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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몽준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가 이달 4일 선거가 끝난 직후 방송3사 출구조사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 <뉴시스> |
정몽준 새누리당 후보가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배했다. 정 후보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서울시장 도전은 대선을 향한 승부수였다. 서울시장을 발판으로 대통령 도전의 꿈을 키우고자 했다.
그 꿈은 아버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이루지 못한 도전을 잇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2대에 걸친 대통령 도전의 꿈이 스러지고 있다.
정 후보는 7선의 거물 정치인이다. 지난달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실시한 차기 대선후보 지지도 조사에서도 20% 넘는 지지율로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정 후보는 전투에서 항상 이겼지만 전쟁에서 단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5일 확정된 투표 결과에 따르면 정 후보는 43.1%의 표를 얻어 56.0%를 득표한 박원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에게 크게 밀렸다.
정 후보는 이날 새벽 0시쯤 여의도 캠프를 방문해 "시민의 선택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며 패배를 인정했다.
◆ 유권자와 ‘딴 세상 사람’이었던 정몽준
정 후보는 현대중공업의 오너인 ‘재벌 정치인’이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도 경제는 남들보다 잘 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재벌이라는 출신에 발목을 잡혔다.
정 후보는 선거유세 동안 각종 설화에 휘말리면서 ‘대중과 다른 세상에 산다’는 느낌을 유권자에게 줬다. 그는 새누리당 대표 시절 ‘버스비 70원’ 촌극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번에도 서민과 멀다는 이미지가 서울시장 도전에 큰 타격을 줬다.
정 후보에게 대중과 유리된 이미지를 심어준 사람은 다름 아닌 가족이었다. 막내아들은 지난 4월21일 ‘국민이 미개하니 국가도 미개하다‘는 글을 SNS에 올렸다. 세월호 침몰사고 현장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유족들의 항의를 받은 것을 보고 쓴 것이었다. 이 글이 알려지면서 정 후보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그는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어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제 불찰”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정 후보가 사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부인 김영명씨가 아들의 말을 옹호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김씨는 지난달 7일 지지자들 앞에서 “(막내가) 바른 소리를 했다고 격려하고 위로해주시긴 하는데 시기가 안 좋았다”며 “어린아이다 보니 말 선택이 좀 안 좋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정 후보는 당일 페이스북에 “아내와 저는 아들의 글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이라 생각한다”는 글을 올리며 재차 사과해야 했다.
이를 기점으로 정 후보의 지지율은 크게 떨어졌다. 지난달 15일 한 언론사가 코리아리서치와 시행한 여론조사에서 정 후보는 32.5%의 지지율을 얻어 박 후보(52.9%)보다 뒤처졌다. 오차 범위 내로 접전을 벌이던 2개월 전보다 한참 밀리는 형국이었다.
정 후보는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네거티브 전략’을 썼다. ‘반값 등록금’ 등 박 후보가 내세운 정책을 비판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정 후보 본인의 발언이 논란을 일으키며 오히려 악영향을 줬다.
정 후보는 지난달 20일 간담회에서 반값 등록금에 관해 “취지는 이해하나 최고 교육기관인 대학의 사회적 인식을 떨어뜨리고 대학 졸업생에 대한 사회적 존경심을 훼손시킨다”고 말했다. 박 후보 측이 즉각 반박하자 정 후보 측 이수희 대변인은 다음날 “‘반값’이라는 용어의 표현이 문제라는 의미”였다고 해명했다.
선거일이 다가오자 정 후보는 ‘농약 급식’에 초점을 맞췄다. 박 후보 시장 재직시절 학교급식에 농약성분이 남은 식자재가 들어갔다는 주장을 펼쳤다. 선거를 앞둔 지난 3일 직접 18시간 반 동안 유세현장을 뛰면서 “라디오 인터뷰에서 박 후보는 학교급식에 농약이 묻은 식자재가 들어갔느냐고 하니 대답을 못 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네거티브 전략을 통한 정 후보의 반전시도는 실패했다. 오히려 정 후보에게 역풍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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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몽준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왼쪽)가 2012년 10월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현 대통령)와 서울 신문로 아산정책연구원에서 만난 자리에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다. <뉴시스> |
◆ 정몽준은 왜 결정적 고비를 넘지 못하나
정 후보는 지금까지 ‘전투’에서 실패하지 않았다. 13대 국회에 입성한 이래 지금까지 7선 국회의원의 자리를 지켰다. 2008년 여당인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표를 역임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한 적은 없다. 한일 공동 월드컵의 인기를 업고 나섰던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밀렸다. 2007년 새누리당에 들어간 뒤 2012년 대선 당시 당내 경선에 나섰다가 규칙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다 결국 불참했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패배했다.
