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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크 랑 전 프랑스 문화부 장관 |
도서정가제 개정안 시행이 눈앞에 다가왔다.
개정 도서정가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자유로운 가격경쟁을 방해하고 소비자들이 도서를 구입하는 가격만 높아져 제2의 단통법이 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온다.
그러나 도서정가제는 세계적으로 150년 넘게 지속돼 온 제도다.
많은 나라들이 도서 등 출판물을 단순히 소비재가 아닌 공공재로 파악해 가격제도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나라별로 도서출판 시장상황에 따라 도서정가제 시행양상은 천차만별이다.
우리나라도 도서출판시장 보호를 위해 2003년부터 도서정가제를 시행하고는 있지만 편법할인 등 실효성이 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번에 개정안을 시행해 원래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이번에 시행되는 도서정가제 개정안은 기존 도서정가제보다 한층 강화된 것이지만 다른 나라의 도서정가제에 비하면 미흡한 점이 많다는 지적도 나온다.
프랑스나 독일처럼 엄격한 외국의 도서정가제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이들 국가들은 도서정가제법을 만들어 자국의 도서출판시장을 보호하고 지지하는 버팀목으로 삼았다. 또 변화하는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법을 개정하고 새로운 법을 도입하고 있다.
◆ 도서정가제 법제정의 기초, 프랑스의 랑법
프랑스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도서정가제를 법제화한 나라다. 프랑스 정부는 1924년 푸아레법령으로 권장 가격제도를 만들었고 업계는 이를 따랐다.
그러나 갈수록 경쟁은 심화되고 대형서점이 할인을 앞세워 작은 서점들을 고사시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형서점으로부터 소규모 동네서점과 소형 출판사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 다시 등장했다.
1981년 미테랑 정부에서 자크 랑 문화부 장관이 도서정가제법을 만들어 ‘랑법’이라고 불린다. 랑 장관은 외규장각 도서반환의 주역으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랑 장관은 도서정가제법을 제정하는 이유를 “당장의 이익에 가려서는 안될 책의 문화적 특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랑 장관은 “책을 다른 일반적 상품과 동일하게 간주하는 것을 거부하고 시장원리를 수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랑법은 프랑스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랑법은 전국 어디서나 동일한 가격으로 책을 판매해 국민의 독서평등권을 확보하는 것을 최우선적 목적으로 했다. 또 도서가 도시 등 일부지역에 집중되는 것을 막아 전국적 서적 유통망을 유지하고, 어려운 작품들도 출판할 수 있도록 출판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도 목적으로 했다.
이에 따라 모든 도서는 출판사가 정한 정가에 팔리고 서점은 정가의 5%까지만 할인이 허용된다. 그뒤 일부 예외조항 등이 바뀌기는 했으나 정가에서 5%까지 할인한다는 엄격한 조항은 변화가 없다.
랑법은 책의 종류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동일하게 적용된다. 세계 최초로 법률로 도서정가제를 규정한 랑법은 이후 다른 나라에서도 관련법 제정의 중요한 모델이 됐다.
랑법 덕분에 프랑스 도서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안정적 생태계 조성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프랑스에 출판사를 포함해 유통사나 대형체인과 무관한 독립서점이 800개 이상 존재한다. 독립서점을 포함한 전통적 서점은 3500개가 있다.
◆ 온라인서점 확장에 규제로 대응한 프랑스
그러나 프랑스 도서시장도 2000년대 들어서며 온라인시장이 커지면서 위기를 맞게 됐다. 정가에서 5% 할인에 무료배송을 제공하는 온라인서점이 오프라인서점보다 경쟁우위에 오른 것이다.
2003년 도서시장에서 온라인 비중은 3.2%였지만 2013년 18%까지 높아졌다. 이 가운데 무려 80%를 아마존이 장악했다. 1980년대 만들어진 랑법은 온라인 판매의 장점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보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프랑스의 중도우파 야당인 대중운동연합이 2013년 도서정가제 개정안을 발의했다. 무료로 책을 배송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의 개정안이었다.
프랑스 의회는 여기에 온라인서점은 정가에서 할인판매를 할 수 없다는 내용을 추가했다. 이 법은 ‘반아마존법’이라고 불리며 2014년 7월부터 시행됐다.
반아마존 법은 두 가지 조항을 규정했다. 첫째는 온라인판매의 경우 정가대로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반아마존법에 따르면 책을 구매자에게 배송하지만 소매 매장에서 책을 찾아가지 않을 경우 판매가격은 출판사 또는 수입상이 결정한다. 소매상은 할인가격을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두 번째로 무료배송 불가 조항이다. 소매상은 스스로 정하는 배송 서비스료에 대해 도서 판매가격의 5% 안에서 할인할 수 있지만 이 서비스를 무료로 할 수 없다.
