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구현모 KT 대표이사 사장이 연임 도전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게 되며 수고와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 대가로 명분을 쌓으며 우호 여론을 늘려가고 있다.
외부 압력이 더해질 때마다 양보하는 모습으로 명분을 축적한 데다 실적으로 경영 능력도 입증했다는 자신감이 승부수를 던진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 구현모 KT 대표이사 사장(사진)이 연임 도전을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며 수고와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 대가로 명분을 쌓으며 우호 여론을 늘려가고 있다.
13일 정치권에 따르면 야당을 중심으로 정부·여당이 KT를 비롯해 이른바 ‘소유분산 기업’의 지배구조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관치’로 규정하고 이를 쟁점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정부·여당이 ‘소유분산 기업’이라 지칭하는 곳은 KT처럼 과거 공기업이었다가 민영화된 곳들과 금융지주회사처럼 지배주주가 없는 기업이다.
이들 기업은 재벌기업과 달리 뚜렷한 주인이 없기 때문에 기존 경영진 등이 기득권 세력이 될 수 있는 만큼 소유분산 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게 정부·여당 측 논리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최근 청와대에서 진행된 금융위원회의 업무보고에서 “정부 투자 기업 내지 공기업이었다가 민영화되면서 소유가 분산된 기업들은 소위 ‘스튜어드십’이라는 게 작동돼야 한다”고 말하며 국민연금 등 정부 관련 기관들이 경영 감시를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뜻을 보였고 국민의힘도 여기에 힘을 싣고 있다.
다만 해당 기업들로서는 이런 정부·여당의 방침을 외압으로 받아들일 여지가 많다. 일각에서는 정부·여당에서 자기 사람을 자리에 앉히기 위해 실력을 행사한다는 의심도 나오고 있다.
KT 이사회가 대표이사 선임을 공개경쟁 방식으로 재추진하게 된 것도 정부·여당 측 압박과 관련이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미 구 사장은 차기 대표이사 후보로 추천됐다가 국민연금의 반대에 부딪히며 원점으로 돌아가 경쟁을 통해 재신임을 받은 일이 있는데 또다시 이 과정을 한 번 더 밟아야 하게 됐기 때문이다. 각 고비마다 국민연금은 KT의 대표이사 심사 과정의 절차나 투명성을 문제 삼으며 제동을 걸었다.
다만 정부·여당으로서도 잇따른 구현모 흔들기의 역풍을 우려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으로 보인다. 야당에서 이 문제를 정치 쟁점화는데 따른 부담이 만만치 않아서다.
소유분산 기업과 관련한 문제는 다른 민감한 정치적 사안에 가려져 현재까지 쟁점으로 떠오르지 않고 있었는데 자칫 이 문제가 공론화돼 정부·여당이 민간기업 수장 자리를 정권교체의 전리품으로 나눠 먹으려 한다는 프레임이 형성될 수 있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0일 페이스북에 ‘윤석열식 인사전횡 의혹, 이런 것이 정권 바뀌면 싹 다 수사 대상’이란 제목의 게시글에서 KT 이사진이 연거푸 승인한 최고경영자가 갑자기 또 절차를 다시 밟는 점을 놓고 "총체적 인사전횡 의혹을 언젠가 반드시 밝혀야만 한다"고 비판했다.
박 의원은 “대한민국 주요 조직의 수장 자리가 모두 선거 승리의 전리품이 돼간다는 근본적 의심과 의혹에 반드시 맞서 싸워야 한다”며 “언젠가 반드시 다 파헤치겠다”고 덧붙였다.
야당에서 정부·여당의 압박을 수사가 필요한 범죄로 규정한 것이다.
현재 KT 차기 대표이사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 가운데 몇몇은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윤석열 캠프에 가담했던 인물인 것으로 알려졌다. 공개경쟁 방식을 채택한 만큼 해당 인물들이 실제로 경쟁에 참여한다면 심사 과정에서 ‘낙하산 논란’이 불거질 가능성도 있다.
