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교장은 18세기 초엽 효령대군의 11대손 이내번 선생이 처음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뒤로 후손들이 10대에 걸쳐 300년 동안 세거해온 고옥이다. <문화재청> |
[비즈니스포스트] 얼마 전 강릉에 큰 산불이 나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선교장에서 몇 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처음 화재가 발생하여 동해 바닷가까지 번져가 아름답던 소나무 숲과 많은 주택과 숙박시설들이 불탔습니다. 목숨을 잃은 분까지 계셨으니 참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선교장과 경포대를 비롯한 여러 문화재들은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옛날에는 경포호가 지금보다 훨씬 더 커서 선교장 앞도 호수였다고 합니다. 하여 배들을 연결해서 만든 다리를 통해 선교장을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선교'란 '배다리'란 뜻입니다.
선교장은 초창기부터 경포호에 서린 큰 물산의 기운을 받아 계속 번창했습니다. 소금을 생산하여 얻은 수익으로 많은 땅을 샀고, 또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토를 크게 늘렸습니다. 그리고 개량된 벼농사 경작법인 이앙법을 활용하여 생산량도 많아졌습니다.
재산이 계속 급속도로 불어나 3대 장주 이후 선생 대에 이르러서는 만석꾼이 되었습니다. 강릉으로 이사한 지 불과 2대 후에 영동 제일의 대부호가 되었으니 선교장터는 불같이 빠르게 발복하는 속발지지의 명당입니다.
선교장 사람들은 재산이 많아지는 만큼 어려운 이들에게 많은 덕을 베풀었습니다. 우선 소작인들한테 소작료를 적게 받았습니다. 소작료를 적게 내니 소작인 가족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넉넉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또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이들이 생기면 비축했던 곡식으로 구휼했습니다. 또 집을 개방하여 많은 나그네들에게 숙식을 제공해줬습니다.
선교장의 농지 경영 방식에는 아주 특별한 점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작지만 자신의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짓던 자작농 농민들이 빚에 몰려 어쩔 수 없이 땅을 팔고 소작농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소작농이 되면 소작할 땅이 있어야 그나마 근근이 살 수 있는데 지주 측에서 땅을 회수하여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면 살 길이 막연해졌습니다.
여러 고을에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들은 직접 관리하기가 어려워서 대부분 마름이라는 중간 관리자를 두어 경영했습니다. 소작인들이 계속 땅을 빌리려면 마름의 눈에 들어야 해서 마름들의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악덕 마름들은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땅을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어 소작인들의 피해와 고통이 막심했습니다.
선교장에선 소작인들의 피해를 막고 권익을 증진해 주고자 소작인 지주제라는 매우 독특한 경영 방식으로 농지를 관리했습니다. 우선 선교장에 땅을 판 농민들은 본인들이 원하면 계속 매도한 땅을 경작하도록 배려했습니다. 또 그 외 모든 소작인들에게도 본인이 바라면 계속 경작할 수 있게 보장해 주었습니다.
소작 여부를 소작인들이 주체적으로 결정했으니 소작인에게 지주의 권한을 위임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선교장의 소작 농민들은 소작 농지를 잃을까 전전긍긍하지 않고 안심하며 농사에 임했습니다. 그러니 자연 수확량도 많아지고 중간 관리자의 수탈도 없어서 생활 형편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석의 부를 이룬 3대 장주 이후 선생은 자손들에게 이런 가훈을 남겼습니다.
"사람이 재물을 흩어서 나눠주지 않으면, 반드시 하늘이 흩어버리신다. 하늘이 흩어버리실 땐 화를 입을 것이다."
선생은 이처럼 강력하게 경고하며 후손들에게 재물을 쌓아두지 말고 어려운 이들에게 아낌 없이 나눠주라 당부했습니다. 선생에겐 출사의 꿈도 있었습니다. 출사하여 백성들을 위해 경륜을 펼쳐보고자 과거에 여러 번 응시했습니다. 아쉽게도 소과에는 합격했으나 대과에는 낙방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출사의 꿈을 이루지 못했기에 선생은 오히려 사업에 더 전념할 수 있었고, 영동 제일의 대부호가 되었습니다. 가세가 크게 번창함에 따라 식솔과 손님들이 많아졌습니다. 기존의 건물들로는 그들을 모두 수용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에 선생은 새로 많은 건물을 지었습니다.
