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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국내 기업 CEO들이 속속 무대에 등장하고 있다. 사진은 왼쪽부터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스티브잡스 전 애플 CEO,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 |
한국의 최고경영자(CEO)들이 무대에 오르고 있다. 무대에서 고객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려고 한다.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이나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같은 스타 CEO들이 무대에 서는 모습은 이미 낯설지 않다.
그러나 최근 이해진 네이버 의장이나 김정주 NXC 회장처럼 은둔형 최고경영자로 손꼽히던 CEO들조차 무대에 나서고 있다.
무엇이 이들을 바꿔놓았을까?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014년 미국 대학 졸업식에 참석한 세계적 CEO들이 했던 명연설을 소개하는 기사를 지난 9일 내보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와 셰릴 샌드버그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COO), 수잔 워지스키 유튜브 최고경영자(CEO), 엘론 머스크 테슬라 모터스 CEO 등이 명연설가로 꼽혔다.
외국기업 CEO 가운데 명연설가로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은 단연 스티브 잡스 전 애플 CEO다. 잡스가 2005년 미국 스탠퍼드대학 졸업식에서 말한 ‘Stay hungry, stay foolish(항상 갈망하고 언제나 우직하라)’는 현대인들에게 ‘잠언’으로 자리잡았다.
CEO들이 인터뷰나 연설, 제품홍보를 위해 대중 앞에 서는 것은 외국에서 흔하다. 미국기업 CEO의 경우 업무시간의 절반 이상을 회사와 브랜드를 홍보하는 데 쓴다. 이들은 대중활동을 위해 전문가에게 스피치 연습을 받기도 한다.
반면 한국기업 CEO들은 그동안 무대에 서는 것을 주저해 왔다. 전문가들은 부와 재벌에 관대하지 못한 한국사회의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한다.
한국의 CEO들은 공개적으로 대중과 소통하기보다 ‘은둔의 경영자’로 남기를 원했다. 무대 뒤에 숨어 지시하고 명령하기를 더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한 때 은둔하는 것이 경영자의 ‘미덕’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했다. 무대에 서면 가볍다는 지적을 받았고, 경영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바뀌었다. 은둔형으로 꼽히는 CEO들조차 속속 무대에 등장하고 있다. 가장 큰 요인은 기업의 경영성과에서 CEO가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커졌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이제 CEO를 통해 기업을 바라보고 있다. CEO의 고객과 소통이 기업가치를 키우는 데 절대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인식의 변화는 CEO에게 회사 내부에 머무르지 말고 외부와 적극적으로 소통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최근 최고경영자들이 무대에 오르는 것은 이런 주문에 대한 답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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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브 잡스 |
◆ 기업가치 결정하는 ‘CEO 파워’
CEO는 기업가치를 좌우한다. 애플을 세계적 IT기업으로 성장시킨 잡스가 대표적 사례다. 애플이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연달아 히트시킬 수 있었던 것은 스티브 잡스라는 걸출한 CEO가 있었기 때문이다.
잡스는 신제품 공개행사를 직접 진행하며 제품의 가치 그 이상을 고객과 투자자들에게 보여 줬다. 잡스가 2001년 아이팟을 발표할 때 동영상은 유튜브 조회수 4백만 건을 넘겼다. 그가 보여준 프레젠테이션은 현재까지도 국내외 CEO들이 벤치마킹하고 있는 훌륭한 모범답안으로 남아있다.
잡스가 애플에 가져온 파급력은 매우 컸다. 잡스는 애플 제품의 충실한 고객인 이른바 ‘애플 팬보이(fanboy)’를 만들었다. ‘잡스의 유산’인 아이폰은 지난 3월 누적 판매량 5억 대를 돌파했다. 아이패드도 지난 4월 기준 1억9500만 대나 팔렸다.
1997년 경영에 복귀한 잡스는 매출 17억3천만 달러에 불과하던 애플을 14년 만인 2011년 매출 286억 달러의 회사로 키워냈다. 1997년 9월 5.5달러 수준이던 애플의 주가는 잡스가 애플 CEO에서 물러난 2011년 8월 376달러로 68배나 뛰었다.
