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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일 낮 싱가포르 도심의 모습. 자전거를 함께 타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비즈니스포스트>
서울의 약 1.2배 크기인 싱가포르는 영토가 크지도 자원이 많지도 않다. 고온다습한 기후에 비가 수시로 내려도 빗물을 담아낼 땅이 부족하고 나무를 키울 땅도 마땅치 않다.
하지만 싱가포르 금융시장은 세계의 자본을 끌어들이고 세계로 뻗어나간다. 그 속에서 한국 금융사 주재원들은 글로벌 자본과 경쟁하며 싱가포르를 전략적 거점으로 삼아 아시아, 그 너머 더 넓은 시장을 두드리고 있다.
은행과 증권사 법인장과 지점장, 주재원들은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 인도까지 국경을 넘나드는 바쁜 일정에도 현장의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쏟아냈다. 그들의 인상 깊었던 이야기를 소개해본다.
▲ 싱가포르의 대표적 랜드마크 마리나베이의 저녁 모습. 마리나금융지구의 고층 빌딩들도 불을 밝히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 “물가만 빼면 다 좋다.”
싱가포르에서 만난 주재원들은 하나같이 어마어마한 물가 이야기를 했다. 올해 1월 부임한 한 국내 은행 주재원은 처음 싱가포르에 왔을 때 4인 가족 외식으로 삼겹살을 먹었다가 40만 원에 가까운 영수증을 받고 깜짝 놀랐다고 회상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싱가포르 생활 4년차 지점장은 “그래서 싱가포르에서는 다들 집에서 바비큐를 자주 해 먹는다”고 말하며 웃었다.
또 다른 국내 금융사 법인장도 싱가포르의 물가를 두고 '살인적'이라고 말했다. 외식 물가가 비싸다 보니 현지인 직원들을 보면 주로 호커센터(푸트코트)에서 식사거리를 사와서 먹는다고 한다. 싱가포르는 계란 정도를 제외하면 사실상 모든 식량을 수입에 의존한다니 물가가 비쌀 수밖에 없다.
비싼 건 외식 물가뿐만이 아니다. 월세도 한국의 3~4배 수준이고 차도 토요타 캠리 모델이 25만 달러(약 3억 원)정도 한단다.
#. “연예인 ‘노이즈’도, 정치 ‘노이즈’도 없다.”
싱가포르 현지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싱가포르의 생활이 ‘심플(simple)’해서 좋다고 말했다. 날씨도 항상 똑같고 생활이 예측 가능해 따분하지만 동시에 단순해서 편하다는 것이다.
그는 싱가포르 사람들은 연예인에 관한 관심도 크지 않아서 연예인이 등장하는 광고도 많이 없다고 설명했다. 애초 연예인이 화젯거리가 아니다. 또 정치와 관련된 갈등이나 변화도 거의 없다. 금융업계에 속해 있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경제 이야기만 한다며 웃었다.
#. “여기서 K푸드는 프리미엄이다.”
싱가포르는 원래도 외식 물가가 비싼데 그 가운데 한국 음식은 더욱 비싸다. 김치찌개 한 번 먹으려면 3만~4만 원을 낼 각오를 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삼겹살 외식 물가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된다. 한국 드라마와 K팝 등 문화 콘텐츠가 인기를 얻으면서 그 속에 등장하는 음식의 ‘위상’도 올라가서다.
싱가포르 곳곳에서 만난 현지인들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먼저 한국 드라마와 아이돌 가수의 노래 이야기를 꺼냈다. 싱가포르 창이국제공항에서 숙소로 가기 위해 탔던 그랩 기사는 ‘태양의 후예’를 정말 재밌게 봤다며 드라마 OST 영상을 보여줬다. 이번 겨울에 제주도와 부산 등 한국을 여행할 계획이라며 기대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현지 금융사의 한 관계자는 미팅에 앞서 인사를 나누면서 K팝을 좋아한다고 수줍게 ‘팬밍아웃’을 했다.
이번 싱가포르 출장에서 묵었던 차이나타운 숙소 앞 대형 쇼핑몰 전광판에서는 아침부터 YG엔터테인먼트 소속 신인 걸그룹 ‘베이비몬스터’ 글로벌투어 홍보영상이 나왔고 이동을 위해 탔던 그랩에서는 하이브의 걸그룹 ‘캣츠아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 “한국 증시는 싱가포르에서도 ‘핫’하다.”
싱가포르 현지 투자시장의 한 관계자는 요즘 싱가포르에서도 한국 증시에 정말 관심이 높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세계 자금은 미국 시장에 심하게 편중됐다. 유럽 증시가 주춤하고 인도 등 신흥국 증시는 불확실성과 리스크가 여전해 마땅한 대안 시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 증시는 싱가포르에 모인 글로벌 투자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아직 저평가 받고 있으면서도 반도체처럼 실력과 실적 등 ‘기본기’를 인정받은 산업이 있어 증시 상승 요인의 실체가 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한국 정책당국의 한 관계자도 현재 싱가포르 금융시장은 한국 반도체와 피지컬 인공지능(AI), 방산 등의 종목에 관심이 뜨겁다고 말했다.
다만 한국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해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조언도 있었다.
