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회가 대형마트 새벽배송 허용 여부를 논의하는 데 조만간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새벽배송 허용이 대형마트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사진은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는 고객들의 모습. <연합뉴스>
당시 미국 철도 회사들은 자신들의 본업을 승객과 화물을 안전하고 빠르게 나르는 ‘운송업’이 아니라 단순히 레일 위를 달리는 ‘철도업’으로 좁게 정의했다. 기업의 정체성을 고객의 본질적 수요인 ‘이동’이 아닌 자신들이 가진 기술과 인프라, 즉 ‘철로와 기차’에 가둬버린 것이다.
이 작은 시각의 차이는 파괴적 결과로 이어졌다.
20세기 중반 도로망이 뚫리면서 자동차와 트럭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비행기라는 강력한 대체재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철도회사들은 이들을 운송시장에서 함께 경쟁해야 할 경쟁자로 보지 않았다. 고객들이 더 유연하고 빠른 도로와 하늘길로 발길을 돌리는 동안에도 철도회사들은 기존 철로 규제 완화나 노선 확장, 열차 제원 개선 같은 지엽적 개선에만 매달렸다.
결국 고객의 본질적 변화를 읽지 못한 철도 회사들은 거대한 운송 시장의 주도권을 통째로 빼앗긴 채 1950년대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걸었다.
현재 대한민국 국회가 대형마트를 바라보는 시선을 보면 딱 60여 년 전 미국 철도회사들이 자신들을 바라보던 ‘근시안’과 꼭 닮았다.
유통업의 본질이 시공간을 초월한 커머스 생태계 전쟁으로 재편된 지 오래지만 국회는 여전히 오프라인 점포라는 바탕 위에서 ‘새벽배송 셔터’를 몇 시에 올릴 것인가라는 낡은 문법에 매몰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를 중심으로 대형마트 새벽배송 허용 논의가 다시 급물살을 탈 것으로 전망되면서 드는 생각이다.
대형마트 새벽배송 논의가 이루어지는 배경에는 나름 합리적 명분이 존재한다. 2025년 말 쿠팡에서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태가 터지면서 거대 플랫폼의 독주를 견제할 건강한 대체재가 시급하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소상공인 보호를 이유로 대형마트 규제 완화를 일종의 금기로 여겼던 여당과 진보 진영조차 전향적으로 새벽배송 논의의 길을 열어젖혔다. 유통시장에서 독주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플랫폼을 견제하기 위해 대형마트라는 기존 인프라를 활용하겠다는 발상은 정책적으로 충분히 일리가 있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명분과 실리는 다르다.
정치권의 의도대로 ‘새벽배송 빗장 풀기’라는 단편적 카드 하나가 과연 쿠팡을 견제할 강력한 대체재를 양성해낼 수 있을지를 묻자면 물음표가 남는다.
한 유통 담당 증권사 연구원이 “이제 와서 새벽배송을 허용하느냐 마느냐 여부는 전혀 중요한게 아닌데”라고 냉소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쿠팡이 천문학적 투자로 사실상 독과점 체제를 굳힌 새벽배송 시장은 극심한 레드오션이다. 밤새 물류센터를 돌리고 새벽에 배송트럭을 출발시키는 데 드는 심야 인건비와 냉장·냉동 물류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오프라인 점포 유지와 인력 고용 때문에 고정비 부담이 큰 대형마트가 뒤늦게 이 싸움에 뛰어든다고 상황이 달라질까? 매출은 늘어날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영업이익률은 곤두박질치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여겨진다.
소비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편해질 대로 편해진 이커머스 생태계에 적응한 만큼 마트로 쉽게 돌아갈 소비자가 엄청 많다고 보긴 어려워 보인다.
국회의 어설픈 규제 완화 논의가 거대 플랫폼을 견제하기는커녕 대형마트의 수익성만 악화시켜 오히려 이커머스 플랫폼을 더 강력하게 만드는 독약이 될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는 뜻이다.
▲ 국회가 대형마트 새벽배송을 허용해준다 한들 막대한 투자로 인프라를 구축한 쿠팡과 같은 이커머스 플랫폼을 능가하기는 어렵다는 시선이 우세하다. 국회가 좀 더 큰 틀에서 대형마트 규제 혁신을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진은 한 물류센터에서 진행되는 택배 분류 작업 모습. <연합뉴스>
우선 ‘새벽배송을 허용하느냐 마느냐’라는 10년 전 낡은 프레임의 논의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진짜 독점 플랫폼을 견제하고 국내 유통산업의 뼈대를 살리려면 오프라인 유통업이 가진 고유의 본업 경쟁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구조적 규제 혁신’의 방향으로 논의를 확장해야 한다.
실제로 여러 오프라인 유통업계 종사자들을 만나 얘기를 들어봐도 비슷한 얘기가 많이 들린다.
이들은 새벽배송 논의를 바라지 않는다. 대신 24시간 문을 닫지 않는 이커머스 플랫폼과 같은 선 위에서 경쟁할 수 있는 ‘평평한 운동장’을 원한다. 대표적인 것이 의무휴업일 제도의 전면적인 평일 전환이다.
이미 대구와 서울 일부 자치구에서 증명되었듯 의무휴업일을 평일로 전환했을 때 대형마트 매출은 3~8%가량 유의미하게 반등했다. 우려했던 골목상권 타격 대신 주변 상권이 함께 살아나는 낙수효과도 확인됐다.
국회가 유통산업발전법을 개정해 대형마트의 주말 영업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활기를 잃어가는 대형마트가 진짜 원하는 바일 수 있다. “주말에 장 보는 문화를 복원하는 것이 시발점이 될 것”이라는 한 유통업계 종사자의 말에 시사점이 많아 보인다.
오프라인 매장을 재단장하는 데 세제를 지원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사람들이 마트에 가는 이유는 사실 별게 없다. 오프라인이 주는 특별한 경험을 원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매대가 펼쳐진 특별한 공간을 마주하는 경험, 카트를 끌고 매대를 이리저리 오가는 그 경험을 위해 마트에 간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국회가 이 지점을 잘 들여다봤으면 한다.
대형마트들이 장사가 안 된다는 이유로 비효율 점포를 정리하고 체험형 공간으로 전환할 때 투자 세액공제를 과감하게 지원했으면 한다. 단지 오프라인 점포 활성화를 돕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고용 유발 효과가 큰 오프라인 유통업의 일자리를 지키는 실질적인 방법이라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고민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미국 철도회사들이 몰락한 것은 기차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변화한 운송 시장의 판도를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회는 지금 대형마트에 새벽배송이라는 낡은 기차 한 대를 더 얹어주려는 근시안적 태도에서 벗어나 진짜 유통 대수술을 시작해야 한다.
타이밍을 놓친 정책은 지원이 아니라 또 다른 규제일 뿐이다. 남희헌 유통&4차산업부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