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제명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2차관(가운데)이 1월1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 1차 평가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정부 주도 '국가대표 AI' 선발전에서 네이버와 엔씨소프트가 추가로 탈락한 사실을 전하는 기사에 담긴 표현들이다. 네이버 이해진 창업자 겸 이사회 의장과 최수연 대표, 엔씨소프트 김택진 창업자 겸 공동 대표이사가 '나 어떡해' 표정을 짓는다는 기사도 보인다.
과연 그럴까.
비즈니스포스트가 탈락한 업체 관계자에 다짜고짜 '국가대표 AI 선발전 탈락을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넸더니, 한결같이 "우리가 표정관리 중인 걸 어찌 알았냐"고 바로 속을 내보였다.
이번에 탈락한 업체 중 한 곳의 임원은 "우리가 밖에다 크게 말하지는 못하고, 축하받을 일까지는 아니지만, 차라리 잘됐다는 분위기가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다른 업체 팀장은 "그동안 애쓴 분들께는 미안한 얘기지만, 이쯤에서 탈락한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고 털어놨다.
두 업체 모두 패자 부활전 참여 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그럴 이유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박윤영 KT 차기 CEO 후보 등 앞서 탈락한 KT와 카카오 쪽 관계자들도 "다른 기회를 엿볼 수 있게 됐다"는 반응을 보였다. 탈락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는 모습이 역력하다.
비즈니스포스트는 선발전 탈락으로 침울해하고 있을 수도 있는 기업들에 왜 이런 '막말' 인사를 건넸고, 그들은 왜 표정 관리하는 모습을 보일까.
전례로 볼 때, 이번 '국가대표 AI 사업자' 타이틀은 '사후관리'에 자신감을 가진 재벌 대기업이 가져가는 게 맞다고 본다. 언론은 물론 정부와 국회까지 '관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대기업이 가져가야 사후 잡음을 관리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다는 얘기다.
다행히 국가대표 AI 사업자 후보 숏 리스트(최종 후보군)에는 LG AI연구원과 SK텔레콤 등 재벌 계열사들이 들어 있다. 이들의 숏리스트 포함 사실을 전하는 언론 기사에는 벌써부터 '회장 활약 덕분'이란 표현이 난무한다.
정부가 국가대표 AI 후보 심사 대상 기업을 5개에서 3개로 추가로 추리는 과정에서 네이버와 엔씨소프트가 탈락했지만, 이들 기업 쪽에서 보면 지금이 최선의 탈락 시기였다고 볼 수도 있다. 앞서 유력 후보군으로 꼽히다가 먼저 탈락한 KT와 카카오 역시 1차 심사에서 탈락해 자존심이 좀 구기긴 했지만, 그래도 탈락하길 잘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뭔 악담이냐고?
전례로 볼 때 국가대표 AI 사업자의 앞 길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국가대표 AI 사업자란 영광도 있지만, 짊어져야 할 짐이 예상보다 무겁고, 사후관리 꺼리도 많아질 수 있다.
국가대표 AI 사업자 선발 프로젝트는 이재명 대통령의 '모두의 AI' 공약과 이재명 정부의 '세계 3대 AI 강국' 정책 목표에서 출발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나라의 새 먹거리를 장만하는, 시의적절하고 방향도 잘 잡았다는 평가가 가능해 보인다.
반면 언제일지 모르지만 정권이 바뀌면 지금 좋은 평가를 받은 것만큼이나 험한 시비꺼리로 전락될 수 있다. 전례로 볼 때 그럴 수도 있다는 얘기다.
전례로 볼 때 이재명 정부가 가장 큰 힘을 주고 추진했고, 나름 성과를 낸 프로젝트라는 게 정권이 바뀐 뒤에는 도마 위에 올려 난도질을 당해야 할 이유가 될 수도 있어서다. 정부가 중간에 선발전 룰을 바꿔 패자 부활전을 하겠다고 나선 부분을 두고, 나중에 시비꺼리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기도 하다.
