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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12일 서울 강서구 공항동 대한항공 본사 복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장녀 조현아 전 부사장 사건에 대해 고개숙여 사과하고 있다.<뉴시스> |
대한항공이 흔들린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기도 힘들게 생겼다.
한진그룹의 오너 경영체제가 1999년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대한항공은 당시 괌 추락사고 이후 안전사고가 계속 일어나자 조중훈 회장이 퇴진하고 조양호 사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대외 업무만 맡는 회장을 맡았다.
그뒤 대한항공은 절치부심해 15년 동안 인명사고를 내지 않는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줬다.
대한항공은 이번 조현아 전 부사장 사건에서 그런 위기관리 능력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최대한 빨리 대응해야 하고 거짓말은 절대 안 된다는 위기관리의 기본조차 지키지 못했다.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은 오너의 일이다 보니 그 누구도 위기관리의 기본에 충실하지 못하고 임시방편으로 사건을 덮는 데 급급하다 사태를 키웠기 때문이다. 곧 오너 경영체제의 경직된 의사결정 구조가 원인이라는 것이다.
대한항공 오너 경영체제가 벼랑 끝으로 몰리면서 조양호 회장이 사태수습을 위해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과거처럼 조 회장을 비롯한 오너일가가 경영일선에서 퇴진하고 전문경영인체제로 전환하는 것도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들은 조현아 파문으로 조 회장 일가에 대한 여론이 너무 나빠져 이대로 가면 그룹 자체가 위기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주문한다.
◆ 위기관리의 기본을 놓친 대한항공
전성철 IGM 세계경영연구원 회장 등이 2011년 펴낸 ‘위기관리 10계명’이라는 책에 ‘처음 24시간이 전부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만큼 신속한 대처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기업 위기관리 전문가들은 “처음에 크게 제대로 사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대한항공은 사건 이후 뒤늦은 대응과 어설픈 해명으로 사태를 키웠다. 초기에 수습할 수 있었던 일을 그룹 전체가 흔들리는 사태로 몰아넣은 데 위기관리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탓이 크다.
조 전 부사장 사건은 8일 처음 언론에 보도됐다. 하지만 대한항공은 이날 오후 늦게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SNS 등을 통해 부정적 여론은 확산됐다. 이 과정에서 확인되지 않은 소문까지 돌았다.
대한항공은 사건이 터지고 대응하는 데 결정적 시간을 허비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오너 일가가 개입된 사건이다 보니 위기관리의 정석이 무시돼 버렸고 결과적으로 일을 키우고 말았다”고 진단했다. 대한항공은 8일 밤 10시경 일방적 해명자료를 내놓았다.
대한항공의 공식 해명자료는 사태를 더 키웠다. 사건 당사자인 조 전 부사장이 직접 사과하지도 않은 데다 조 전 부사장을 두둔하면서 사무장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대한항공은 “조 부사장은 기내 서비스를 책임지는 담당 실무 임원으로서 승무원들의 서비스를 질책했고 이는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사과문이 발표된 직후 여론은 더욱 악화됐다. 대한항공 조종사 노동조합도 곧장 성명을 내고 회사의 해명을 비난했다. 해외 주요 외신들은 이 사건을 비중있게 다뤘고 사건을 패러디한 게시물들도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대한항공 직원들 사이에서 오너 일가의 전횡에 대한 폭로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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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국토교통부 조사를 받기 위해 12일 서울 강서구 국토교통부 항공안전감독관실로 들어서며 인사하고 있다.<뉴시스> |
◆ 왜 후속대처는 깔끔하지 못했나
조 전 부사장의 사퇴과정도 위기관리 기본에서 어긋났다.
조양호 회장은 해외출장에서 귀국한 9일 인천공항에서 긴급 임원회의를 소집한 뒤 조 전 부사장을 퇴진시켰다. 하지만 부사장 직책과 다른 회사 이사회 등기 임원의 자격은 그대로 유지시켰다. ‘무늬만 퇴진’ 논란이 일었다. 조치를 취할 때 깔끔하게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는 기본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진정성이 없다는 비난이 곳곳에서 나왔다. 조 전 부사장은 결국 다음날 부사장 직위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대한항공 외 나머지 계열사 대표는 유지해 비난을 받았다. 결국 조양호 회장은 12일 조현아 전 부사장을 대한항공의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대한항공은 국토부 출석 조사 요청도 처음에 거부하다가 나중에 입장을 바꿨다.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출석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 뒤 검찰 조사가 확대되고 여론도 급격히 나빠지자 출석하겠다며 입장을 바꾼 것이다.
조양호 회장과 조현아 전 부사장이 대중 앞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 정식사과한 것은 이미 검찰조사까지 시작된 지난 12일이었다. 사건 발생 7일, 사건이 알려진 지 4일 만의 일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대한항공 오너 일가는 일반 국민의 정서와 너무 동떨어져 미련을 품다 보니 결과적으로 일을 그릇치고 말았다”며 “심각한 점은 주변에서 이런 대응의 문제점을 제대로 직언하는 참모들이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 거짓 해명 드러나면 정말 위기
대한항공은 이 과정에서 사건을 은폐하고 조직적으로 거짓말을 했다는 의혹에도 직면해 있다.
