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이 사실상 이재용체제로 전환됐다. 이재용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삼성의 얼굴’을 넘어 삼성그룹 경영을 총괄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얼마 전 영업이익 7조 원대의 2분기 잠정실적을 내놓았다. 위기라는 진단이 나왔고 이재용체제의 미래를 놓고 시선이 집중됐다.
이재용체제, 삼성은 어디로 갈까?
몇 차례에 나눠 이재용체제를 긴급히 진단해 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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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과 최지성 삼성 미래전략실장(오른쪽)이 2011년 열린 CES 현장에서 기자들과 만나고 있다. |
삼성에게 이재용체제는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쓰러지면서 이재용체체가 가동돼야 했다.
이재용체제를 바라보는 국내외 시선이 불안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을 물려받을 때 공식 후계자로 결정된 후 7년 동안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이재용 부회장은 그렇지 못했다. 삼성의 ‘얼굴’로 활동했지만 공식적으로 후계자로 지명받지 못했다. 삼성그룹은 이재용체제를 조금씩 준비하고 있었지만 청사진을 완전히 마련해 놓지는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그룹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권력의 속성은 죽을 때까지 권력을 놓지 않는 것”이라며 “삼성그룹도 오래 전부터 이재용체제를 준비했지만 실무라인에서 조금씩 준비했을 뿐이어서 준비를 완료하기 까지 앞으로 최소한 1~2년이 더 필요했다”고 말했다.
이재용체제의 삼성그룹은 이 회장처럼 강력한 카리스마에 의해 경영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삼성그룹은 벌써부터 이재용 부회장의 리더십을 놓고 ‘스마트 리더십’이라고 말한다. 소통에 기반한 리더십이라는 얘기다. 이는 이 부회장의 리더십에 대한 우려를 씻기 위한 노력의 측면도 있어 보인다.
삼성그룹 안팎에서 이 부회장이 삼성에서 단 한 번도 책임을 지는 자리에서 일해 본 적이 없다는 점을 들어 여전히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 최지성이 주목받는 이유
이런 상황은 삼성그룹의 2인자를 더욱 주목하게 만든다. 바로 최지성 미래전략실 부회장이다. 이재용 체제가 완벽히 준비되지 않은 채 시작됐고 이 부회장의 리더십 우려까지 겹쳐지면서 최 부회장의 역할은 그동안 삼성그룹 2인자 역할보다 더욱 두드러진다.
이건희 회장은 2인자를 통해 삼성그룹을 지배해 왔다. 그러나 삼성의 2인자는 항상 이 회장의 강력한 카리스마 밑에서 존재했다.
그런데 최지성 부회장은 다르다. 이 회장이 쓰러진 뒤 최 부회장의 영역은 넓어지고 그 힘은 커지고 있다. 삼성의 카리스마가 최 부회장으로 옮겨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러다 보니 이재용체제에서 이 부회장과 최 부회장의 관계는 주군과 가신같은 수직적 관계라기보다 수평적 관계에 가까워 보인다. 이재용체제는 오너 일가인 이 부회장과 전문경영인인 최 부회장의 투톱체제나 마찬가지다.
아직까지 이 동거가 순항중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두 사람의 관계도 좋다는 관측이 주류를 이룬다.
문제는 이 체제가 앞으로도 계속 순항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삼성그룹 안팎에서 이 체제가 시너지를 내 삼성그룹이 직면한 여러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최 부회장이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이재용체제의 등장이라는 과제를 부여받은 데다 삼성 오너일가에 대한 최 부회장의 마음이 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체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지뢰밭은 너무나 많다. 삼성그룹의 미래전략과 인사 등을 놓고 언제든지 파열음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재용체제에서 두 사람의 ‘2인3각’ 구조에 틈이 나타날 경우 삼성그룹은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 이재용체제를 염려하는 시선에 이런 불안이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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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지성, 권오현, 이재용(왼쪽부터)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4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세월호 사고 희생자 정부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뉴시스> |
◆ 최지성의 삼성
최지성 부회장은 이 회장이 병원에 입원한 뒤 매일 병실에 들러 이 회장의 병세를 확인하고 업무를 보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는 “최 부회장이 매일 아침과 저녁 두 차례 이 회장의 병실을 찾아 문안인사를 드린다”며 “그날 주요업무를 설명하면 이 회장이 눈을 맞추는 등 반응을 보인다”고 말했다.
