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팡의 창업자가 유독 사건사고 앞에서 작아지고 있다. 사진은 김범석 쿠팡Inc(쿠팡 모회사) 이사회 의장 겸 최고경영자(CEO).
쿠팡이 분기 실적을 발표하는 날이면 그는 어김없이 전화기를 잡고 컨퍼런스콜에 참여한다.
단어 선택에는 거침이 없다. “놀라운 성장세”, “강력한 사례” 등 표현에 자신감이 엿보인다. 심지어 어투에서는 벅찬 감정까지 느껴진다.
김범석 의장이 쿠팡의 미래를 낙관하지 않으면 결코 보일 수 없는 태도다. 해외 주요 기관투자자의 질문에도 김 의장은 본인이 아는 최대한을 설명하려 애쓴다.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뜻일 테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유독 한국에서는 자취를 감춘다. 전체 매출의 90% 이상이 한국에서 나오는데도 이상하게 이 나라에서 만큼은 김 의장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은둔의 경영자’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2일 국회에서 열린 긴급 현안질의에 여야 의원들이 “김범석 의장 어디 있느냐”고 추궁해도 박대준 쿠팡 대표이사에게 나오는 대답은 “글로벌 비즈니스 차원에서 해외에 체류하고 있다.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는 말뿐이었다.
쿠팡이 한국에서 일으킨 논란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누리꾼들이 자주 찾는 한국어 위키 사이트만 봐도 쿠팡의 논란과 사건사고를 묶어놓은 문단에 정리된 사건만 30건이 넘는다. 설명이 길어 따로 분리 생성된 문서도 적지 않다.
그러나 김 의장이 앞장서 사과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는 물류센터 화재사고다.
2021년 6월17일 새벽 5시20분경. 쿠팡의 경기도 이천 덕평물류센터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불을 끄기 위해 투입된 소방관 1명이 부상을 당했고 다른 1명은 사망했다.
소방관의 죽음으로 전국적 추모 행렬이 일었다. 쿠팡 창업주가 달려와 현장을 수습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여론이 끓었다. 하지만 쿠팡에서는 강한승 전 대표이사만이 사과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그해 8월. 쿠팡이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한 뒤 두 번째로 분기 실적을 발표했을 때도 같은 모습이었다. 물류센터 화재가 재무적으로 준 충격이 적지 않았던 터라 창업자 차원의 언급이 있을 법도 했지만 김 의장은 ‘fire(화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당시 ‘fire’라는 단어는 모두 4번 언급됐는데 이는 모두 거라브 아난드 최고재무책임자(CFO)에게서 나온 말이다.
투자자에게 항상 당차게 스스럼없이 쿠팡의 현재와 미래를 말했던 김 의장이 유독 쿠팡의 아픈 지점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웅크리는 것이다.
이 기조는 끊이지 않는 사망사고에도 변함이 없었다. 국회 차원에서 김범석 의장을 국정감사의 증인으로 세우겠다고 몇 차례를 별렀지만 그때마다 김 의장은 ‘해외에 체류 중’이라는 이유로 빠져나갔다.
쿠팡의 논리는 이렇다. 김 의장이 이미 한국사업에서는 손을 뗀 만큼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은 한국법인 대표가 책임지는 것이 맞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논리가 ‘무적의 방패’가 될 수는 없다. 김 의장이 직접 챙기는 실적발표 행사만 봐도 그렇다. 한국사업이 돌아가는 현황을 그보다 잘 알고 있는 이가 드물다고 장담해도 될 정도로 김 의장은 한국사업을 너무 잘 알고 있다.
한국 산업계를 달구고 있는 개인정보 유출 사태를 놓고도 5일째 침묵하는 이유 역시 과거와 같을 것이다. 자신이 뒤로 살짝 빠져 있어도 누군가가 수습할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 박대준 쿠팡 대표이사(왼쪽)가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속개한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고 관련 현안질의에 출석해 의원들 질의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국회의원들이 김 의장을 증인으로 신청해 국회 청문회에 세우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과거와 다른 결과가 나올지는 의문이다.
앞으로 태도에 변화가 있든 없든 김 의장이 긴장해야 할 대목이 하나 있다는 점을 꼭 짚고 싶다.
현재로서는 쿠팡의 편리함을 완전히 대신해 줄 수 있는 플랫폼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언젠가 혁신적 플랫폼이 등장한다면 소비자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준비가 돼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쿠팡도 매번 얘기하듯 한국 이커머스 시장이 녹록하지는 않다. 글로벌 유통공룡으로 손꼽히는 아마존도 아직 못 들어온 시장이다. 한때 전 세계 온라인 유통시장을 쥐락펴락했던 이베이조차 한국에서는 안 된다며 두 손을 들고 나간 곳이 바로 한국이다.
쿠팡이 시장을 평정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아직 알고보면 네이버와 양강구도를 형성해 경쟁하는 수준에 그친다. 알리와 테무 등 중국 이커머스 플랫폼의 공습도 여전하다.
김범석 의장이 보여주는 태도로는 미래를 결코 장담할 수 없다. 지금 김 의장에게 필요한 것은 ‘나몰라라’ 자세가 아니라 겸허하게 소비자 앞에 서서 당당하게 사과하는 것이다.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