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죄에 이르기까지의 그 마음에 영향을 미쳤을 모든 요소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일은 비극의 반복을 줄이기 위한 시도로서의 이해다. < Unsplash > |
[비즈니스포스트] 불특정한 사람들에게 가해졌던 살인과 각종 살인예고들 그리고 한낮 산책로에서의 성폭행 및 살인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벌어진 비극에 우리 마음속에는 슬픔과 불안, 분노가 가득했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진 나머지, 신상공개 된 범인이 각각 어떤 사건의 가해자인지 연결시키는 게 때로 헷갈릴 정도였다. 그 중 두 가해자들은 이름까지 비슷해서 같은 사람인데 이름이 잘못 나온 건가 착각도 되었다.
사건 이후 생존했다가 결국 사망한 피해자에 대한 애도가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어느 새 사람들은 다른 새로운 뉴스에 눈을 돌리고 있다. 뜨거운 여름에 벌어진 믿기 어려운 사건들은 많은 일이 그렇듯 서서히 기억에서 멀어질 것이다.
‘마음’은 그 단어만으로도 괜히 따뜻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범죄자의 마음이라는 표현은 누군가에게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킬지 모르겠다. 사실 범죄자의 마음은 대표적인 타자화의 대상, 즉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인 것처럼 따로 떼어 여겨지는 대상이다.
우리는 흔히 이해할 수 없거나 이해하고 싶지 않거나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존재를 애초에 다른 개체로 분류하고자 한다. 나와 근본이 다르면 나는 그들에게 공감할 필요도 그들을 이해할 필요도 그리고 나에게도 혹시 그들과 유사한 속성이 자리 잡고 있을지를 염려할 필요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범죄자가 타자화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인간 아닌 이’로 여기는 방법이다. “사람이 아닌 짐승이다”, “사람이 아니라 악마다” 처럼,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짐승이나 악마, 괴물이 되는 순간 더 깊게 들여다볼 필요 없이 배척하기 쉬워진다.
두 번째는 ‘정신병자’로 여기는 방법이다. 우울증, 조현병, 히키코모리, 사이코패스 등은 범죄자와 관련한 보도에서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바람에 중립적인 용어의 위치를 넘어 불안과 낙인의 뉘앙스를 강하게 띤지 오래다. 이는 물론 정신질환을 가진 이들에 대한 타자화이기도 하다.
한편, 범죄자를 바라보는 또 다른 방식도 있다.
가해자가 얼마나 불우한 성장환경을 지녔고 얼마나 많은 학대를 받았으며 얼마나 외로웠는지에 주목하고, 가해자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우는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그렇게 가해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심지어 어떤 때는 피해자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평소 행실이 어땠는지, 밤에 혼자 밖을 돌아다녔는지를 따져가며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할 때도 있다.
이렇게 범죄자를 애초에 우리와 다른 존재로만 보려는 시도와, 반대로 마치 드라마 속 빌런을 대하듯 그럴 듯한 사연을 만들어주며 감싸려는 시도는 함께 이루어져 왔다. 예상 가능하듯, 이런 시도들은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는 일을 줄이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타자화는 유사한 범죄를 줄이기 위해 꼭 필요한 이해와 분석을 방해하고, 동정은 범죄를 무비판적으로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꾸준한 문제제기와 비판으로, 범죄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전과 달리 상당히 성숙해졌다. 예를 들어, 범죄를 무조건 정신질환과 연결시키면서 정신질환에 대한 배척을 함께 부추기는 시도는 점차 낡고 게으른 태도로 취급받고 있다.
또한 범죄자를 딱한 사연 아래 감싸려는 시도에 대한 반박으로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 라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가해자를 쉽게 용서하는 행위를 경계할 필요성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추세이다.
이러한 경향은 무척 다행스럽다. 다만 거기에 더해 가해자의 마음에 대한 타자화와 배척도 아닌 그렇다고 용서와 동정도 아닌, 이해와 분석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 역시 계속 늘어났으면 한다.
범죄자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건 무엇일까? 그들이 인간임을 인정하면서, 범죄에 이르게 된 그들의 생각과 감정, 가치관과 거기에 영향을 미친 모든 요인을 살펴보는 일이다.
그들이 처했던 부정적인 양육환경이나 학대 상황이 있다면, 그것으로 서둘러 정당화하지도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않는 관점에서 그런 환경을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만약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정신질환이 범죄에 기여하고 있다면, 치료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배경을 들여다보는 일을 의미한다.
범좌자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의 예를 들어보겠다. 2016년에 일어났던 ‘강남역 살인사건’의 범인은 조현병을 가진 자였다. 조현병의 특징 중 하나는 현실검증력(reality testing)이 저하되는 것이다. (현실검증력이란 현실과 현실이 아닌 것을 구별하는 능력을 말한다.)
예를 들어, 실제로는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데 “모두가 나를 알고 있고 나를 해치려고 사람들이 텔레파시를 주고받고 있다”라고 믿는 것이다. 이런 현실검증력의 저하는 매우 적은 확률이지만 타인을 공격하는 행위로 연결되기도 하며, 강남역 사건에서는 여성이 자신을 무시하고 견제한다는 믿음이 비극적인 결과로 연결되었다.
이때 그의 범죄를 단순히 오로지 병 때문이라고만 결론내리지 않고 그에게 왜 하필 그러한 믿음이 형성되고 범죄까지 이어졌는지, 그 믿음에 영향을 미친 개인적인 환경과 문화적인 맥락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이 바로 범죄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이다.
냉전 시대가 한창일 때는 자신이 KGB와 CIA의 감시를 받는다고 믿는 이들이 많았던 것처럼 조현병의 증상은 우리 각자가 가진 가치관만큼이나 성장 환경과 시대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조현병과 무관한 훨씬 더 많은 수에 범죄에 대해서도, 범죄에 이르기까지의 그 마음에 영향을 미쳤을 모든 요소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일은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범죄자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표현이 혹시 불편하다면 이해라는 행위에 포용이나 용서가 반드시 따라와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범죄자의 심리를 분석한다는 표현으로 수정하면 불편함이 좀 줄어들 수 있겠지만 결국은 비슷한 뜻이다.)
그러나 이해는 용서와는 완전히 별개의 행위이며, 말 그대로 그저 진실을 제대로 알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이해가 용서로 이어질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을 용서하게 될까 두려워 애초에 예외적인 존재로만 취급해버리기를 넘어서서 비극의 반복을 줄이기 위한 시도로서의 이해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반유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고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여성학협동과정 석사를 수료했다. 광화문에서 진료하면서, 개인이 스스로를 잘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친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책 '여자들을 위한 심리학', '언니의 상담실'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