뒤돌아보면, 역대 정권이 잘 한 일 가운데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김대중 정부가 깃발을 들고 노무현 정부가 계승해 꽃피운 국가정보화와 전자정부 추진 프로젝트다. 구제 금융으로 망가진 나라 경제와 산업을 살리고 국가 차원의 새 먹거리를 장만하기에 시의적절했고, 기술 발전 흐름으로 볼 때 방향도 잘 잡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로 정권이 바뀌며 국가정보화와 전자정부 추진 프로젝트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 4대강 사업 등 이른바 '삽질'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한 명분이었다는 뒷평가가 많았던 것과 상관없이, 어쨌든 이명박 정권은 국가정보화와 전자정부 추진 등 이전 정권의 핵심 프로젝트들에 칼을 들이댔다.
'터니' 먼지가 났고, 사법 처리를 당하기도 했다.
앞서 김영삼 정부 시절 가장 시끌벅적하게 추진된 PCS(개인휴대전화) 사업 허가 프로젝트는 이후 정권이 바뀐 뒤 'PCS 비리 청문회'로 이어졌다. 김영삼 정부 시절 '새로운 꿈의 디지털 이동통신'으로 꼽히던 PCS가 정권이 바뀐 뒤에는 '주파수만 다른 이동전화'로 성격이 재정의되며 엄청난 후유증을 낳기도 했다.
우리나라 이동통신 사업자가 '정부 프로젝트'에 따라 졸지에 5개로 늘어났다가 인위적 절차를 통해 다시 3개로 줄이는 과정이 있었다. 그 부작용으로 우리나라 이동통신 시장에는 '콘크리트 독과점' 구조가 만들어졌다.
물론 PCS 사업 허가 프로젝트 뒤에는 엄청난 권력형 비리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겸 이사회 의장. <연합뉴스>
국가대표 AI 사업자도 정권 교체 뒤 어떤 운명에 처해질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KT, 네이버, 카카오, 엔씨소프트 등은 바뀐 상황을 버거워하거나 버티지 못할 수도 있다.
더욱이 국가대표 AI 사업자는 비즈니스 모델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끝없는 기술개발 투자 요구에 직면하고, AI 생태계 확장 의무와 나눔의 짐을 짊어져야 할 수도 있다.
AI 생태계의 '공동 우물' 구실을 해야 할 수도 있다.
국가대표 AI 사업자는 미국 구글·오픈AI, 중국의 딥시크 등 글로벌 빅테크 사업자들과 기술 경쟁을 벌여야 한다. 또 국가대표 AI 사업자로써 '소버린(주권) AI'를 필요로 하는 국내 스타트업이나 AI 에이전트(응용 서비스) 사업자들에게 AI 엔진을 싼 값에 제공하라는 요구를 받을 수도 있다.
정부가 알뜰폰(MVNO) 사업자 육성 차원에서 이동통신 3사의 통신망 임대 가격을 관리하는 상황이, AI 시장에서 국가대표 AI 사업자를 상대로 이뤄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런 짐을 버거워하거나 외면하면, 국가대표 AI는 '타이컴'(한국형 컴퓨터)이나 'K-도스'(한국형 PC 운영체제) 같은 길을 걸을 수도 있다. 두 사업 모두 미래 먹거리와 국가 기술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정부와 기업들이 힘을 합치는 방식으로 추진됐으나, 지속가능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며 사라졌다.
▲ 김택진 엔씨소프트 창엄자 겸 공동대표이사. <비즈니스포스트>
소버린 AI란 족쇄도 부담이 될 수 있다.
정부는 이번에 네이버를 국가대표 AI 후보에서 탈락시키면서 독자성을 문제삼았다. 류제명 과기정통부 제2차관은 국가대표 AI 사업자 후보 숏리스트를 발표하며 “이미 학습이 된 가중치를 그대로 갖다 쓴 것은 무임승차”라며 “네이버클라우드 정예팀의 AI 모델은 독자성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짚었다.