잡스가 애플의 기업가치에 미친 영향력은 그가 없을 때 확인됐다. 2008년 그의 건강이상설이 터졌을 때 애플 주가는 12%나 떨어졌다. 잡스가 2011년 CEO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도 5%나 하락했다.
국내기업들도 CEO의 영향력을 차츰 인식하면서 CEO들을 고객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CEO를 통해 투자자와 고객에게 제품과 회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세계 스마트폰시장에서 애플과 맞서고 있는 삼성도 경영자들을 제품 설명회에 등장시키고 있다.
신종균 삼성전자 사장은 2010년 6월 출시된 ‘갤럭시S’부터 지난 2월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2014’에서 공개된 ‘갤럭시S5’에 이르기까지 모든 전략제품을 직접 발표해왔다.
신 사장은 2011년 ‘갤럭시S2’를 발표할 때 이른바 ‘된장 영어' 발음으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는 그러나 차를 탈 때마다 영어CD를 틀어놓고 연습하는 등 발음을 고쳐가며 발표회에 서고 있다.
삼성은 최고경영자들에게 잠재적 고객들과 직접 만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만들고 있다. 2011년 11월 시작돼 지난 해까지 전국 17개 도시에서 64회 열린 토크 콘서트 ‘열정락서’가 대표적 사례다.
삼성은 CEO들을 강연자로 내세워 이들의 인생경험을 전달하는 한편 삼성이 추구하는 가치를 간접 홍보한다.
그동안 윤부근 삼성전자 사장과 김창수 삼성생명 사장, 김봉영 삼성에버랜드 사장 등이 열정락서 무대에 섰다. 지난 6월 중국 베이징대에서 열린 열정락서에 장원기 중국삼성 사장이 강연자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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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원기 중국삼성 사장은 지난달 10일 중국 북경대 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삼성그룹 토크콘서트 '열정락서-OUTREACH'에서 강연했다. <사진=삼성그룹> |
◆ 정용진과 정태영, ‘스타 CEO’의 대표주자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재계 인사 가운데 언론이나 대중과 활발하게 소통하는 CEO다. 정 부회장은 잡스처럼 직접 무대에 서서 자신의 경영철학을 사람들과 공유한다. 이는 정 부회장이 백화점과 복합 쇼핑몰 등 고객과 대면이 잦은 사업을 주력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 부회장은 지난 4월18일 케이블 채널인 SBS CNBC가 주최한 ‘인문학 지식향연’ 방송에서 첫 번째 연사로 나섰다. 정 부회장은 이 자리에서 “신세계는 비슷비슷한 스펙만으로 인재를 뽑기보다 인문학적 소양과 통찰력, 건강한 주관을 가진 차별화된 인재를 선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같은 달 8일 연세대가 개최한 ‘지식향연-4월 서막’에도 참여했다. 그는 인문학을 강조하며 신세계의 인재선발 방식을 홍보했다.
정 부회장은 대중과 스킨십을 확대하는 한편 직원과 투자자들에게도 직접 사업비전을 밝혔다. 그는 지난 1월 ‘경영전략 워크숍’에 참석해 50분 동안 신세계그룹의 10년 장기 청사진을 발표했다. 그는 10년 동안 31조4천억 원을 투자해 17만 명을 새로 고용하겠다고 밝혔다.
현대카드와 현대캐피탈, 현대커머셜 대표이사를 맡고있는 정태영 사장은 주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기업을 알리고 신제품을 홍보한다.
정 사장은 SNS에 일상은 물론 현대카드의 새로운 상품광고나 이벤트들을 거의 매일 올리며 고객과 소통한다. 그는 지난 13일 페이스북에 현대캐피탈의 새로운 광고를 올리며 “금융광고는 보여줄 것도 없고 상품을 짧은 TV광고로 설명할 수 없다보니 에이전트들이 가장 애먹는 분야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기업문화나 경영방식에 대한 솔직한 생각도 드러낸다. 지난 3일 페이스북에 “본부별로 순차적으로 돌아가며 한 달 동안 파워포인트 절대 사용금지 기간을 설정했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정 사장은 “전화나 이메일로 간단히 알리면 될 일도 PPT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문화를 바로 잡겠다는 기업문화팀의 발표에 나도 대찬성했다”고 말했다.
