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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기택 전 KDB산업은행 회장. |
"통합산업은행을 성공적으로 출범시켰고 원칙에 따른 기업구조조정을 추진하는 등 정책금융기관 맏형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홍기택 전 KDB금융그룹 회장 겸 산업은행장은 올해 2월 이임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홍 전 회장은 대우조선해양 등 조선해운 기업 구조조정과 관련해 책임론에 휩싸였다.
홍 전 회장이 이임사에서 '원칙에 따른' 기업 구조조정을 추진했다고 밝힌 것과 상반된 주장을 내놔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 홍기택 "대우조선해양 지원, 산업은행은 들러리였을 뿐"
홍 전 회장은 최근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산업은행 자회사인 대우조선해양 부실과 관련해 정부 실세와 이른바 ‘정피아’ 등 낙하산 인사들의 책임을 거론했다.
홍 전 회장은 현재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부총재로 재임하고 있으며 5월31일 중국 베이징에서 인터뷰에 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대우조선해양 유동성을 지원한 과정과 관련해 산업은행이 들러리 역할만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청와대와 기획재정부, 금융당국이 결정한 행위”라며 “애초부터 시장원리가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홍 전 회장은 “지난해 10월 중순 청와대 서별관회의에서 당시 최경환 경제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 임종룡 금융위원장, 진웅섭 금융감독원장 등으로부터 정부의 결정내용을 전달받았다”고 말했다.
산업은행은 지난해 말 대우조선해양에 대해 4조2천억 원의 유동성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홍 전 회장은 이런 지원과 금액을 결정한 데 정부당국의 입김이 있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홍 전 회장은 산업은행 내부가 정권의 실세로 채워져 정책금융기관으로서 제기능을 하지 못했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는 산업은행 자회사의 인사와 관련 “청와대가 3분의 1, 금융당국이 3분의 1을 몫으로 가져갔고 산업은행이 자체적으로 행사한 인사권은 3분의 1 정도였다”고 폭로했다.
홍 전 회장의 발언은 최근 조선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대규모 부실에 산업은행과 대우조선해양 경영진 등의 책임론이 일면서 수세에 몰리자 관치금융의 실상을 폭로하며 역공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홍 전 회장은 “당시 정부안에는 대우조선의 주채권은행인 산은과 최대 주주 은행인 수출입은행이 얼마씩 돈을 부담해야 하는지도 다 정해져 있었다”며 “산은은 채권비율대로 지원하자고 했지만 그렇게 될 경우 수출입은행의 자기자본비율이 크게 떨어질 것을 우려한 정부가 산업은행으로 하여금 더 많은 지원을 하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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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호 전 대우조선해양 사장. |
산업은행은 대우조선해양 채권이 22%로 수출입은행 53%에 비해 적었다. 하지만 대우조선해양 유동성 지원은 산업은행이 2조6천억 원, 수출입은행이 1조6천억 원으로 결정됐다.
홍 전 회장은 대우조선해양뿐 아니라 2013년 STX조선과 팬오션 문제에도 정부당국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STX조선과 팬오션 문제가 불거진 2013년에도 정부는 서별관회의에서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파장이 크다’며 산은에 무조건 채권단 공동관리(자율협약)를 통해 떠안으라고 했다”며 “실사 결과 STX조선은 살리는 게 낫다는 결론이 나와 자율협약으로 갔지만 팬오션은 자율협약으로 가면 채권단이 2조원의 손실을 입을 상황이어서 우여곡절 끝에 법정관리로 방향을 틀었다”고 말했다.
◆ 검찰, 대우조선해양 부실에 경영진 정조준
산업은행은 STX조선과 대우조선해양에 ‘밑 빠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 부실규모를 키웠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산업은행이 조선해운 구조조정을 주도할 자격이 있느냐는 의문도 잇따르고 있다.
특히 대우조선해양은 수조원대 손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 분식회계 의혹으로 검찰수사를 받고 있다.
대검찰청 부패범죄특별수사단은 대우조선해양이 2013년부터 2014년까지 2년간 발생한 2조 원 규모의 손실을 축소한 혐의를 잡고 8일 본사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였다.
검찰수사가 본격화할 경우 대우조선해양 전 경영진도 적자규모 고의축소 의혹과 관련한 수사대상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 남상태 고재호 전 대우조선해양 사장은 분식회계와 배임의혹으로 출국금지가 내려졌다.
검찰은 이날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산업은행과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에 대해서도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대우조선해양 부실 사태와 관련해 검찰의 칼끝이 산업은행으로도 향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검 부패범죄특별수사단은 올해 1월 전국단위 대형 부패범죄를 수사하기 위해 정식 출범했다. 조직이 꾸려진 지 5개월여 만에 첫 번째 타깃으로 대우조선해양을 정조준한 것이다.
또 대우조선해양 부실과 관련해 단순한 경영상의 잘못이 아닌 부패범죄로 보고 있다는 점도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이번 사안과 관련한 책임자들의 개인비리 여부도 철저히 들여다보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검찰은 “대규모 공적자금이 투입됐고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최대주주로서 경영에 관여하는 등 사실상 공기업처럼 운영되는 대우조선해양에서 분식회계 및 경영진 비리 등 수사 단서가 다수 발견됐다"고 밝혔다.
검찰은 수사착수 배경에 대해 "공기업 비리와 같은 차원에서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수사 대상의 규모나 성격으로 볼 때 인적·물적 자원을 집중 투입해야 하는 전국 단위의 부정부패 사건에 해당하는 점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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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기택 전 KDB산업은행 회장. |
◆ 홍기택의 아이러니 '낙하산' 수장 한계 못 넘어
홍 전 회장은 산업은행의 고질적 ‘낙하산’ 인사 관행을 비판했지만 그도 ‘낙하산’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그는 2013년 4월9일 취임했으며 그해 국정감사에 출석해 "낙하산으로 왔기 때문에 오히려 부채(빚)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홍 전 회장은 중앙대 교수 출신으로 박근혜 대선캠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경제분과에서 활동한 공로를 높이 평가받아 국책은행 수장에 올랐다.
홍 전 회장은 ‘빚’이 없다고 강조했지만 인터뷰에서 밝힌 주장이 사실이라면 재임 3년 동안 정부당국에 휘둘려 중요한 의사결정에서 제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점을 자인한 셈이 됐다. 결국 그도 ‘낙하산’ 수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홍 전 회장은 산업은행의 책임론을 뒤로 하고 올해 2월 AIIB 부총재로 영전했다. 하지만 최근 조선업 구조조정 부실사태 관련 책임 압박이 커지고 검찰 수사까지 본격화할 조짐을 보이자 학자로서 쌓아왔던 명예까지 실추될 처지로 내몰리고 있다.
청와대는 홍 전 회장의 발언에 대해 개인의 주장일 뿐이라고 일축했으나 산업은행 개혁론은 물론 국책은행으로서 무용론까지 파문이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