벤처기업 생태계에서 오픈소스 활용은 관행이다. 네이버가 국가대표 AI 사업자 경선을 치르며 오픈소스를 쓴 것도 이런 관행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정 라이선스에 종속되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냐"는 반박이 나오는 배경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용인하지 않았다. 결격 사유로 삼았다.
지리산을 등반한다고 할 때, 화엄사에서 시작하지 않고 성삼재까지 차로 올랐다고 탈락시킨 꼴이다. 하긴 정부가 애초 이런 심사 잣대를 내놨고, 1차 심사 때도 적용했으니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국가대표 AI 사업자로 선정된 뒤에도 이런 잣대가 계속 적용될 거라는 점이다. 사업자가 새 버전을 내놓는 과정서 오픈소스를 활용하면, 소버린을 잣대로 한 형평성 시비가 제기될 수 있다. 벤처기업 기질을 가진 기업은 이를 견뎌내기 어렵다.
삼성전자도 시급성과 가성비 등을 살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새 반도체 기술을 외부에서 사다 적용하기도 한다.
나중에 이런 상황이 발생할 경우, 대기업들은 언론과 대형 법무법인 등까지 동원해 '상황 관리'에 나설 수 있지만, 네이버·카카오·엔씨소프트 등은 버거울 수 있다.
특히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겸 이사회 의장,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 김택진 엔씨소프트 창업자 겸 공동대표가 이런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긴 어렵다. 이들은 검찰 조사나 국정감사 증인 출석을 앞두고도 짜증을 내거나 공황장애 등을 호소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KT, 카카오, 네이버, 엔씨소프트 등이 비록 탈락하긴 했지만, 선발전에 도전장을 내고 일부는 5대 후보 반열에 든 것만으로 이미 목적한 걸 충분히 얻었다는 평가도 해당 업체 측에서 나온다.
우선 거대언어모델(LLM) 개발 기술력과 경험을 쌓았다.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AI 서비스를 고객 눈높이에 맞춰 이용자 손아귀에 쥐어줄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아니 사업적으로는 국가대표 AI 사업자라는 허울보다 이 쪽에 집중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AI 사업자로 이름을 날리면서 '승자의 저주'도 피하고, 다양한 에이전트 모델을 내놓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최종 승자는 국가대표 AI 사업자란 타이틀을 쥐는 대신, 기존 고객을 잃거나 견제를 당할 수도 있다.
PCS 사업 허가에서 탈락한 삼성은 휴대전화 단말기 사업으로 대박을 쳤고, 사업권을 딴 LG는 휴대전화 시장에서 밀려난 상황이 AI 생태계에서 재연되지 말란 법이 없다.
SK텔레콤과 KT가 경쟁사 LG텔레콤 계열사라는 이유로 LG전자 단말기를 홀대하고, 저비용항공사(LLC)들이 경쟁사라는 이유로 항공기 수리를 대한한공에 안 맡기고 멀리 몽골과 동남아에서 받는 상황이 AI 생태계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고 싶진 않다. 다만 대한민국 미래를 걸고 멋지게 시작한 사업인 만큼 결과에 대해서도 깨끗하게 승복하고, 다시 도전하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모두가 승자다. 그리고 모두가 우리나라 AI 3강을 만들 주역들이다." (류제명 과기정통부 제2차관)
과기정통부 장·차관이 국가대표 AI 선발전에 앞서 취지를 설명한 말이다. 어쩔 수 없이 탈락할 수밖에 없는 업체들의 반발과 상심을 우려해 미리 자락을 깐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 싶다. 숏리스트에 든 대기업들은 '회장님 성과'로 포장 중이고, 탈락한 업체들은 반발하거나 상심하기는커녕 표정 관리 중이다. 김재섭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