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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知社知] 프로이센 참모제도로 강국 프랑스 격퇴하다, 기업도 시스템이다

진국영 jineman@careercare.co.kr 2023-05-08 08: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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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知社知] 프로이센 참모제도로 강국 프랑스 격퇴하다, 기업도 시스템이다
▲ 개인은 협력하는 관계집단을 이길 수 없고 관계집단은 고도로 시스템화된 조직력을 이길 수 없다.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열린 프로이센 군사 개혁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프레드리히 빌헬름3세 국왕. <칼 뢰흘링>
[비즈니스포스트] 기업의 성공과 실패는 일상사다. 성공과 실패는 예상 범위 안에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뜬금없는 순간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원인 분석이 가능한 경우도 있지만 도무지 전후를 추정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성공과 실패가 그 뒤의 실패와 성공으로 모습을 바꾸는 경우도 흔하다.

성공과 실패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따라서 누구 말대로 어리석은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실패와 성공이 구조에서 기인된 것이라면 얘기가 좀 다르다. 구조는 상황을 재현한다. 구조적 실패와 성공은 반복적 실패와 성공을 낳는다. 

실패와 성공 자체보다 그 연원을 꼼꼼히 들여다 봐야 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경영자는 실패의 구조성을 제거하고, 우연적 성공을 구조적 성공으로 바꿔 내야 한다.

◆ 근거 없는 자신감, 치욕을 부르다

18세기 후반 유럽은 프랑스의 시대, 나폴레옹의 시대였다. 프랑스는 시민혁명으로 절대왕정을 무너뜨렸고, 퇴행에 맞서 혁명을 지키려는 전쟁으로 유럽을 뜨겁게 달궜다.

처음엔 중부 유럽 전통의 강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그 다음에는 영국이 나폴레옹의 황제 취임을 빌미로 나서 여러 차례 프랑스를 압박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제1차 대 프랑스 동맹군은 1792년 프랑스 발미에서 대패하고 1796년 오스트리아령 북이탈리아가 나폴레옹이 이끄는 이탈리아 방면군에 의해 점령되면서 무너져 나폴레옹이라는 스타만 만들어냈다. 

2차는 흐지부지 없어졌고 3차 동맹은 트라팔가 해전에서의 영국 해군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1805년 오스트리아 러시아 양국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연합군이 오스트리아 아우스터리츠에서 나폴레옹에게 참패함으로써 괴멸되었다. 나폴레옹의 나이 37세 때의 일이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당시 프러시아 왕이었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전선에서 스타로 떠오른 지 1년 후인 1797년 27세의 나이로 프로이센의 5대 군주에 올랐다. 큰할아버지가 흔히 프리드리히대왕으로 알려져 있는 프리드리히2세였다. 

프리드리히2세가 물려 준 프로이센은 중부유럽 베를린에서 동부유럽 발틱해 연안 쾨니히스베르크까지 이어지는 군사강국이었다. 다소 나이브했던 아버지 빌헬름2세의 10년 치세를 거치면서 조금 기반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군사력은 여전히 강력했다. 

병력 수는 프랑스보다 적었지만 혹독하기로 유명한 훈련을 거친 전투력은 가히 유럽 최강이었다. 장군들은 자부심이 강했다. 프리드리히대왕과 함께 전선을 누비며 군과 나라를 키워낸 청년장교들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노장군이 되었지만 자신감 하나만은 젊은 시절 그대로였다. 

1805년 프랑스가 프로이센을 위협했다. 아우스터리츠에서의 승리 후 프랑스는 라인강 동부 소공국을 통합하여 이른바 라인연맹을 결성하고 스스로 후견인을 자처하고 나섰다.

프로이센으로는 라인강을 경계로 형성돼 있던 서부전선이 라인강 동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묵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라인강 동쪽에 프랑스가 있다는 것은 평탄한 북유럽 평원을 타고 프랑스가 언제든 독일 땅으로 밀고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쟁으로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군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얘기만 들을 뿐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빌헬름3세 앞에 결국 사건이 터졌다. 

나폴레옹이 프러시아 회유책으로 넘겨줬던 옛 영국령 하노버 땅을 프랑스가 이번엔 화해표시로 영국에게 돌려주겠다고 한 것. 위협하는 적에 당장 달려들지 못해 으르렁거리던 군부는 조롱까지 당했다는 생각에 미치자 견디지 못했다. 프러시아 기병연대 대원들이 주 베를린 프랑스대사관으로 몰려가 대사관 계단에 칼을 갈며 도발했다. 

한 해 전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기억이 생생했던 1806년, 빌헬름3세는 결국 프랑스에 라인동맹 주둔군 철수를 요구했다. 사실상의 선전포고였다. 1년 전 왜 프랑스가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을 대상으로 대승을 거뒀는지 이유도 모른 채 내린 결단이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용감한 행동을 낳은 셈이었다.