아마존은 이에 띠라 배송료를 0.01유로(약 14원)로 책정해 사실상 무료로 제공하며 개정안에 맞섰다.
프랑스서점연합은 아마존이 배송료로 0.01유로만 받는 것에 대해 “법을 우회하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서점연합은 “서점에서 책을 사면 지역사회의 문화와 삶을 보호하면서 더 저렴하게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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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
◆ 독일, 공급률까지 제한한 엄격한 도서정가제
독일에서 도서정가제가 시행된 것은 116년 전인 1888년이다.
독일은 출판사들의 자율규약에 따라 정가제도가 유지됐다. 1888년 아돌프 크뢰너 서적상업협회 회장은 “할인가격으로 신간을 판매하면 전국 서점이 문을 닫아야 할 것”이라며 “도서 할인은 작가, 독자, 출판사 모두에게 손해”라고 주장했다.
서점들은 소비자에게 책을 팔 때 출판사가 정한 가격을 따랐다. 이를 위반할 경우 서적상업협회에서 제재를 가했다.
자율적 도서정가제는 1964년 공동협약으로 성문화됐다. 공동협약은 정가제를 관리 감독할 수 있는 관재인을 따로 둬 운영했다. 1000여 개 출판사와 서점들이 공동협약에 참여했다. 참여는 자율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공동협약에 참여하지 않는 곳은 영업이 어려웠다.
독일의 도서정가제가 법적 근거를 마련한 것은 1980년 경쟁제한방지법이다. 경쟁제한방지법은 시장의 담합행위를 막고 가격경쟁을 보장하는 법이지만 출판물은 예외조항으로 뒀다.
판매가격을 강제하는 도서정가제를 법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도서시장이 단순히 경제적 시장일 뿐 아니라 국가가 책임져야 할 문화재로서 성격이 있다는 인식에서다.
그러나 판매자들끼리 일종의 가격담합행위인 공동협약은 EU의 반발을 샀다. EU는 공동협약이 EU의 자율경쟁법에 위배된다며 압박했다. 독일이 오스트리아와 공동으로 도서정가제 협약을 맺으려던 것도 무산됐다.
공동협약에 대해 부정적 외풍이 불자 독일 안에서 도서정가제를 법적 제도로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다. 독일은 프랑스 등 다른 국가의 도서정가제 법안을 참고해 2002년 출판물정가법을 제정했다.
독일의 출판물정가법은 출간된지 18개월 이하의 도서에 대해 출판사나 수입사가 정한 정가대로 팔려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은품 등 부가혜택은 가격의 2% 이내로 제한된다.
독일의 출판물정가법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출판사가 서점에 책을 판매하는 가격인 공급률도 제한했다는 것이다. 출판물정가법 6조는 출판사가 특정 서점과 거래 때 할인을 해주면 안된다고 명시했다.
이로써 대형서점에 낮은 공급률로 책을 공급하고 소형서점에 높은 공급률로 책을 공급하는 행위를 차단했다.
◆ 도서정가제의 갈림길. 자유경쟁 Vs 중소기업 보호
일본 역시 출판물정가법 시행 이전 독일과 유사하다.
독점금지법에서 정한 예외조항에 따라 도서는 정가로 판매된다. 출판사와 도매상, 도매상과 서점 등 시장의 쌍방은 자율적으로 재판매가격유지 협약을 맺어 도서정가제를 지키고 있다. 재판매가격이란 소매점에서 소비자에게 책을 판매하는 가격이다.
일본은 출판물에 대해 출판업의 경제적 기반 불안정, 출판물의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특수성, 낮은 반복구매 가능성, 문화적 가치와 교양의 균등한 보급 목적 등을 감안해 독점금지법에서 제외하고 있다. 이 때문에 소비자는 전국 어디서나 균일한 가격으로 책을 구입할 수 있다.
이밖에도 스페인, 그리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많은 국가가 도서정가제를 시행하고 있다. 도서정가제를 시행하는 나라는 34개 OECD국가 가운데 자유시장경제를 중시하는 미국, 영국, 캐나다 등을 제외한 16개국이다.
대략 절반 정도 되는 나라가 도서정가제를 시행중이다. 일부 국가는 도서정가제 도입을 논의하고 있으며 반대로 폐지를 추진하거나 이미 폐지한 곳도 있다.
대체로 도서정가제를 시행하는 나라는 중소출판사와 서점들이 뿌리를 내리고 대형출판사와 서점은 크게 자라지 못했다.
반면 자유경쟁을 하는 미국과 영국은 대형출판사들이 규모를 키운 반면 상위 20개 출판사가 전체 시장의 97%를 차지하는 등 쏠림 현상이 지나치다는 지적을 받는다. [비즈니스포스트 김디모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