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중앙은행의 수익률곡선제어(YCC) 정책흐름을 우리나라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지난해 연말 일본은행 측의 갑작스런 10년물 국채금리 변동허용 폭 확대 발표에 일본 매체들은 일제히 ‘서프라이즈’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놀라움을 표시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놀란 척을 했다.
일본은행의 구로다 하루히코(黒田東彦) 총재의 임기가 4월8일까지로 예정돼 있어 후임총재가 어차피 YCC(Yield Curve Control)를 완화할 것이라는 관측들이 많았다. 완화를 넘어 폐지수순을 밟게 될지 모른다는 견해들도 상당했다. ‘서프라이즈’라는 표현을 쓸 일이 아니었다.
일본 언론들은 시장에 어떠한 사전적 시그널도 주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면서 구로다 총재를 몰아세우고 있지만 구로다 총재로서도 할 말은 있다.
예상된 금리인상은 실현된 금리인상보다 시장에 더 나쁜 영향을 미친다. 채권가격 하락이 뻔히 예견되는 상황에서 이를 내다팔지 않을 투자자는 없다. 온갖 루머와 예단들이 난무하면서 자칫 시장에 채권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올 수도 있다. 0.25%포인트 인상으로 감당이 안 되는 상황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기까지는 일본은행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한다지만 문제는 지금부터다.
한 번 무너진 둑은 다시 무너질 개연성이 있다. 일본정부가 YCC 출구전략을 세우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들이 벌써부터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진짜 문제는 일본정부가 YCC를 유지하든, 출구전략을 구사하든, 어느 쪽도 일본경제의 앞날이 순탄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YCC를 현 수준에서 유지하자면 미국과의 금리차를 견뎌야만 한다. 현재 미국 10년 만기 채권의 시장금리는 3.5%를 웃도는 수준이다. 이번에 올라간 상한폭을 감안해도 일본의 그것과는 여전히 3%포인트 이상 차이가 난다. 0.25%포인트 올린 것만으로 엔저와 물가상승률의 억제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지난 12일 발표된 미국의 12월 소비자 물가지수(CPI)는 6.5%다. 최고치였던 6월치 지수 9.1%보다 2.6%포인트 크게 떨어진 수치다. 이 점만 놓고 보면 조만간 미국의 금리상승세는 한풀 꺾일 것이라는 전망도 가능하다.
하지만 같은 달 미국의 실업률은 3.5%로 최저 수준에 머물고 있다. 실업률을 경기과열의 주요 지표로 판단하는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쉽게 금리를 낮춰 줄지는 미지수다. 약간의 추가적 금리상승 견해가 대세이고 최소한 현재 고금리를 당분간 유지해 나갈 것이라는 전망들이 많다.
미국의 조속한 금리인하는 일본에게 그저 희망고문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 국민들이 느끼는 인플레이션 공포감이 점차 커지고 있어 현 수준에서의 YCC 유지 가능성에는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다.
YCC 출구전략은 한층 더 많은 난제들을 갖고 있다. 적당한 선에서 엔화강세가 이루어지고 수입물가가 낮아지는 것이 정책 지향점이겠지만 반대급부의 부작용이 더 클 공산이 높다.
금리인상이 예견되는 순간부터 국채가격의 하락은 피하기 어렵다. 그러지 않아도 일본 투자자들은 일찌감치 자신들의 보유채권을 일본은행에 떠맡겨왔다. 일본은행의 국채보유율은 지난해 9월을 기점으로 50%를 넘긴 상태다. 10년 전인 2013년 3월말 13.12%였던 것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높은 수치다.
YCC 출구전략이 방향을 잘못 틀게 될 경우, 극단적으로는 일본은행만이 정부채권을 매입하게 될 것이라는 견해까지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의 재정 파이낸스가, 형식적으로나마 법망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다면, 이후로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일본의 한 매체는 국채가격의 하락과 이로 인한 기업채권 가격의 하락, 기업 채권발행의 어려움, 해외 기업활동의 난항 등의 연결고리가 작동하면 국가신용도가 현재 A+에서 A단계로 낮아질 수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공매도 등의 방식으로 투기적 헤지펀드가 개입할 소지도 크다.
채권을 보유하고 있는 연/기금, 은행 및 보험회사 등 운용기관들도 문제다. 일본은행측은 만기까지 채권을 보유하면 실질적 손실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지만 장부상의 평가손까지 막을 수는 없다. 실적하향에 따른 신용도 하락을 감내해야만 한다.