사건 당시 항공기에서 내렸던 박창진 대한항공 사무장은 12일 인터뷰에서 조 전 부사장으로부터 욕설을 듣고 폭행까지 당했다고 주장했다. 또 대항항공이 이 사건에 관해 거짓진술을 하도록 강요했다고 폭로했다.
조 전 부사장은 국토부 조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 욕설과 폭행 주장에 대해 “처음 듣는 일”이라며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대한항공도 이런 의혹에 대해서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하지만 현재 조 전 부사장과 대한항공의 말은 거짓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조 전 부사장의 앞자리에 있던 일등석 승객은 13일 서울서부지검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고 기자들과 만나 조 전 부사장이 사무장에게 내릴 것을 강요했고 승무원에게 고성을 질렀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승무원의 어깨를 밀쳤다고도 전했다.
이 승객은 “대한항공이 자신에게 모형 비행기와 달력 등을 주며 회유하려 했다”고도 밝혔다.
사건의 양상이 대한항공의 조직적 은폐와 거짓진술 강요 등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혹들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대한항공과 오너 일가는 치명상을 입게 된다.
전문가들은 대한항공이 “절대 거짓말을 하지 말 것”이라는 기업의 위기관리 원칙을 버린 것으로 나타난다면 그 파장은 짐작하기 힘들 것이라고 본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잘못을 했으면 빨리 인정하고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가 직접 진정성있게 사과하는 것이 홍보의 정석”이라며 “당장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해명과 변명을 하다보면 결국 수습할 수 없는 지경까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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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
◆ 벼랑 끝에 몰린 15년 오너 경영체제
조현아 전 부사장 사건은 시작부터 대응까지 오너경영체제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다.
오랫동안 오너경영을 계속하면서 외부보다 오너일가를 우선으로 하는 기업문화가 자리잡았고 이 과정에서 폐쇄적 의사결정구조가 굳어졌다는 것이다.
대한항공이 국민정서와 동떨어진 대응을 하게 된 데 대한항공 내부의 이런 분위기가 크게 작용했다.
사건 발생 직후 당사자인 조 전 부사장이 직접 나타나지 않고 홍보팀이 조 전 부사장을 감싸며 변명으로 일관한 사과문을 내놓게 된 것도 회사 자체보다 오너일가를 더 중시하는 회사의 분위기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위기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외부의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이를 바탕으로 해결하는 것인데 대한항공은 일반인의 눈높이가 아니라 오너 일가의 시각에서 일을 해결하려 한 셈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기업의 장기적 발전보다 조 전 부사장 등 오너 일가의 안위를 더 중시하는 잘못된 조직문화가 대한항공 내에 뿌리박혀 있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경직된 의사결정 구조는 오너경영체제의 문제점을 여과없이 보여준다는 지적도 나온다. 삼성그룹의 경우 오너경영체제를 해도 전문경영인의 합리적 판단이 작용하는데 대한항공의 경우 이런 여지도 없을 정도로 황제경영이 뿌리박혀 있다는 것이다.
사건 초기 조 회장 일가가 재빨리 수습에 나서야 한다는 일부 여론이 대한항공 내부에서도 나왔다.
그러나 이를 건의할 만한 분위기가 전혀 마련되지 않았다고 대한항공 관계자들은 말한다. 대한항공의 최초 사과문도 애초 홍보실이 작성한 초안에서 크게 바뀌면서 더욱 공분을 낳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의 한 전문가는 “수직적 사내 의사소통 구조로 기업의 위기관리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4일 페이스북에 “사내변호사 포함 직원들이 하명 사안만 해결하지 총수와 그 가족에 대한 내부통제를 하거나 위기를 적극적으로 타개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임에 틀림없다”고 말했다.
◆ 모두 퇴진한 1999년, 이번에 어떻게 돌파할까
대한항공의 오너 경영은 1999년에도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1997년 225명이 사망한 괌 추락사고 2년 만에 다시 상하이공항 추락사고가 벌어지자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대한항공을 향해 “잘못된 오너 경영의 표본적 케이스”라고 질타했다.
김 대통령은 “대한항공이 지나치게 성장위주의 경영을 하고 인명안전 경영은 하지 않는 등 경영방식에 근본적 문제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대통령의 발언이 있고 이틀 만에 조중훈 당시 한진그룹 회장을 비롯해 오너일가가 퇴진했다. 조양호 회장도 대한항공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대신 대외업무만 맡는 그룹 회장 자리에 올랐다.
그 뒤 조양호 회장은 절치부심하며 안전강화에 나섰다. 2000년 부사장급의 외국인 안전담당 임원을 영입해 안전업무에 대한 독립성과 전문성을 강화했다. 조종은 물론이고 정비에서 운항까지 철저히 안전규정을 지키도록 했다.
특히 괌 사고의 직접적 원인으로 지목된 의사소통 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힘썼고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기업문화도 안착시켰다.
그 결과 대한항공은 15년 동안 단 한 차례의 인명사고도 내지 않았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대한항공은 이번 위기상황에서 1999년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재계 관계자들은 조 회장이 오너일가의 퇴진과 전문경영인체제로 전환을 검토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이번 사태가 조현아 전 부사장의 오만한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고 조 회장 자녀들에 대한 비판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사태의 빠른 수습을 위해 오너일가의 동반퇴진과 전문경영인체제로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비즈니스포스트 조은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