배터리 투자를 현재 확정된 24억 달러에서 2025년 50억 달러로 확대하고 고용인원도 2600명에서 6천 명까지 늘린다는 계획도 내놨다.
SK이노베이션의 조지아 투자는 2018년 말 첫 투자계획이 나왔다.
당시 10GWh 규모의 공장을 짓는 데 50GWh 규모 공장에 필요한 부지를 확보해 뒀다는 점에서 대규모의 추가 투자가 진행될 수 있다는 기대를 받았다. SK이노베이션은 이 추가 투자 가능성을 로드맵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조지아주에서는 단순히 공장 인수 가능성만을 내놓은 LG에너지솔루션보다 SK이노베이션이 더 확실한 투자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
LG에너지솔루션이 조지아 배터리공장의 운영 파트너로서 인수에 참여한다고 해도 생산 불안정성 이슈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시선도 나온다.
배터리업계 한 관계자는 “아직 완공되지 않은 대규모 배터리공장을 다른 회사가 인수한다면 공장 가동 자체는 간단하지만 고객사가 기존에 요구하던 사양의 배터리를 그대로 생산하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거부권 행사와 관련해 산업적 판단에 근거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LG에너지솔루션의 미국 투자계획을 고려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을 수 있다.
▲ 브라이언 켐프 미국 조지아 주지사.
앞서 12일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에서 단독으로 5조 원을 투자하고 GM과 협의를 통한 추가 투자까지 더해 미국에서 배터리 생산량을 현재 확정된 40GWh에서 2025년 140GWh까지 확대하겠다는 대규모 투자계획을 밝혔다.
배터리업계에서는 LG에너지솔루션이 미국 내 배터리 조달망을 탄탄하게 구축하고 싶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주면서 거부권 행사 가능성도 차단하려 나선 것이라는 시선이 나온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 대비와 같은 정치적 판단이 섞인 결정을 내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조지아주는 원래 미시시피주, 앨라배마주, 버지니아주 등과 함께 보수적 정치성향이 강력한 ‘바이블벨트(미국 남부의 개신교 강세지역)’ 지역으로 각종 선거마다 공화당의 텃밭이었다.
그런 조지아주가 바이든 대통령이 당선된 2020년 대선에서 경합주(스윙 스테이트)로 전환하면서 민주당의 새로운 정치기반이 될 가능성이 열렸다. 대선 직후 진행된 연방 상원의원 결선투표에서도 조지아주의 2석 모두 민주당의 몫이 됐다.
게다가 조지아주는 대통령 선거인단 규모로는 큰 주다. 16명이 배정돼 미국 51개 주 가운데 8번째로 선거인단이 많다.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는 이 지역의 경제를 좌우할 결정을 내리는 데 정치적 여파를 완전히 배제하기가 쉽지 않을 수밖에 없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 모두 조지아주 민심잡기에 공들이는 이유다. [비즈니스포스트 강용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