정 사장이 이렇게 SNS를 통해 적극적 홍보활동에 나서는 데 대해 전문가들은 기업에 혁신적 이미지를 입히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장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정 사장은 SNS로 젊고 혁신적인 CEO라는 이미지를 입으려 한다”며 “이를 통해 정 사장이 운영하는 기업은 경쟁사와 다를 것이라는 이미지를 고객들에게 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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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진 네이버 의장이 지난달 25일 제주도 롯데호텔에서 열린 '중소기업 리더스포럼'에 참석해 중소기업 CEO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다. <뉴시스> |
◆ 양지로 나오는 은둔형 CEO 김정주와 이해진
그동안 ‘은둔의 경영자’라고 불리던 CEO들도 무대를 찾고 있다. 김정주 NXC 회장은 지난 해 7월 제주 넥슨 컴퓨터박물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15년 만에 공식석상에 얼굴을 비췄다. NXC는 국내 게임회사 넥슨의 지주회사다.
김 회장은 대표적 은둔 경영자다. 몇 년 전 서울 넥슨코리아 본사에 방문했을 때 신분확인이 안 된다는 이유로 경비원에게 쫓겨났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그는 최근 NXC가 출판사인 비룡사와 함께 출간한 동화 ‘열두 살 백용기의 게임회사 정복기’ 홍보영상에 출연했다. 김 회장은 영상에서 “예전에 영화나 TV가 오락거리였다면 지금은 게임이라는 장르가 가장 큰 흥미요소”라며 “어린이들이 게임과 게임회사에 대해 가질법한 궁금증을 스토리와 함께 책에 담았다”고 소개했다.
그는 지난 5월 ‘넥슨 개발자컨퍼런스(NDC)’에 참석해 직접 ‘게임회사 CEO의 역할’ 세션을 진행했다. 김 회장은 이날 박지원 넥슨코리아 대표에게 “넥슨은 지난 10년 동안 새로운 게임을 내놓지 못했다”며 “그동안 인수합병으로 시간을 보냈는데 앞으로도 계속 인수합병만 하고 개발은 안 할 것인가”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이해진 네이버 의장도 지난 해 11월 라인 글로벌 이용자 3억 명 돌파 기념식에 얼굴을 비추며 12년 동안의 은둔생활에서 벗어났다. 이 의장은 2001년 한게임(현 NHN엔터테인먼트) 유료화 발표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이후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기념식에서 “그동안 일본사업과 큰 규모의 전략을 세우느라 경영과 대외업무를 김상헌 네이버 사장에게 일임했던 것”이라며 “기업인으로서 의미있는 성과와 사례를 남기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의장은 지난 달 25일 제주도 롯데호텔에서 열린 ‘중소기업 리더스포럼’에 참석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모바일에서 강점을 보이는 페이스북과 구글의 국내 영향력은 두려울 정도”라며 “중국기업도 무섭게 성장하고 있어 앞으로 어떻게 싸워 이길지 고민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네이버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전방에서 일하는 동료들을 지원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업계는 구글과 텐센트, 알리바바 등 세계의 거대 IT 공룡들과 경쟁하게 되면서 은둔하던 김 회장과 이 의장이 전면에 나서게 됐다고 분석한다.
인터넷과 게임산업에 대한 정부 규제수위가 높아지는 것도 이들이 무대에 서게 된 원인이라는 해석도 제기된다. IT산업을 대표하는 기업 CEO들이 나서야 한다는 업계의 요구를 계속 거절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김정주 회장이나 이해진 의장이 무대에 나선 데 대한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그들이 성공한 CEO로서 업계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영감을 줄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이 무대로 나올수록 넥슨과 라인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더욱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