선생이 신축한 건물 중엔 손님 접대를 위한 사랑채들과 행랑채가 있습니다. 일가친척들을 위한 사랑채인 열화당과 외부 손님들을 위한 중사랑, 또 규모가 매우 큰 행랑채 등을 지었습니다. 행랑채는 길이가 60미터에 이를 만큼 매우 큰 건물입니다.
열화당이란 당호는 일가친척들이 모여 기쁨을 함께 나누며 화목하게 지내자는 뜻을 담아 지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과 상부상조하며, 또 서로 보살피고 사랑하며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선생의 귀한 마음이 잘 담긴 이름입니다. 미술 관련 서적을 많이 간행하는 열화당이란 출판사가 있는데 대표 되시는 분이 선생의 후손입니다.
옛날 양반 가옥의 행랑채에서는 집사와 노복들이 주로 거주했습니다. 그런데 선교장에는 집사와 노복들을 위한 건물이 따로 있었습니다. 거대한 행랑채는 외부 손님들의 거처였습니다. 그 만큼 신세를 지고자 선교장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영동지방에는 명승지가 참 많습니다. 수려한 산과 계곡, 바다와 호수 등 곳곳에 빼어난 경관의 명소가 산재해 있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영동의 명승지를 찾는 유람객들이 많았습니다. 또, 많은 유람객들이 선교장에 들렀고 선교장은 그들에게 편안한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했습니다.
선교장을 찾아오는 이들 중에는 문인 화가 서예가들도 많았습니다. 선교장엔 그들을 위한 건물도 두 채나 있습니다. 본채와 좀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자리한 홍예헌 1관과 2관이 문인 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조용한 곳에서 문학적 예술적 소양을 잘 발휘하도록 특별히 배려하여 세운 건물입니다.
선교장의 건물들은 거의 대부분 기와집인데 특이하게 초가집도 여러 채 있습니다. 집사와 노복들의 거처, 그리고 방앗간과 공작소가 초가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혹여 신분이 낮은 가솔들을 차별한 게 아닌가 생각할 것입니다. 필자가 보기엔 이 또한 그들을 위한 선의의 세심한 배려였다고 생각합니다.
선교장에는 또 하나의 매우 특별한 초가가 있습니다. 선교장에서 유일한 장주만이 머무는, 오직 장주를 위한 공간인 초정이 바로 초가입니다. 장주는 이 초정에서 휴식을 취하고 독서와 사색을 하며 심신 수양을 했습니다.
초정은 장주만을 위한 건물이었기에 외부의 손님들은 드나들 수 없었습니다. 손님들을 접견하는 곳은 사랑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을 드나드는 외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선교장의 소작인들이었습니다. 장주는 초정에서 소작인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애환을 함께 나누며 상생의 길을 다졌습니다.
장주의 거소를 드나들었던 소작인들이야말로 선교장 최고의 귀빈들이었습니다. 소작인들이 땀 흘려 거둔 수확으로 선교장을 유지할 수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입었으니 장주들 또한 그들의 공을 귀하게 여겨 그들을 특별하게 접대했던 것입니다.
선교장의 집사와 노복들 또한 온갖 궂은일을 감당하는 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신분에 어울리는 독립된 초가 별채에 살면서 자신들의 집에 산다는 자긍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장주만을 위한 장주의 특별한 거소도 자기네 거처와 같은 초가이니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또, 장주를 만나러 오는 소작인들은 고대광실 웅장한 저택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입구 쪽 노복들의 초가집 앞으로 들어와서 창고와 안쪽 노복들의 초가를 지나 장주의 초정으로 갔습니다. 이런 행로 또한 소작인 방문객들의 심경을 참 편안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사람을 존중하며 상생과 공존의 정신을 지녔기에 이처럼 지혜로운 배려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또, 그 덕에 선교장 사람들이 오랜 동안 큰 복을 누릴 수 있었다고 봅니다. 류인학/자유기고가, '문화일보'에 한국의 명산을 답사하며 쓴 글 ‘배달의 산하’, 구도소설 ‘자하도를 찾아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