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환 한화그룹 부회장. <그래픽 씨저널>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올해 4월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유상증자 수정안을 두고 이렇게 지적했다.
한화에너지의 한화 지분 공개매수 역시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3형제의 지배력 강화를 위한 움직임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올해 들어 한화그룹 내 굵직한 경영 의사결정이 잇따랐지만, 이사회가 그 과정에서 리스크를 분산시키기보다 오히려 키우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결국 이런 논란의 배경에는 오너 일가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사회 구조의 한계가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한화그룹 올해만 4조 넘는 유상증자, 주주 사이 갑론을박과 주가 하락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올해 3월 증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유상증자를 2시간 만에 결정했고 한 달 만에 이 결정을 번복했다. 규모는 3조6천억 원에서 2조3천억 원으로 축소됐다.
전체 유통주식의 13%가 넘는 대형거래였고 주주가치가 희석될 우려가 있는 방식이었지만 시장 반응에 휘둘릴만큼 충분한 검토없이 이뤄진 의사결정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이사회가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데도 한 번 의결한 대규모 유상증자 계획을 180도 뒤집었다는 것 자체도 이사회 기능을 놓고 의구심을 키웠다.
실제로 익명의 사외이사는 한 매체(KBS)와의 인터뷰에서 "보통의 안건은 보통 일주일 전에 설명을 듣지만 이번 유상증자의 경우에는 이사회 당일 한 두어 시간 전에 알게됐다"고 말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보안' 때문이라고 해명했지만 이사회에 선임된 사외이사의 존재 이유가 투명성과 독립성 확보를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런 구조에서는 사외이사 역할이 사실상 무력화된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회사는 회의 직전 사외이사를 대상으로 1시간 가량 설명회를 열어 충분히 내용을 설명했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3조 규모의 유상증자를 해야만 하는 이유와 주주가치가 희석된다는 문제점을 두고 최선의 결정을 내릴 만큼 이사들에게 충분한 시간이었냐는 점에서는 의문이 든다.
회의가 화상으로 이뤄졌고 2시간 안에 끝났다는 점도 사외이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막는 제약조건으로 꼽히기도 했다.
경제개혁연대 관계자는 씨저널과 통화에서 “사외이사들은 지배주주나 기존 경영진들로부터 충분히 독립적이어야 한다”며 “감사위원 3%룰이 개정됐다고 하지만 사외이사들이 실질적 견제 역할을 하려면 이사회 구조 개선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구조적 제약조건을 떠나서도 모든 사외이사가 유상증자의 규모와 방식을 두고 한 명의 반대도 없이 찬성표를 던졌다는 점에서도 의문이 남는다.
이 때문에 이사회 구조뿐 아니라 구성원들의 독립성과 책임감도 부족했다는 지적도 자연스럽다. 회의에는 김동관 부회장과 손재일 대표, 안병철 전략실장(이사회 의장) 등 3명의 사내이사와 김현진, 전진구, 전휴재, 정도진씨 등 4명의 사외이사가 참여했다.
사외이사인 전휴재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평소 법적 투명성과 공정성을, 정도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기업 회계의 투명성을 강조해왔다.
양홍석 참여연대 변호사는 "사외이사 제도는 회사의 사회적 책임과 의사결정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도입됐다"며 "이사회 결정이 경영판단으로서 적절히 이루지는지 감사하는 역할도 한다"고 말했다.
이사회가 의사결정 과정과 당위성을 주주에게 설명하는 부분이 미흡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이사회는 최초 공시된 이사회 의사록에서 유상증자의 목적을 '글로벌 방산기업으로 도약을 위한 투자자금 조달'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한국거버넌스포럼은 논평에서 '굳이 현재 시점에서 대규모 주주가치 희석이 불 보듯 뻔한 유상증자를 하는가'과 '이번 유상증자가 과연 예측가능하고 공정한가'라고 의문을 던졌다.
증권업계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회사채가 AA-등급 수준으로 높아 발행에 유리하고 국책은행에 차입하는 것도 무리가 없다"며 "매년 2조 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낼 것으로 추정돼 잉여현금흐름도 여유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바라봤다.
