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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LG 구자경 "오직 비전, 비전은 나의 신앙이다"

이재우 sinemakid222@gmail.com 2023-04-21 08:4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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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LG 구자경 "오직 비전, 비전은 나의 신앙이다"
▲ 고 상남(上南) 구자경 명예회장(사진)은 아버지(연암 구인회)와 함께 LG를 경영한 1.5세대 경영자에 속한다. 아버지의 후계자인 동시에 새로운 창업주였던 셈이다. 그는 ‘자율경영’과 ‘고객을 위한 가치 창조’라는 경영이념으로 LG를 초일류기업에 올려 놓았다.  
[비즈니스포스트] ‘험프티 덤프티(Humpty Dumpty)’라는 경제 용어가 있다. 원래는 영국 전래 동요에 나오는 등장인물로 담벼락에 아슬아슬하게 올라앉아 있는 계란을 의인화한 캐릭터다.

이런 험프티 덤프티는 경제 용어로 전환돼 위기 상황에 놓인 대상을 빗대어 말할 때 사용된다. 

해외 언론을 검색하면 Humpty Dumpty Economy(험프티 덤프티 경제, 포브스), How to stop our economies falling like Humpty Dumpty(어떻게 하면 험프티 덤프티처럼 경제가 추락하는 걸 멈출 수 있을까,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같은 문장이 나온다.

필자가 불쑥 험프티 덤프티 얘기를 꺼낸 건 반도체 리딩기업 삼성전자의 부진이 예사롭지 않아서다. 삼성전자의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은 14년 만에 1조 원 이하(6600억원)로 떨어졌다. 

게다가 25년 만에 처음으로 반도체 감산까지 발표했다. 험프티 덤프티까지는 아니겠지만 그에 준하는 위기라고 우려할 만하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삼성은 인텔처럼 안일함에 빠지는 걸 경계해야 한다”(Samsung should be wary of Intel-like complacency)는 제목의 기사를 실어 1등 기업의 현실을 꼬집었다.

여기에 하버드비즈니스스쿨 명예교수이자 변화관리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존 코터(John Kotter) 교수가 익히 했던 말도 새겨 볼 일이다. 코터 교수는 “현상 유지는 재난(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status quo can create disaster)고 지적했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코터 교수는 “현상 유지에 대한 애착은 조용하지만 치명적인 살인자”(attachment to the status quo is a silent but deadly killer)라고 믿는 사람 중 하나다. 

필자는 삼성이 1등이라는 현상 유지(status quo)에 안주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외국 언론의 눈에 그렇게 비칠 뿐이다. 

삼성전자와 달리 LG전자는 선방했다. 1분기 영업이익 1조4974억 원의 잠정 실적(전년 동기보다 22.9% 감소)을 기록하며 14년 만에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을 뛰어넘었다. 삼성으로선 충격이고 LG로선 회심의 역전인 셈이다. 

삼성과 LG의 희비가 크게 엇갈리는 상황에서 필자는 한국의 전자산업 판도에 일대 격변이 일었던 ‘1969년’을 되돌아 보았다. 이번 칼럼의 주인공인 상남(上南) 구자경 명예회장(1925~2019)의 등판 시기이기도 하다. 

1969년. 그해는 삼성과 LG 기업사에서 분수령과도 같은 해다. 삼성 창업회장 호암 이병철(1910~1987)은 1월13일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전자산업 진출을 전격 선언했다. 

금성사를 앞세워 전자산업을 선도하고 있던 LG에 대한 도발이었으며 사돈이자 사업 동지였던 LG 창업회장 연암 구인회(1907~1969)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었다. 

호암에게 전자산업을 권한 건 친분이 있던 일본 산요전기의 이우에 토시오(井植歳男: 1902~1969) 회장이었다. 이우에 회장은 마쓰시타전기(지금의 파나소닉)를 설립한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1894~1989)의 처남이자 공동창업자로 훗날 독립해 산요전기를 세운 인물이다.  

