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금융권의 유리천장은 여전히 공고하다.
금융회사 여성임원은 2017년 현재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정부와 금융회사들이 여성임원의 선임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 금융권 유리천장, 아직은 실금만 보이는 수준
22일 금융권에 따르면 주요한 국내 금융회사에서 CEO급 여성임원은 현재 이어룡 대신증권 회장과 김해경 KB신용정보 대표이사 부사장 내정자 정도에 그친다. 그런데 이 회장은 대신증권의 오너이기 때문에 바닥에서부터 올라갔다고 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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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경 KB신용정보 사장 내정자. |
시중·지방은행들 가운데 현재 부행장보급 이상 여성임원이 있는 곳은 KB국민은행(박정림 부행장), IBK기업은행(최현숙 부행장 내정자), 한국씨티은행(김정원·유명순 부행장), SC제일은행(박현주 부행장보), 부산은행(권미희 부행장보), 광주은행(정순자 부행장보) 등 6곳뿐이다.
씨티은행의 경우 김정원 부행장은 3월, 유명순 부행장은 5월에 임기가 끝나는데 연임 여부가 불투명해 여성임원의 수가 더욱 줄어들 수 있다.
은행권 관계자는 “권 전 행장이 2013년 말에 취임한 뒤 은행권의 여성임원 수가 점차 늘어났지만 지금은 2012년보다 적은 수준으로 돌아갔다”며 “부행장보급 이하 임원들 가운데에서도 여성이 적어 한동안 여성임원의 수가 늘어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증권·보험·카드 등 다른 금융업종은 여성임원의 비율이 은행보다 더 낮은 것으로 파악됐다.
자기자본 10위권 증권사를 놓고 보면 여성임원이 있는 곳은 미래에셋대우(18명), 삼성증권(2명), 대신증권(1명), 키움증권(1명), 메리츠종금증권(1명), 신한금융투자(1명) 등 6곳에 그친다. 미래에셋대우도 임원 수가 244명인데 여성임원의 비중이 7.4%에 불과하다.
상장 생명보험사의 경우 지난해 9월 기준으로 여성임원이 있는 곳은 삼성생명(3명), 동양생명(2명), 한화생명(1명)이고 미래에셋생명은 단 한명도 없다. 대형 손해보험사 4곳(삼성화재·현대해상·동부화재·KB손해보험)은 여성임원(사외이사 제외)이 전무했다.
상무보급 이상 여성임원이 있는 카드사는 현대카드(7명)와 삼성카드(2명) 등이다. 신한카드·하나카드·롯데카드 등 다른 주요한 카드사들은 여성임원이 한명도 없다.
여성임원인 손병옥 한국푸르덴셜생명 회장은 지난해 한 인터뷰에서 “유럽과 미국의 일류회사에는 여성 이사의 비율이 30~40% 수준인데 한국은 2.1%로 전 세계 최하위 수준”이라며 “경쟁력이 있는 한국여성들의 네트워킹을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다만 지점장이나 본부장 등 관리자급 직원들 가운데 여성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어 중장기적으로 여성임원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국민은행은 점포 수를 줄이면서 올해 지점장 자리가 줄었는데 여성 지점장의 수는 지난해보다 11명 늘어난 것으로 파악됐다. KEB하나은행도 신임 지점장 58명 가운데 9명(15%)를 여성으로 선임했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우리은행이 핵심 영업지역인 서울 강남에 여성 본부장 2명을 배치하는 등 여성임원이 늘어날 가능성은 이전보다 높아지고 있다”며 “비은행 금융회사의 경우 업력이 상대적으로 짧아 여성 관리자들이 비교적 덜 양성됐던 점도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 여성임원 들어야 여성직원에게 동기부여 가능
주요 시중은행 직원들 가운데 여성의 비중을 살펴보면 신한은행 44.5%, 국민은행 49%, 우리은행 50.8%, KEB하나은행 58.7% 등이다. 일반직원들의 경우 성비가 5대5 수준이다.
그러나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은행의 남성직원들은 평균 21년4개월을 근무하는 반면 여성직원들은 평균 10년만 일하고 있다.
은행들이 지난해와 올해 희망퇴직을 잇달아 실시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여성직원들이 퇴직을 신청하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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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병옥 한국푸르덴셜생명 회장. |
국민은행은 19일 희망퇴직자 2795명을 확정했는데 절반가량이 30~40대 여성인 것으로 알려졌다. 연차 10년 안팎의 대리·계장급 직원들이 주로 나가는 것이다.
증권사도 지난해 말 기준으로 일반직원 10명 가운데 4명이 여성이지만 상당수가 홍보·마케팅·경영관리 등 지원업무 쪽에 몰려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금융권 관계자는 “여성 직원들의 근속기간이 전반적으로 길어지고 있지만 관리자가 되기 전에 퇴직하는 사람도 여전히 많다”며 “일과 가정을 양립하는 부담이 크고 금융회사에서 직급이 위로 갈수록 남성 위주의 보수적인 분위기가 남아있는 것도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외국계 금융회사의 경우 여성직원을 위한 복지제도가 잘 마련됐고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에 여성임원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
한국푸르덴셜생명의 경우 여성인 손병옥 회장이 최고위임원을 맡고 있다. 한국씨티은행은 부행장급 이상 임원 16명 가운데 3명(18.75%)이 여성이며 SC제일은행도 본부장급 이상으로 따지면 국내은행들보다 여성의 비중이 월등히 많다.
금융회사에서 여성의 비중이 계속 커지고 있는 점을 감안해 여성임원을 늘려야 한다는 공감대는 확산되고 있다. 여성임원이 일반직원들의 롤모델과 멘토 역할을 하고 인적인 네트워크 구축을 주도하면서 조기 이탈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최현만 미래에셋대우 수석부회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를 늘려야 하고 여성인력이 점점 더 성과를 내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며 “여성임원을 늘리는 일이 전체 직원의 40%에 이르는 여성직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은행연합회가 내부에 여성위원회를 구성하고 여성금융인네트워크와 함께 멘토링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지원방안도 마련되고 있다.
하영구 은행연합회장은 지난해 말 여성금융인네트워크와 공동모임에서 “금융권 여성임원이 더 늘어나려면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일이 중요하다”며 “여성위원회라는 조직구성과 더불어 여성인력을 별도로 관리하는 리더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외국에서 주로 시행하고 있는 여성 관리자의 할당제를 국내 금융회사에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일각에서 나온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은 지난해 임금·단체협약 교섭의 안건 가운데 하나로 ‘관리자급 이상 여성할당제 30% 실시’를 제시했다.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당시 “금융권은 업무 강도가 굉장히 강하고 다른 직업군보다 유리천장이 훨씬 더 두껍다”며 “부서장급 이상의 고위직에서의 여성 비율이 동등한 권리보장에 필요한 임계비율인 30%는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즈니스포스트 이규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