상법개정을 통한 주주가치 개선 등 정책 방향이 굉장히 큰 의미가 있지만 계속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면서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한국 증시에 관한 신뢰를 심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결국 투자결정에는 시장을 장기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판단요인이 된다”고 말했다.
▲ 싱가포르 가든스 바이 더 베이와 빌딩숲이 세워진 도심의 모습. 싱가포르의 대표 관광명소인 가든스 바이 더 베이는 인공 슈퍼트리와 온실, 수변공원이 어우러진 친환경 도시공간으로 싱가포르의 지속가능한 도시개발을 상징한다. <비즈니스포스트>
#. “싱가포르의 규제는 하지 말라는 것 빼고 다 해도 된다는 의미다.”
싱가포르에 진출한 한국 금융사의 한 주재원은 싱가포르의 금융당국이 한국과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의 규제는 허용되는 것을 정한다. 반면 싱가포르는 하면 안 되는 것을 정한다. 이른바 ‘네거티브(negative)’ 방식이다.
실제 싱가포르에서 만난 정부 소유 국부펀드나 스타트업 투자기관 관계자들은 자금운영 등 실질적 경영에 있어서는 완전한 자율성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이를 통해 금융이 변화를 먼저 감지하고 준비하는 혁신의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네거티브 규제를 바탕으로 하다 보니 혁신기술, 신상품 도입도 빠르다. 싱가포르 현지의 한국인 주재원들은 이런 규제환경을 싱가포르가 전통 기업금융, 역외금융, 투자금융뿐 아니라 스테이블코인을 포함한 디지털자산 등 핀테크 혁신의 ‘요람’이 될 수 있는 핵심 배경으로 꼽았다.
#. “여기서 차 있으면 '찐' 부자다.”
현지에서 만난 한 한국 금융사 주재원은 싱가포르에서는 개인이 차를 사려면 한국 개인택시처럼 차 말고도 번호판을 사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차량의 전체 등록대수를 일정 수량으로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주재원은 싱가포르에 온 지 4년차가 됐는데 처음 왔을 때는 차량 번호판 낙찰금액이 한국 돈으로 1억 원 정도했는데 지금은 더 올라서 1억5천만 원 정도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차량 번호판은 10년마다 새롭게 입찰을 받아야 한다. 한 번 사면 끝이 아니라 계속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차를 소유할 수 있는 셈이다. 결국 싱가포르 도로 위의 차량들은 진짜 부자의 ‘상징’인 것이다.
#. “싱가포르도 출산율은 낮다. 하지만 외국인 인재와 노동력을 적극 유치하면서 인구 규모를 키우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한국 금융사 주재원들은 싱가포르도 한국처럼 젊은 층의 결혼율, 출산율이 높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과 비슷한 것 같다고.
다만 싱가포르 정부는 적극적 외국인 인재와 노동력 유치를 통해 그 간극을 열심히 채웠다.
대표적으로 싱가포르는 해외 고급 인력을 유치하기 위해 ‘원패스(ONE Pass)’ 비자제도를 도입했다. 원패스 비자는 일정 수준 이상의 고소득 전문직이나 뛰어난 학술 성과를 낸 인재에서 최대 5년의 체류와 취업활동을 보장하는 것이다.
#. “싱가포르 ‘청년’들도 자격증 공부, 운동 등 자기개발에 열심이다.”
한국 금융사의 한 법인장은 싱가포르 청년, 직장인들도 ‘러닝’ ‘사이클’ 같은 운동과 자격증 따기에 진심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지원해주는 무료 프로그램이 많기도 하고 싱가포르 고용시장이 유연해 이직이 활발한 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싱가포르는 실제로 글로벌 금융사들이 워낙 많이 들어와 있다 보니 열심히 공부해서 연봉을 올려 이직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한국 주재원도 처음 부임했을 때 있던 현지인 직원들이 아직도 그대로 있는 경우는 몇 명에 그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회사도 미리 통보만 하면 상대적으로 직원을 쉽게 해고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개발이 필수이기도 하다.
싱가포르 마리나베이에서는 관광객들 사이사이 무더운 날씨에도 러닝을 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평일 낮의 도심에서도 단체로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 “가끔은 황량한 벌판에 혼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한국 금융사의 한 주재원은 본사 근무도 그렇지만 해외 근무를 하다 보면 엄청난 책임감과 부담감이 동시에 몰려올 때가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 본사에는 수천 명의 직원이 각자의 전문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현지 당국의 규정 변화도 직접 파악해야 하고 영업부터 대관업무, 리스크관리, 조직관리까지 모두 챙겨야 한다. 규모가 크지 않은 조직에서 언어와 문화가 다른 현지 직원들을 이끌며 정찰병이 되고 때로는 기마병이 돼야 한다.
하지만 싱가포르 현지에서 만난 한국 금융사 주재원에게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부담감’보다는 ‘열정’이었다. 또 생각보다 먼 싱가포르 땅에서 같이 일하고 있는 같은 한국 금융사 주재원들에 관한 동료애였다.
같은 고객, 같은 계약을 두고 서로 뺏고 뺏기기도 하지만 글로벌 금융사들과 경쟁하는 이 치열한 시장에서 함께 성장해 'K금융'의 영토를 넓혀가자는 이야기를 싱가포르 곳곳에서 들을 수 있었다. 박혜린 김민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