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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 지방선거 이후 처음 만난 박원순 서울시장과 정몽준 전 의원이 지난달 19일 오전 서울시청 박 시장 집무실 앞 복도에서 악수하고 있다. |
정몽준이라는 이름 석자가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브라질 월드컵에서 한국이 참담한 성적을 거둔 탓이다.
‘축구 대통령’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은 한국축구의 역사에서 가장 화려했던 시절을 만들었다. 그런 만큼 브라질 월드컵 실패를 계기로 대한축구협회의 무능이 도마 위에 오르면서 ‘정몽준 시절’을 꺼내는 말들이 많이 나온다.
정몽준 명예회장은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의 사촌 형이다.
정몽규 회장은 브라질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대표팀 감독을 3차례나 바꿨다. 이 점이 바로 브라질 월드컵 실패의 주된 원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정몽준 명예회장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히딩크 감독을 절대적으로 신임했다. 히딩크 감독이 네델란드에 5대 0으로 지면서 사퇴론이 불거질 때도 이를 막아냈다. 덕분에 한국 축구는 월드컵 4강이라는 신화를 쓸 수 있었다.
◆ “우승”이라는 말로 히딩크를 사로잡은 정몽준
한일월드컵 때 4강 신화에 이르기까지 정 명예회장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특히 히딩크 감독에 대한 정 명예회장의 뚝심있는 지지는 ‘월드컵 4강 신화’의 원동력이었다.
정 명예회장은 히딩크 감독 선임에 절대적 역할을 했다. 히딩크 감독은 처음에 세계 축구계의 변방에 속하는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직 제의에 회의적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정 명예회장의 한마디에 히딩크 감독은 감독직 제의를 수락했다.
정 명예회장은 히딩크 감독이 월드컵 목표에 대해 질문하자 “당연히 우승”이라고 대답했다.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 준비기간 동안 가진 평가전 경기에서 다섯 골 차이로 지는 일이 빈번했다. 그래서 ‘오대영’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축구팬들의 불신이 이어지며 사퇴론이 불거졌다.
정 명예회장은 이런 여론에 아랑곳 하지 않고 히딩크 감독에 대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았다. 사퇴여론을 몸으로 막아냈다. 이런 정 명예회장의 노력 덕분에 히딩크 감독은 한국에 맞는 축구를 구현해 냈다.
이는 2014 브라질 월드컵을 준비해온 정몽규 회장의 축구협회 태도와 차이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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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팀 선수들이 터키와의 2002한일월드컵 3-4위전을 마친 후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헹가래치고 있다. |
◆ 정몽준 ‘축구대통령’ 16년의 공과
정몽준 명예회장은 1993년 김우중 회장에 이어 제 47대 대한축구협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제 50대까지 총 4번의 재선임을 거치며 16년 동안 한국축구를 이끌었다. 이를 통해 ‘축구대통령’이란 애칭을 얻었다.
그는 2009년을 끝으로 명예회장직으로 물러났다. 그렇지만 여전히 국내 축구계에서 그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정몽준 축구협회장 16년을 놓고 평가는 엇갈린다. 비판적 입장에 선 축구인들은 정몽준 시절에 축구협회가 파벌이 깊어지고 밀실행정이 이뤄졌다고 지적한다. 또 기술위원회가 유명무실해져 대표선수 선발의 공정성을 잃기도 했다고 비판한다.
축구계에서 야당으로 꼽히는 신문선 명지대 교수는 이번 월드컵 참패를 두고 "정몽준 전 회장과 정몽규 회장 재임 20년 동안 축구협회 기술위는 행정의 하부조직에 머물러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정 명예회장이 한일월드컵 공동개최를 통해 한국축구를 한단계 도약하도록 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는 월드컵 개최를 위해 세계를 뛰어 다녔다. 1994년 5월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에 당선된 뒤 1996년 5월31일 유치가 결정될 때까지 120여 일 동안 해외를 돌며 유치작전을 펼쳤다. 당시 지구를 15바퀴 돌 수 있는 거리인 150만 km를 다니며 강행군했다.
정 명예회장은 또 한국 여자축구 성장의 기반을 다진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1993년 대한축구협회 취임 후 “남자축구보다 여자축구가 더 빨리 세계무대를 호령할 것”이라며 여자축구에 대한 가능성을 높게 봤다.
