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에서 고비였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이 결정적 역할을 한 배후에 삼성그룹 측의 '민원'을 받은 청와대의 영향력이 자리잡고 있다는 의혹이 확산되고 있다.
문형표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보건복지부 장관 재임 중이던 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삼성물산의 손을 들어주도록 국민연금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문 이사장은 이 의혹을 부인했으나 당시 국민연금 내부에서 벌어진 인사갈등과 후속인사 등을 다시 들여다 보면 석연치 않은 구석이 너무 많다.
◆ 문형표, 삼성물산 합병 찬성 국민연금에 압력행사했나
문 이사장은 17일 해명자료를 내고 보건복지부 장관 재임시절 국민연금 의결권행사 전문위원에게 전화를 걸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하라고 종용했다는 언론보도에 대해 통화를 한 적은 있으나 찬성하라고 한 적은 없다고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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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형표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
문 이사장은 "당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건에 대해 해당 부서로부터 현안 사항으로 보고 받았으며 전 직장 동료였던 의결권행사 전문위원에게 쟁점사안과 전문가로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에 대해 개인적으로 통화한 바는 있지만 찬성하라고 한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국민연금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의 한 위원이 당시 문형표 보건복지부 복지부으로부터 합병에 찬성해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고 한겨레가 17일 보도했다.
이 위원은 지인을 통해 ‘합병이 부결되면 삼성그룹의 승계가 암초에 부딪히고 우리 경제에 중요한 기업에 충격이 올 수 있다. 국가 경제 혼란이 올 수 있으니까 찬성하는 게 옳다’고 청와대의 뜻을 전달받았다고 증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윤소하 정의당 의원은 17일 이와 관련해 보도자료를 내고 지난해 7월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과정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정으로 국민연금에 최소 581억 원, 최대 1164억 원의 손해를 입히고 이건희 회장 일가에게 최소 3718억 원에서 최대 7445억 원의 이득을 준 과정의 진상이 공개됐다고 주장했다.
윤 의원은 "국민연금의 결정에는 최순실과 청와대 그리고 현재 국민연금의 수장인 문형표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7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독대를 하기 전에 청와대가 삼성그룹으로부터 받은 경영현안에는 합병과 관련해 국민연금의 찬성을 부탁하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를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 지난해 무슨 일이?
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전후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 인사파동 등 일련의 과정에 미심쩍은 대목이 적지 않다.
문 이사장은 메르스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 지난해 보건복지부 장관에서 경질됐으나 물러난 지 불과 4개월 만에 국민연금의 수장으로 복귀해 '보은인사'라는 말이 돌았다.
국민연금은 500조 원이 넘는 기금을 운용하는 곳이다. 자본시장의 큰손으로 기업들의 의사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문책성 경질을 당한 장관이 산하기관에 임명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국민연금 이사장 자리는 지난해 최광 전 이사장과 홍완선 전 기금운용본부장(CIO)이 갈등 끝에 결국 동반사퇴하면서 자리가 비었던 곳이다.
최 전 이사장은 임기를 7개월 여 남겨 놓은 시점에서 10월27일 돌연 자진사퇴를 발표하기 전날까지만 해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을 거듭 피력했다. 보건복지부의 해임압력이 거세자 결국 버티지 못하고 '백기투항'한 것이다.
◆ 최광과 홍완선 내분 원인 둘러싼 의문
당시 최광 이사장과 홍 기금운용본부장의 내분은 표면상 기금운용본부의 공사화를 둘러싼 이견에서 촉발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공사화를 반대했던 최 전 이사장이 찬성쪽에 선 홍 전 본부장의 임기만료를 앞두고 연임불가 결정을 내리면서 표면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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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 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왼쪽)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
그러나 최근 ‘최순실 게이트’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서 국민연금의 석연치 않은 의사결정이 다시 불거지면서 두 사람의 갈등배경에 정권의 압력이 있었던 것 아닌지 의문이 든다.
홍 전 본부장은 당시 삼성물산 주주총회를 앞두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만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국감에서도 논란이 됐다.
최 전 이사장은 합병에 반대했으나 홍 본부장은 합병에 찬성했고 주총을 앞두고 홍 본부장이 삼성 측과 만난 것이 드러나면서 더욱 갈등의 골은 깊어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 전 이사장은 지난해 10월 자진사퇴를 발표하기 전까지 여러차례 언론인터뷰에서 억울한 심정을 드러내며 복지부 혹은 정치권으로부터 압박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그는 당시 “어느 누군지는 모르지만 (연임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정해놓고 있었다”,“어떤 세력인지 모르지만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 전 이사장의 과거 인터뷰 내용을 추론해보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배경에 청와대의 압력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에서 최 전 이사장을 물러나도록 하고 ‘코드’에 맞는 문형표 전 장관을 다시 국민연금 수장으로 불러들인 셈이다.
최 전 이사장과 홍 전 본부장은 모두 정치적 배경이 든든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최 전 이사장은 현 정부 초대 비서실장인 허태열 전 실장과 부산고 동문이며 정·재계에 인맥이 넓은 미국 위스콘신대 출신이다. 김영삼 정부 말기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고 박근혜 대선 후보 캠프에 참여했다. 1985년부터 한국외국어대 경제학부 교수로 활동했다.
홍 전 본부장은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의 대구고 동기다. 하나대투증권 부사장, 하나은행 부행장으로 활동하다 2013년 11월 치열한 경쟁을 뚫고 2년 임기의 기금운용본부장에 임명됐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최 전 이사장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정에서 이견을 보이는 등 청와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결국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채 퇴임하도록 압박했다는 의혹이 나온다.[비즈니스포스트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