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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정부의 홀대와 척박한 연구환경 등으로 반도체 업계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사진은 중국 중국 시안시에 있는 삼성전자의 메모리 반도체공장 라인 모습. |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수출 효자다.
올해 들어 8월까지 반도체 수출은 약 470억 달러로 자동차 수출의 337억 달러를 압도적으로 앞서고 있다. 우리나라 전체수출의 10% 이상을 반도체가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반도체 D램 분야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위상은 독보적이다.
올해 3분기 세계 D램시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각각 42.3%와 26%의 점유율로 1, 2위를 차지했다. 두 업체의 점유율을 합하면 70%대에 육박한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반도체업계 내부에서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반도체산업이 거대자본을 앞세운 ‘중국발 태풍’에 고사하고 말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까지 나온다.
반도체산업에 대한 정부의 홀대, 국내의 척박한 연구환경 등이 위기의 진원지로 꼽힌다.
◆ 반도체 연구개발 신규사업 예산 ‘제로’
반도체산업이 발전하려면 기업뿐 아니라 정부의 적극적 뒷받침이 필수적이다. 중국은 최근 '반도체 굴기’를 선언하며 수십조 원이 투입되는 반도체 육성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18일 미래창조과학부 등에 따르면 우리 정부의 내년도 반도체 연구개발(R&D) 신규사업예산 편성은 ‘0’원이다. 반도체 관련 예산을 산업통상자원부에 배정하는 미래부가 200억 원 가량의 신규사업 예산을 전액 삭감했기 때문이다.
미래부는 반도체산업이 대기업 중심이고 우리 기업의 기술력이 세계수준에 올라선 만큼 더 이상 정부가 연구개발예산을 투입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 이런 결정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규사업예산을 편성하지 않고 기존사업만 운영하면 앞으로 2~3년 안에 모든 사업이 끝나게 된다. 반도체 분야에서 더 이상 정부 차원의 연구개발사업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정부의 예산이 없어지면 당장 대학에서 진행하는 연구 프로젝트도 대폭 줄어들게 된다. 반도체분야는 중견중소기업은 물론이고 대기업들도 연구인력 부족을 호소하고 있는 상황인데 앞으로 신규인력 양성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한 대학교수는 “정부 연구개발사업은 대기업이 수혜를 받는 게 아니라 산업의 뿌리인 대학에서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관련 인프라를 풍부하게 만드는 효과가 크다”며 “한해라도 신규사업 예산편성이 중단되면 다음해 예산을 배정받기 힘든 데다 다른 곳에서 끌어오기도 어려워 절망적 상황”이라고 말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미래부가 정말 반도체 관련 기술개발을 대기업에 의존해도 된다고 보는 것인지 궁금하다”며 “기업은 잘 나가는 메모리반도체도 위기라며 걱정을 하는데 정부는 국가 기간산업인 반도체를 일부 대기업에 맡겨두고 방치하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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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8월 25일 경기도 이천에서 열린 SK하이닉스 M14 반도체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
◆ 척박한 반도체 연구환경
한국 최고의 반도체연구소로 꼽히는 서울대반도체공동연구소는 최근 구인난에 시달리고 있다.
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황철성 교수(서울대 재료공학과)의 임기가 올해 말로 만료되는데 마땅한 후임자를 구하지 못한 상태다.
이는 우리나라 반도체 연구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서울대반도체공동연구소는 반도체 전공자가 아닌 디스플레이 전공교수를 후임소장으로 섭외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황 소장은 “반도체를 전공한 교수가 거의 없어 어쩔 수 없이 반도체 비전공자가 연구소장을 맡을 것 같다”며 “서울대에서 18년째 교수 생활을 하고 있지만 내가 온 이후 반도체를 전공한 교수를 단 한 명만 임용했다”고 말했다.
반도체 연구교수가 부족한 이유는 정부의 연구개발(R&D) 지원자금이 바이오 쪽에 몰리면서 반도체분야에서 연구자금을 얻어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일부 대학에서 반도체보다 상대적으로 논문을 써내기 좋은 데다 정부예산을 타내기 수월한 바이오분야에 교수와 학생들이 몰리면서 반도체는 ‘찬밥’ 대우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다 보니 반도체 연구실적도 후발주자인 중국에 밀리고 있다.
지난해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반도체소자학회 학술지에 실린 논문 가운데 중국학자와 기업인이 작성한 논문은 26편으로 한국 13편의 2배에 이른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중국논문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이제 한국을 뛰어넘은 것이다.
황 소장은 “부끄럽지만 불과 몇억 원이 없어 연구실에 반도체 관련 장비를 들여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며 “반도체가 없으면 우리 후손들은 뭘 먹고 살지 요즘 들어 걱정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그는 “30년 전만 해도 일본 히타치나 NEC는 우리에게 하늘같은 존재였지만 지금은 세계 10위권 밖으로 사라졌다”며 “지금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우리가 중국에게 그런 꼴을 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 지금부터 5년이 중요하다
중국의 대규모 투자와 국내 연구인력 부족으로 위기를 맞은 반도체업계는 대응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장을 맡고 있는 김기남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 겸 시스템 LSI사업 사장은 최근 열린 ‘국회 신성장산업포럼’에서 “중국정부의 절대적 지원과 거대자본을 앞세운 중국 반도체기업들의 이른바 ‘반도체 굴기’는 한국 반도체산업에 매우 위협적”이라며 “5년을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우리 미래가 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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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남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 겸 시스템 LSI사업부장. |
소현철 신한금융투자 이사는 “중국은 이미 10년 전부터 국가주도로 반도에 산업에 뛰어들 준비를 해 왔다”며 “중국자본이 미국의 마이크론이나 일본 도시바를 인수한다면 한국 반도체 산업에 최악의 위기가 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기업이나 학계는 상황의 절박함을 인식하고 정부의 대응을 호소하지만 정부의 태도는 여전히 미지근하다.
김정화 산업통상자원부 전자부품 과장은 “중국의 추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을 하고 있지만 정답이 없는 것 같다”며 “예산규모에 연연하기보다 적은 돈이라도 어떻게 잘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지속적 연구개발 투자만이 '살 길'이라고 입을 모은다.
장준연 KIST 차세대반도체 연구소장은 “위기를 극복하려면 기술혁신밖에 답이 없다”며 “정부가 지속적으로 연구개발 투자를 하고 산학연은 협력연구로 후발주자가 범접할 수 없는 기술적 혁신을 이뤄내야 한다”고 밝혔다.
황철성 서울대반도체공동연구소장은 “대학과 정부, 기업이 함께 발전할 수 있는 생태계를 지금부터라도 조성해 나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정부가 말로만 수출효자 종목이니 뭐니 하면서 현재 나타나는 외형적 화려함에만 안주하지 않고 학계와 업계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지금이라도 귀를 기울여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재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