대출가계의 부담증가와 부동산에 대한 악영향은 차치하고서라도 구제금융으로 버티던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게 될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이미 국가재정의 4분의 1 가량을 국가채무 원리금 상환에 사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장차 늘어나게 될 이자부담은 일본정부가 처한 최대의 고민거리다. 금리를 1%포인트 올릴 때마다 일본정부의 연간 이자부담액은 3.5조 엔 정도 증가한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일본 최대 자랑거리인 350조 엔 이상 규모의 해외자산이 있다지만 이마저도 상당한 가치하락이 동반하지 않고서는 본격적인 엔캐리 청산이 이루어지기 쉽지 않다.
이래저래 일본의 금리인상이 초기에는 엔화강세를 가져오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엔화약세로 회귀할 주장들이 나름 설득력을 얻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말하자면 현재 일본은 YCC의 유지도, 폐지도 어려운 상황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일본경제가 매를 맞야할 때 매를 맞지 않았다는 가장 확실한 이유가 존재한다.
2011년부터 2020년까지 일본의 실질임금 상승률은 1.4%에 머물렀다. 같은 기간 한국의 실질임금 상승률 38.7%와 극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도대체 그동안 일본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난 30여 년 동안 일본은 국민 전체가 디플레이션 적응훈련을 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낮은 구매력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기업은 값싼 가성비의 제품들을 만들어 파는 방식을 택했다.
한국이 배기량 1000cc의 제법 큰 경차를 만들 때 일본은 배기량 660cc의 작고 저렴한 경차를 만들었다. 우리가 값비싼 모델의 스마트폰과 백색가전을 쏟아내는 동안 일본 기업들은 100엔샵에 맞는 제품들로 구매력 낮은 가계의 지출을 줄이는데 기여했다.
일본이 서둘러 YCC 완화에 나선 데에는 지난해 연말 일본의 CPI가 3.8%까지 상승한 것이 주 요인으로 작용했다. 우리나라의 5%에 비해 낮은 수치이지만, 일본 경제가 느끼는 체감은 우리보다 크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일본경제가 디플레이션에 익숙해왔기 때문이 아니다. 낮아진 구매력이 감당하기에는 그 수치마저 너무 높기 때문이다.
이른바 제로금리는 일본 좀비기업의 양산에도 기여했다. 한국무역협회 도쿄지부의 보고에 따르면 사업이익으로 이자부담을 충당할 수 없음에도 여전히 기업을 운영하는 일본 기업의 수는 2020년 말 기준 16만5천 개에 달하고 있다.
IMF는 우리에게 아픈 과거였지만, 한편으로는 기업의 체질을 단련하는 계기가 됐다. 경쟁력 없는 기업이 도산하고, 엔화를 빌어 돈벌이에 치중하던 종금사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당시 BIS 8%를 맞추지 못해 문을 닫던 한국의 은행들은 2021년 평균 BIS 16.5%를 유지하는 체질로 개선됐다.
YCC는 양적완화를 통해 일본인들의 구매력을 높이고 만성적인 디플레이션에서 탈피할 목적이었지만 돌아온 것은 ‘빚더미 일본’이 됐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흔들면서 기업이 맞아야 할 매를 말려왔던 일본정부가 자초한 일이다.
일본은행은 일본정부의 자회사라던 아베 전 총리의 발언은, 일본은행을 보는 일본 정치인들의 시각을 요약해주고 있다. 구로다 총재는 모기업이 파견한 아베노믹스의 집행대행인에 불과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인의 몸값은 올랐고 일본인의 몸값은 정체했다. 한국에는 건강한 인플레이션이 있었고 일본에는 멈춰선 물가가 있었다.
비싼 인건비의 나라는 고부가가치의 나라다. 비싸게 만들어 팔고, 싸게 수입해서 양껏 쓰고, 해외에 나가 돈을 쓸 수 있는 나라다. 돈을 버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 길을 걸어왔고 일본은 그렇지 못했다.
비이커의 따뜻한 물 속 편안함에 길들여진 일본경제가 금리정책의 전환을 통해 차가운 바깥 세상으로 튀어 나오게 될지, 혹은 그대로 폭삭 삶아진 상태가 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한가지 알 수 있는 것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 우리의 미래상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기에는 그동안 서로가 너무나 다른 길을 걸어왔다.
이제 일본은 우리에게 따라가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의 스승인 반면 일본에게 우리는 보고 배워야 할 롤모델이 되었다는 점 하나만은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조광태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