시장에서도 갑론을박이 오갔다. 3월 21일 주가는 전일보다 13%(9만4천 원) 하락한 62만8천 원에 장을 마감했다.
당시 네이버 포털사이트 종목토론방의 익명 글쓴이는 게시글에서 "영업이익으로도 충분한 투자가 되는데 굳이 대규모 증자를 하는 이유는 자기 돈으로 사업확장을 하기 싫어서가 아닐까"라며 "공매도 타깃이 우려되는데 소액주주 피해는 나몰라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은 증권신고서 공시에서도 자금사용 목적과 유상증자의 당위성, 주주소통 절차 등에 대한 정보가 미흡했다며 정정신고를 요구했다. 그 뒤 이뤄진 정정 공시는 더욱 신중했어야 했지만 또 한 번의 정정 요구가 이어지기도 했다.
기업거버넌스포럼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일방적 유상증자 계획 발표와 정정, 관계사들과의 일련의 자본거래는 지배주주와 일반주주간 많은 이해상충을 야기했다"며 "그 과정에서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이사회는 독립성을 지키지 못했다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 한화그룹 계열사 이사회는 하나 같이 대표이사가 의장
한화그룹의 최근 주요 의사결정을 둘러싼 논란의 근원에는 여전히 독립성이 부족한 이사회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
한화그룹은 계열사 이사회 의장을 이사회에서 선임하도록 하고 있는데 상장 계열사 10곳 중 한화솔루션과 한화에어로스페이스를 제외한 8곳이 모두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겸직하고 있다.
한화는 김승모 대표가 이사회 의장을 겸직하다 올해 류두형 대표가 선임되면서 이사회 의장직도 함께 맡았다.
비상장사 한화에너지 역시 이재규 대표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데 상장을 추진 중인 만큼 지배구조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안병철 사내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지만, 손재일 대표이사와 함께 2인으로만 구성된 집행위원회를 따로 두고 주요 의사결정을 사실상 주도하고 있다.
한화생명을 제외한 주요 계열사들은 선임사외이사 제도도 도입하지 않았다.
삼일회계법인 거버넌스센터 보고서에 따르면 금융사는 투명성이 더욱 요구되는 만큼 사외이사를 이사회 의장으로 선임해 대표이사와 분리해야 하며,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사유를 공시하고 선임사외이사를 별도로 둬야 한다.
최근 삼성그룹과 SK그룹, LG그룹, HD현대그룹 등 주요 대기업들은 사회적 요구에 따라 자발적으로 사외이사 중심의 이사회 체제로 전환하고 있다.
삼성그룹은 상장 계열사 16곳 가운데 7곳에서 사외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고 2023년부터는 선임사외이사 제도도 도입했다.
SK그룹 역시 상장사 20곳 가운데 17곳이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했고, 15곳은 사외이사가 의장을 맡고 있다. 선임사외이사 제도도 두고 있다.
LG그룹은 LG전자·LG디스플레이 등 5개 주요 계열사에서 사외이사 중심 이사회 체제를 구축했고 HD현대그릅도 3개 상장 계열사에서 분리 또는 단계적 분리를 추진하고 있다.
경제개혁연대 관계자는 “미국에서는 사외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맡는 것이 이사회의 독립성과 경영진 견제 기능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적절하다는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며 “의장 겸직은 독립성 측면에서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또다른 다른 거버넌스 전문가는 “대표이사가 의장을 겸직하면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구조가 돼 이해상충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한화그룹의 경우 이사회 산하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 구성 역시 독립성 측면에서 개선의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한화시스템의 사추위에는 손재일 대표와 안병철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대표가 포함돼있다. 안 대표는 기타비상무이사 자격으로 한화시스템 이사회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ESG기준원은 사추위가 사외이사의 독립성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인 만큼 전원 사외이사로 구성하고 대표이사나 최대주주가 의결에 관여하지 않도록 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노종화 경제개혁연대 변호사는 “사추위는 경영진으로부터 독립적 인사를 추천하기 위해 설치된 기구지만 현재로선 취지가 유명무실하다”며 “대표이사나 계열사 대표가 사추위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것은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