왕년의 명장 브라운슈바이크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가 71세 몸으로 등판했다. 호전적인 루이제 왕비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프러시아군은 지리멸렬했다. 전선을 유지할지, 반격할지, 아니면 후퇴해 원군을 기다릴지 우왕좌왕했다. 

전세는 곧 기울었다. 10월10일 황태자 페르디난드대공이 프랑스 제10경기병대 부사관 쥔데와 칼싸움에서 전사했고 13일 예나에서는 프로이센군 후위가 격파 당했고으며 14일 아우어슈테트에서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본인까지 두 눈에 관통상을 입고 후송되었다가 결국 사망했다. 전쟁 발발 불과 5일 만이었다.

황태자와 총사령관까지 잃은 프로이센은 도망가는 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 25일 베를린이 함락되자 빌헬름3세는 쾨니히스베르크로 쫓겨갔고,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동부 국경으로 도망했다가 결국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러시아의 권유에 따라 나폴레옹 앞에 항복했다.

◆ 절치부심한 프로이센, 군 구조개편에 나서다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의 패배로 독일은 국토의 절반을 프랑스에 넘겨야 했고, 자랑스런 군에는 4만 명 이상을 넘지 못하도록 족쇄가 채워졌다. 

프랑스는 뺏은 독일 땅에 베스트발렌 왕국을 세웠고 베를린에는 프랑스 정보당국이 상주하며 프러시아의 행동을 감시했다. 브란덴부르크 개선문 위 승리의 여신 4두 마차상은 뜯겨 파리로 옮겨졌다. 독일은 사실상 프랑스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프로이센 장군들에게 나폴레옹은 애송이였다. 연전연승한다고 듣긴 했지만 그런 거라면 몇십 년 전에 이미 해 봐서 아는 것이었다. 승리 경력도 자신들은 40여 년이었지만 나폴레옹은 기껏 10여 년, 비교가 안됐다.

그러나 후대에 밝혀진 일이지만 나폴레옹의 승리는 어쩌다 마주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육군은 원래도 유럽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지만 혁명정부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또 달랐다. 무엇보다 프랑스군은 국가 총동원령에 응한 자원입대자로 이뤄진 군대였다.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의 가사에도 그 때의 상황이 남아 있지만 그들에게 전쟁이란 곧 혁명에 참여한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것이었다. 패배는 혁명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었고, 그것은 곧 죽음이었다.

굳이 등 뒤에서 장교가 권총 빼 들고 '후퇴는 곧 죽음'이라고 협박하지 않아도 이들은 도망치는 법이 없었다. 장교는 대포를 맡아 그런 사병들을 보호했다. 프랑스군 장교와 사병들의 역할은 프러시아와 달랐다.

장군을 돕는 '참모'들에게 역할을 부여하기 시작한 것도 프랑스였다. 포병 장교 출신의 나폴레옹과 참모장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무기가 대량으로 생산되고, 철도망을 타고 무기가 신속하게 전개되는 새로운 전장 양상을 잘 이해했다. 

두 사람에게 전쟁이란 가슴에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오면 말 타고 나서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었다. 대규모 자원이 투입되는 대형 이벤트로서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패착을 범하기 쉬운 소재였다. 전투를 직접 임하는 지휘관 노릇은 영 체질에 안 맞아 하던 베르티에 참모장과 그의 전쟁 준비는 나폴레옹 승리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빌헬름3세는 우유부단하고 군사적 재능은 더더욱 없었지만, 대신 결과에 승복하고 반성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근거 없는 결기를 강력하게 제지하지 않은 결과 나폴레옹의 속국이 되는 수모를 겪으며 정신을 차렸다. 군사전략가 게르하르트 샤른호르스트를 발탁해 군사재조직위원회를 맡겼다. 

샤른호르스트는 패전 책임을 물어 기존 장군의 70%를 해임하는 한편 승리를 보장할 새 판을 짰다.  그리고 개혁안을 제출하는 자리에서 빌헬름3세에게 "개혁안을 받아들인다면 참모총장의 직위를 달라"고 요구했다. 권한과 조직을 달라는 것이었다. 요구는 수용되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고 샤른호르스트가 만든 개혁안은 나폴레옹군이 제시한 국민병제, 참모제를 발전시킨 것이었다. 루소 계몽주의 영향을 받은 그는 프로이센군의 가장 큰 문제가 인재가 아닌 귀족이 지배하며, 합리적 명령이 아닌 비합리적 강압에 의한 작전 집행에 있다고 봤다. 

귀족이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구조에서 승패란 좋은 장군을 만날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인데, 신분에 의해 지휘자가 결정되고 거기다 폭력행사권까지 주어지는 구조에서 그런 행운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했다.