호암은 그런 이우에 회장의 조언을 받아들여 전자산업의 걸음마를 떼고 연수생들을 산요전기에 파견해 라디오, TV 등 기술을 배워오게 했다. 그렇게 삼성에게 1969년은 새로운 도전의 해였다. 
 
[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LG 구자경 "오직 비전, 비전은 나의 신앙이다"
▲ 경남 의령과 함안을 가로지르는 남강에 우뚝 솟은 솥바위. 한자로는 정암(鼎巖)이라고 한다. 한 도사가 솥바위 주변 20리(약 8㎞)에 큰 부자 셋이 나온다고 예언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실제로 의령에선 삼성 창업주 호암(湖巖) 이병철이, 남쪽 진주에선 LG 창업주 연암(蓮庵) 구인회가, 그리고 동남쪽 함안에선 효성 창업주 만우(晩愚) 조홍제가 태어났다. <이재우>
반면 LG엔 시련이 몰아닥치고 있었다. 그해가 저물어가던 12월31일 연암이 뇌종양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63세, 이른 별세였다. 삼성이 전자산업으로 파이를 키워 가는 가운데 LG는 창업주마저 세상을 떠나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경영 수장 교체라는 큰 숙제를 앞에 둔 시점. 자칫하면 경영권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는 위기 국면이었다. 하지만 LG가(家) 사람들은 잡음 하나 없이 창업이념의 핵심인 ‘인화’로 똘똘 뭉쳤다. 

당시 후계자 선정의 키(key)는 연암의 첫째 동생 구철회 락희화학 사장이 쥐고 있었다. 창업에 기여한 공로로 보자면 자신이 그룹 회장을 맡는다고 해도 말릴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경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하면서 형님의 큰아들인 당시 금성사 부사장 구자경을 차기 회장으로 내세웠다. LG의 장자 승계 원칙이 자리잡는 순간이었다.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 연구에 크게 공헌한 이즈리얼 커즈너(Israel M. Kirzner) 미국 뉴욕대 명예교수가 강조했듯 새 사령탑 상남 구자경에게 필요한 건 ‘기민함(alertness)’이었을 것이다. (커즈너는 기업가가 갖추어야 할 핵심 덕목으로 ‘기민함’을 꼽았다) 

60세의 노련한 호암 vs 45세의 짱짱한 상남. 상남은 취임 첫해부터 ‘기민하게’ 일본 기업들과 합작사를 설립하면서 대대적인 방어선 구축에 나섰다. 당시 합작 상황은 이랬다. 

△70년 일본 알프스전자와 합작해 금성알프스전자 설립 △71년 일본 포스타전기와 함께 금성포스타 설립 △이어 일본 후지전기와 손잡고 금성통신(독일 지맨스와 3사 합작) 설립 △74년 NEC(일본전기)와 합작해 금성전기 설립 등이다. 

필자가 굳이 일본 합작사를 열거한 이유는 따로 있다. NEC(일본전기)라는 기업 때문이다. ‘일본의 IBM’으로 불리는 NEC는 합작을 넘어 상남에게 큰 공감을 준 회사였다. 상남은 NEC의 고바야시 코지(小林宏治:1907~1996) 회장을 거울로 삼아 ‘비전 전도사’로 거듭났다. 

“정말 그분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다. 그러나 앞으로 어떤 난관에 부딪치더라도 누구보다도 솔선수범하여 일관성 있게 비전을 실현시켜 나갈 것이다.”

이젠 희귀본이 된 상남의 경영 에세이 ‘오직 이 길 밖에 없다’(행림출판, 1992년)에 나오는 대목이다. 상남이 스스로 겸손해 하며 언급한 그분은 고바야시 회장이다. 두 사람 얘기는 한 템포 쉬고 가자.

우리는 비전이라는 단어를 밥 먹듯 다반사로 쓰고 있다. 그렇다면 경영학자들이 말하는 비전의 정의는 뭘까? 위에서 등장한 존 코터 교수가 하버드비즈니스리뷰(What Leaders Really Do, 2001년 12월)에 기고한 내용을 보면 이렇다.  