최 부회장은 지난 1일 열린 미래전략실 조회에서 “삼성전자의 실적이 예상보다 저조하다”며 “더 열심히 뛰어달라”고 당부했다. 최 부회장은 이 자리에서 “미래전략실은 그룹의 컨트롤타워”라며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부회장의 발언을 그가 미래전략실장이 될 때 했던 말과 비교하면 삼성그룹에서 미래전략실의 위상을 강조하는 쪽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했음을 알게 된다. 최 부회장은 2012년 미래전략실장이 된 뒤 “미래전략실은 이건희 회장의 그림자”라며 “군림하는 곳이 아니라 지원하는 곳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계는 이 회장이 쓰러진 뒤 미래전략실의 위상이 더욱 높아질 것으로 바라봤다. 조직 전체에 긴장을 불어넣고 외부환경의 변화에 재빠르게 대응하는 의사결정을 하는 데 미래전략실이 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 조건 때문이다. 최 부회장이 “미래전략실은 컨트롤타워”라고 말한 것도 미래전략실에 부여된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래전략실은 지난 4월 말 갑작스런 인사를 했다. 기존 미래전략실 멤버들을 대거 삼성전자로 보내고 젊은피를 수혈했다. 이 인사에 대해 이재용체제 구축을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삼성전자에 경험 많은 베테랑들을 보내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이재용체제를 강화하는 것이라는 관측이 주류를 이뤘다. 삼성도 삼성전자를 강화하기 위한 인사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삼성그룹에 정통한 인사들은 이재용체제를 세우기 위한 인사이지만 최지성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인사이기도 했다고 평가한다.
삼성그룹의 한 인사는 “미래전략실은 권력의 핵심이어서 이곳에서 떠난 사람들은 힘이 빠지고 만다”라며 “이번 인사를 통해 최지성 부회장이 뽑아 키운 인물로 미래전략실을 채워 최 부회장이 명실상부하게 미래전략실을 장악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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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오른쪽)이 지난 해 일본에서 삼성그룹 전용기편으로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며 최지성 삼성전자 부회장(왼쪽)의 안내를 받고 있다.<뉴시스> |
◆ 이재용의 삼성을 위한 미래전략실의 움직임
최근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그룹의 얼굴 역할을 하면서 보폭을 넓히고 있다.
이 부회장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방한했을 때 삼성그룹을 대표해 활동했다. 최근 미국에서 열린 ‘선밸리 미디어 컨퍼런스’에도 참석했다. 이 행사는 이 부회장이 2002년부터 매년 참석했다.
삼성그룹이 이재용체제로 가동되고 있지만 이 부회장은 아직까지 여러 부회장 가운데 한 명일 뿐이다. 삼성전자 등기이사도 아닌 데다 삼성전자 지분도 0.57%만 보유하고 있는 7번째 대주주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 부회장이 이건희 회장처럼 전면적으로 의사결정하는 것은 이 부회장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특히 삼성전자의 2분기 잠정실적이 발표된 뒤 미래전략실은 바빠졌다. 외신들은 “삼성전자가 저성장기조에 들어갔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의 수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미래전략실은 삼성전자를 비롯해 그룹의 성과를 만들어 내야 한다. 이는 삼성그룹 안팎에서 제기되는 “왜 이재용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삼성전자의 경영실적은 이재용체제의 안착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다른 한편으로 미래전략실은 이재용체제를 공식적으로 출범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미래전략실은 현재 삼성엔지니어링, 삼성중공업, 삼성전기 등에 대한 경영진단을 벌이고 있다. 또 최근까지 전자부문을 비롯해 금융부문 등에 대한 사업구조와 지배구조 개편을 숨가쁘게 진행하고 있다. 앞으로 건설부문에 대한 재편도 들어가야 한다.