반면 구현모 사장은 부당하게 여겨질 수 있는 압박을 받으면서도 번번이 문제제기를 겸허히 수용하는 태도로 임하며 차근차근 연임을 위한 명분을 쌓았다.
KT 관계자는 “지난해 12월 말 현 최고경영자(CEO)인 구현모 사장을 차기 대표이사 후보로 확정했지만 주요 이해관계자 등이 요청하는 소유분산 기업 지배구조 개선 방향에 부합하고자 구 사장이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재차 공개 경쟁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설명했다.
구 사장이 KT 내부 출신이란 점도 강점으로 꼽힌다.
구 사장은 KT 30년 넘게 일하며 내부에서 실력과 기반을 다져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역대 KT 회장 면면을 보면 외부 출신의 낙하산 인사가 다수를 이루는 만큼 구 사장이 내부 출신이라는 점이 연임에도 가산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무엇보다 영업 실적으로 경영능력을 입증했다는 점이 구 사장이 국민연금의 입장을 수용해 대표이사 선임절차를 원점으로 돌렸던 자신감의 주요한 배경으로 분석된다.
KT는 2022년 연결기준으로 매출 25조6500억 원, 영업이익 1조6901억 원을 거뒀다. 2021년과 비교해 매출은 3% 늘며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영업이익은 구 사장이 임기를 시작하기 전인 2019년 말(1조1596억 원)과 비교하면 50% 정도 늘었다.
구 사장의 '디지코(디지털플랫폼 기업)' 비전도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구 사장은 2020년 취임 뒤 인공지능, 클라우드/데이터센터, 디지털전환(DX) 솔루션 등 B2B(기업 사이 거래) 사업을 앞세워 디지코 전환 전략을 추진하며 KT의 성장성을 높이는 일에 주력해 왔다.
구 사장 재임 기간 KT 주가는 80% 가까이 상승하는 등 좋은 흐름을 보였는데 이는 그 동안의 실적 호조와 디지코를 비롯한 성장동력 비전이 뒷받침된 덕분으로 분석된다.
구 사장은 대표이사 후보 심사과정에서 실적 호조세와 신사업 추진동력을 유지하려면 내부 상황과 현안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현직 최고경영자가 적합하다는 점을 심사위원들에게 적극적으로 호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구 사장이 대표이사 선임을 원점에서 시작하는 만큼 불확실성도 감수해야 한다. 특히 구 사장이 안고 있는 법적 리스크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구 사장은 황창규 전 KT 대표이사 회장 시절인 2014년부터 2017년까지 19·20대 국회의원 정치후원회 계좌에 회사 돈 수억 원을 불법 후원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에 약식기소돼 법원으로부터 벌금 1500만 원을 선고 받았고 현재 1심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10일 KT 법인이 같은 사안으로 항소심에서 유죄를 선고 받은 만큼 구 사장에게도 경고등이 켜졌다고 볼 수 있다. 앞서 KT는 1심에서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벌금 1천만 원을 선고받았는데 항소심에서도 같은 형량을 부여 받았다.
이와 관련해 KT의 다른 관계자는 비즈니스포스트와 통화에서 "KT 정관상 이사의 부적격 사유는 금고 이상의 형을 받았을 때만 해당한다"며 "구 사장에게 법적 리스크가 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참여연대, 재벌개혁경제민주화네트워크 등 시민단체에서는 올해 초 논평에서 "구 사장의 국회의원 불법 후원 사례는 국민연금에서 연임을 반대할 이유가 된다”고 주장했다.
차기 대표이사 선임을 공개경쟁 방식으로 하기 때문에 돌발변수가 발생할 가능성도 그만큼 많다. 기존에 거론됐던 후보군 밖에 참신한 인물이 경쟁에 참여한다면 구 사장의 입지를 위협할 수도 있다.
KT는 20일 13시까지 홈페이지와 직접 방문(서울 종로구의 KT 광화문이스트빌딩)을 통해 대표이사 후보들의 지원서를 받는다. 투명한 심사를 위해 응모자 명단도 공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류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