샤른호르스트는 프러시아가 보유한 가장 뛰어난 엘리트를 장군참모로 배치하고, 이들에게 실질적이고 강력한 작전 보좌권한을 부여하는 것을 방법으로 생각했다. 귀족이 아니더라도 장교가 될 수 있도록 했고 선발된 참모는 철저한 교육으로 핵심 인력화했다. 

합리적 엘리트가 힘을 발휘하도록 무조건적 상명하복 문화도 철폐했다. 목표만 주어주고 구체적 실행방법은 일선 지휘관에 맡기는 이른바 '임무중심형 체계'가 대안으로 제시됐다. 

인적개편을 뒷받침할 수 있는 조직도 만들었다. 참모들을 종합적으로 지휘하는 참모본부를 구성했으며, 전쟁을 종합적으로 준비하는 전쟁부도 창설했다.

전쟁부는 군 인력의 수급을 지휘하는 인사 및 교육훈련, 전시기획, 무기체계 담당, 예산과 보급 등의 부서로 구성됐으며, 참모본부는 전쟁부 예하로 들어갔다. 샤른호르스트의 생각은 현대 군사조직의 원형 그대로였다.

◆ 구조화된 성공을 만들어 내는 시스템의 힘 

샤른호르스트는 개혁에 진심이었다. 때에 따라 우유부단한 황제 빌헬름 3세까지 고려했다. 제도화로 개혁이 후진하는 것을 차단하려 했고, 자신의 부재시에도 개혁을 지속시킬 4명의 후계그룹-전쟁론의 저자 클라우제비츠가 이 중 한 명이다-까지 뽑아 만약 있을 수 있는 사태에 대비했다. 

염려대로 샤른호르스트는 개혁이 시작된 지 6년이 되던 1813년 러시아 전선에서 전사했다.

하지만 그의 계획안은 이후에도 흔들임없이 추진되었다. 임무 중심으로 움직이는 유연한 전투부대, 지휘관의 판단을 돕는 프러시아 최고 엘리트로 구성된 참모, 이 참모들을 분야별로 종합 관리해 최종 에너지를 만드는 참모조직이 군의 새로운 컬러가 됐다. 프러시아군은 귀족들이 사병들을 칼로 내몰아 승리를 만들어 내던 프리드리히대왕 시절 군대와 결별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처참한 실패를 가져다 주었지만, 견뎌낸 개혁의 고통은 곧 화려한 성과로 돌아왔다.

1813년 프로이센은 제6차 대 프랑스동맹 중 라이프치히 대회전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면서 10여 년간 이어진 나폴레옹과의 기나긴 싸움을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1814년 3월, 빌헬름3세는 러시아 알렉산드르1세와 함께 프랑스 파리를 승리자로 행진했다. 브란덴부르크의 4두 마차도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나폴레옹에 쫓겨 수도 베를린을 버리고 도망친 지 8년만의 일이었다. 

프러시아의 대 프랑스 승리 시리즈는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1871년 프로이센은 또 다른 나폴레옹, 나폴레옹3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을 황제 본인을 포로로 잡는 일방적 우위 끝에 승리하고 프랑스 절대왕정의 심장,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통일 독일제국을 선포했다. 1814년 드라마는 57년 만에 재연됐다. 

프랑스 입장에서 이런 드라마는 두 번이면 이미 충분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되진 않았다. 1940년 6월25일 프랑스는 파리에 들어선 독일군을 세 번째로 봐야 했다.

프랑스 혁명 후 나폴레옹의 연전연승은 군 조직 구성의 변화에 나폴레옹의 작전운용 능력, 참모 베르티에의 전략 등이 3각 구조로 어우러진 결과였다. 하지만 프랑스는 개인기에 의존하는 것보다는 공동작업이 중요하다는 화두를 던졌을 뿐, 나폴레옹과 베르티에의 능력을 재생산하는 구조까지 만들지는 못했다. 화두는 독일에서 꽃이 피었다.

프랑스가 프리드리히대왕식 프러시아를 지휘그룹의 공동 작업으로 넘어 섰다면, 프러시아는 지휘그룹의 능력에 의존하던 프랑스를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조직적 구조화로 넘어선 셈이었다. 샤른호르스트의 프러시아가 만들어낸 성공구조는 그렇게 1백 년 이상 유럽을 지배했다. 

개인은 협력하는 관계집단을 이길 수 없고 관계집단은 고도로 시스템화된 조직력을 이길 수 없다. 개인이 어쩌다 만들어낸 성공은 우연이지만, 관계집단은 이를 간헐적으로 반복시키며 조직은 성공을 체계적으로 재현한다. 역사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진국영 커리어케어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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