삼성그룹의 한 관계자는 “미래전략실을 중심으로 1~2년 내로 계열사 순환출자를 해소하고 계열사 전체를 재편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추진하고 있다”며 “이건희 회장 건강문제로 이 작업은 더욱 속도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과거 이병철 회장에서 이건희 회장으로 넘어갈 때도 그랬듯이 삼성그룹의 경우 경영권 승계를 도울 2인자가 항상 필요했다”며 “최지성 부회장은 그 역할을 맡았고 미래전략실을 통해 그 일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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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과 최지성 미래전략실 실장(오른쪽) |
◆ 투톱 체제의 첫 시험대, 12월 정기인사
최지성 부회장은 이재용 부회장의 ‘가정교사’라 불린다. 최 부회장은 입사초기 삼성 비서실 기획팀 과장으로 일하면서 이 부회장과 인연을 맺었다.
이건희 회장이 경영권 승계시기에 최지성 부회장을 미래전략실장에 발탁한 것은 최 부회장이 그동안 보여준 오너에 대한 충성심과 삼성전자의 성공에서 드러난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능력에 대한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최적의 인물로 최 부회장을 봤다.
이재용 부회장도 그런 최 부회장에 대한 강한 신뢰를 보내고 있다. 이 부회장은 “최 부회장님 말이라면 언제나 믿는다”고 말할 정도다.
삼성의 투탑체제는 머지 않아 첫 시험대에 오른다.
삼성그룹은 하반기에 내년 전략을 짜야 하고 정기인사를 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은 미래전략실의 몫이다.
삼성그룹은 경영전략을 짤 때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올라온 연구분석자료를 바탕으로 미래전략실에서 공론화를 거친다. 그 뒤 미래전략실장이 최종안을 만들어 오너의 승인을 받는다.
인사안도 마찬가지다. 미래전략실은 경영실적을 비롯해 시시콜콜한 개인정보까지 감안해 만든 인사안을 오너에게 보고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사안과 전략안을 놓고 이재용 부회장과 최지성 부회장이 어떤 결정을 만들어낼지가 투톱체제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으로 보인다.
이 결정은 이재용 부회장에게 양날의 칼이다. 최지성 부회장이 올린 안을 이 부회장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삼성그룹의 힘이 최지성 부회장에게 급속히 쏠리는 것을 묵인하게 된다. 기업 구성원들은 힘이 누구에게 있는지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렇다고 이재용 부회장이 이건희 회장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할 경우 그런 판단에 걸맞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조직 전반에 대한 장악력과 사업에 대한 식견이 필요한 일이다. 자칫 이 부회장의 판단이 삼성그룹의 중지에 벗어날 경우 이 부회장은 리더십에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거대조직 삼성을 끌어가기 힘들어진다.
물론 삼성그룹 안팎에서 이 부회장과 최 부회장이 적절한 수준에서 타협하면서 삼성그룹을 끌고 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새 체제를 완전히 구축하기 전까지 최 부회장의 힘과 능력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의 핵심 관계자는 “만에 하나라도 연말인사와 내년 경영전략을 놓고 이 부회장과 최 부회장이 갈등을 빚을 경우 삼성그룹은 위기를 맞게 된다”며 “이 부회장이 최 부회장을 의심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인자가 2인자에 대해 의심을 품는 순간 경계심이 생겨나고 견제가 시작된다. 삼성의 역사도 이를 말해준다.
이건희 회장은 이병철 회장의 삼년상이 끝날 즈음 그룹의 컨트롤타워였던 소병해 비서실장을 삼성생명 부회장으로 내쳤다. 소병해 비서실장은 이병철 명예회장의 분신이라고 불릴 만큼 이병철 명예회장의 최측근으로 꼽혔고 이건희 회장의 경영승계를 돕기도 했다.
이건희 회장이 소 실장을 내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계열사 사장들이 소 실장의 눈치를 먼저 살핀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