코터 교수는 “비전이란 기업이 장기적 측면에서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what it should become)를 보여주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실행 가능한 경로(a feasible way)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코터 교수는 더 나아가 비전의 생명은 ‘구체화’에 있다고 했다. ‘실질적인 경쟁전략으로 쉽게 구체화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how easily it can be translated into a realistic competitive strategy)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실현되지 못하는(또는 구체화 되지 못하는) 비전은 그리다 만 그림에 불과할 뿐이다. 

그럼 상남 구자경이 크게 공감한 고바야시 회장의 비전이란 도대체 뭘까? LG경영연구원에서 나온 전략 분석 보고서(2002년) 하나를 소개한다. 

“기업의 전략 방향 구축 활동은 세계 전자정보통신 업계에서 잘 알려져 있는 NEC의 C&C 전략을 통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NEC는 이미 70년대 후반에 자사의 사업 비전을 C&C 즉 컴퓨터와 통신임을 정립하고 이에 적합한 기술전개 방법을 구체화한 바 있다.”

이 보고서에 언급된 C&C(Computers and Communications)가 바로 고바야시 회장이 제창한 비전이다. 그는 1977년 10월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종합통신전시회에서 “21세기 초반은 언제 어디서든, 누구와도,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LG 구자경 "오직 비전, 비전은 나의 신앙이다"
▲ 상남은 기업을 경영하면서 유독 비전을 강조했다. 그는 “흔히들 날 눌변이라고 말하지만 비전을 이야기 할 때면 나도 모르게 말에 힘이 들어가고 신바람이 났다”(경영 에세이 ‘오직 이 길 밖에 없다’)고 했다.
1970년대 당시 컴퓨터와 통신은 다른 업종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고바야시 회장이 컴퓨터로 대변되는 전자정보와 통신을 융합한 개념을 선보인 것이다. 오늘날의 전자정보통신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고바야시 회장은  C&C 비전을 통해 NEC의 제 2창업을 주도했다. 이를 계기로 NEC는 단순한 통신기기와 컴퓨터를 만드는 기업에서 일본의 정보통신산업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상남은 고바야시 회장의 그런 비전과 NEC 사원들의 꿈이 부러웠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1991년 4월 NEC를 방문하기도 했다. 상남의 말을 들어본다. 

“처음에는 C&C 비전이 전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여겼던 사원들도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목표에 가까워지는 것을 확인했고 실제로 세계적인 기업인 AT&T를 능가하는 부분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한결같이 꿈을 갖게 되었다. 그 꿈이 오늘날의 NEC를 있게 한 원동력이다.” (‘오직 이 길 밖에 없다’ 인용)

고바야시 회장의 비전이 C&C였다면 상남의 비전은 자율경영에 있었다. 상남 역시 일찌감치 자신의 비전을 구체화한 바 있다. 1988년 11월22일의 일이다. 고객을 위한 가치 창조와 자율경영을 핵심으로 하는 ‘21세기를 향한 경영구상’이었다. 

상남은 이 구상을 발표한 그날을 “최고경영자 생활을 통틀어 가장 뜻깊은, 잊을 수 없는 날”이라고 회고했다. 돌이켜보자면 상남은 큰 아름드리 나무 같은 위대한 기업인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입을 모았고 지금도 그렇게 평가받고 있다. 

필자는 희망한다. ‘비전가’였던 상남의 목소리가 세렌디피티(serendipity: 뜻밖에 얻은 좋은 경험이나 성과)로 다가가길 말이다. LG에게도, 삼성에게도,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도.

“나는 비전에 심취해 있다. 비전이 나의 신앙이 된 것이다. 이제 나는 이 비전을 성공시키는 일에 내 인생을 걸었다”(같은 책 인용). 재팬올 발행인 이재우
 
이재우 발행인(일본 경제전문 미디어 재팬올)은 일본 경제와 기업인들 스토리를 오랫동안 탐구해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열성팬으로 '원령공주의 섬' 야쿠시마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부캐로 산과 역사에 대한 글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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