정 명예회장은 사비를 투자해 중고등학교 여자축구부를 만들게 했다. 1993년 청운중학교를 시작으로 현대공업고등학교, 울산과학대학, 인천 현대제철 레드엔젤스로 이어지는 팀 체계를 구축했다. 이들 팀의 운영비 수십억 원은 모두 정 명예회장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그의 투자는 2010년 9월 17세 여자축구 국가대표팀이 FIFA U-17여자 월드컵에서 우승할 수 있게 만든 힘이 됐다.
정 명예회장은 최근 이사 하야투 FIFA 부회장을 만나 2019 여자월드컵 개최 지원을 부탁하는 등 지속적으로 한국축구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9 여자월드컵 개최지 확정은 내년 3월로 예정돼 있다.
그를 축구계로 이끈 것은 축구에 대한 애정이다.
정 명예회장의 축구사랑은 학창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다닌 중앙고등학교는 당시 전국에서 축구 잘하기로 소문난 학교였다. 그래서 그는 학교 축구팀을 응원하러 다니면서 축구에 대한 애정이 싹 텄다.
그의 축구사랑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는 요즘도 직접 경기장을 찾아 축구를 본다. 일반인들은 방송중계를 축구공 중심으로 보는데 그는 전체 선수들의 움직임을 보고 싶어 한다.
정 명예회장은 최근 국제무대에서 입지가 많이 약화됐다. 그는 한 때 FIFA 회장에 도전할 만큼 인지도를 쌓았지만 2011년 FIFA 부회장 재선에서 낙마하며 영향력이 줄었다. 그는 1994년부터 2011년까지 17년 동안 FIFA 부회장을 지냈다.
◆ 월드컵 성공을 등에 업고 대선주자로
정 명예회장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단숨에 대선주자로 발돋움 했다.
그는 한일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이끈 그해 9월 대선에 출마했다. 2002년 8월 시행된 대선후보자 지지율 조사에서 당시 여야의 대선주자들인 이회창, 노무현 후보를 제칠 정도로 기세등등했다.
이를 놓고 정 명예회장이 월드컵을 통해 우리 국민에게 ‘할 수 있다’는 강한 자부심을 심어줬기 때문에 국민으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받는다는 분석이 나왔다. 당시 국민들은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오랫동안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월드컵 4강신화의 메시지는 강렬했다.
그러나 정 명예회장은 월드컵 열기가 한풀 꺾인 데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뚜렷한 정책을 내놓지 못하면서 지지율이 떨어졌다. 결국 후보단일화로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대선후보를 양보한 뒤 대선주자에서 물러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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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몽준(왼쪽) FIFA 명예부회장이 6월24일 오전 브라질 리오 데 자네이루에서 이사 하야투(가운데) FIFA 부회장 겸 아프리카 축구연맹 회장 등 관계자들과 만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 시련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정몽준
정 명예회장에게 올해는 시련의 한 해다. 그는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배했다. 그에게 서울시장 선거는 대선을 향한 승부수나 다름없었다.
그는 국회의원 7선의 정치인이다. 지난 5월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실시한 차기 대선후보 지지도 조사에서 20% 넘는 지지율로 1위에 올라 여권 차기 대권주자로 위치가 확인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선거에서 43.1%를 얻어 박원순 시장에게 12.9%포인트 차이로 패배했다.
그는 선거패배 후 재기를 모색하고 있다. 지난 달 19일 박원순 서울시장과 만나 다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FIFA의 공식초청을 받아 지난달 20일 브라질로 가서 국가대표팀을 격려했다. 지난 27일 벨기에와 조별예선 3차전 경기를 직접 관람했다.
새누리당은 정 명예회장의 선거구인 동작을에서 김문수 전 경기지사가 출마를 고사하자 정 명예회장의 부인인 김영명씨의 출마를 타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 명예회장은 지역주민을 설득한 명분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정 명예회장은 여전히 여권의 유력 대선후보에 올라 있다. 지난달 30일 여론조사기관인 리얼미터의 조사를 보면 그는 여권 차기 대권주자 가운데 2위에 올랐다. 1위는 12.1%의 지지를 받은 김문수 전 경기지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