정 후보가 처음 나선 전쟁터는 16대 대선이다. 당시 FIFA 부회장인 정 후보는 자신이 유치한 2002년 한일월드컵이 성공하면서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8월 초 시행된 대선후보 여론조사에서 30%가 넘는 지지율을 얻을 정도였다.
정 후보는 2002년 9월 대선출마를 공식선언하고 신당 ‘국민통합21’을 창당해 본격적인 유세에 나섰다. 신당을 만든 직후 노무현 전 대통령을 따돌리고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와 1위를 다투기도 했다. 그러나 월드컵 열기가 한풀 꺾이고 뚜렷한 정책을 내놓지 못하면서 지지율은 점차 떨어졌다. 결국 노 전 대통령과 후보 단일화 협상에 나서야 했다.
이때 노 전 대통령이 단일후보로 결정되면서 정 후보는 대선 경주에서 물러났다. 당시 단일후보를 결정하는 여론조사에서 약 4%포인트라는 간발의 차로 패배했다. 불화 끝에 대선 전날 단일화 파기를 선언한 것은 오히려 독이 됐다. 노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정 후보는 정치적 암흑기를 보냈다.
정 후보는 2007년 대선 직전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다시 대권 주자로 떠올랐다. 그는 다음해 4월 총선에서 당의 요청으로 기존 지역구인 울산 동구 대신 서울 동작구을에 출마했다. 그때 그는 정동영 당시 통합민주당 후보를 꺾은 뒤 한나라당 최고위원에 입성했다. 그해 한나라당 당대표가 되면서 정치적 부활을 이뤘다.
그러나 정 후보의 리더십은 2010년 6월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참패하면서 다시 흔들렸다. 선거 직후 정 후보는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그동안 박근혜 현 대통령이 당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그는 권력 일선에서 멀어졌다.
정 후보는 2012년에도 대선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이미 박 대통령의 독주가 굳어지는 형세였다. 결국 그는 경선규칙을 놓고 박 대통령과 다투다가 불참을 선언했다. 제대로 승부를 겨룰 기회도 얻지 못한 셈이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는 정 후보의 사실상 마지막 승부수였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정 후보는 든든한 여당 울타리를 가졌으나 결국 비주류”라며 “다음 대선 도전을 위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카드는 서울시장 출마였다”고 말했다.
정 후보는 서울시장 출마를 통해 ‘정몽준’이라는 이름의 위력이 아직 살아있다는 점을 보여 줬다. 당내 경선에서 김황식 후보를 압도적으로 이긴 것이 그의 위력을 입증했다.
그러나 서울시장 본선에서 박 후보에게 패배하면서 정 후보는 큰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내기 힘들다는 결정적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바로 이 점이 정 후보의 미래를 어둡게 만든다고 정치분석가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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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몽준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가 지난달 5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 있는 도선사를 방문해 명부전에 모셔진 아버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영정을 바라보고 있다. <뉴시스> |
◆ 2대에 걸친 대권 도전, 이대로 끝날까
대통령을 향한 정 후보의 꿈은 아버지 정주영 명예회장이 못다 이룬 꿈을 잇는 것이기도 하다.
정 명예회장은 1992년 12월 대선에서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16.3%를 득표하며 낙선했다. 정 후보는 아버지가 대선에 나선 데 대해 “흔히들 기업인은 정치에 성공할 수 없다고 여긴다”며 “아버지는 기업인이 왜 큰일을 할 수 없냐는 심정으로 도전했다”고 말했다.
정 후보가 형제들과 달리 정계에 투신한 것도 정 명예회장의 뜻이라고 알려졌다. 정 후보는 현대중공업 CEO였던 1988년 3월 총선에 출마하면서 정치로 방향을 돌렸다. 이 출마도 정 명예회장의 의중이 작용했다고 한다. 정 후보는 저서 <일본에 말한다>에서 “아버님은 가문에서 한 사람 정도는 정치가가 배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다”고 밝혔다.
정 명예회장은 1984년 정 후보를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데려가 당시 여당인 민정당 공천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 전 대통령이 “회사 부채가 얼마나 많은데 정치를 하려고 하느냐”며 만류해 뜻을 접었다. 결국 다음 총선 때 정 후보는 무소속으로 울산 동구에 출마해 정치인이 됐다.
정 후보는 이후에도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1990년 민자당에 입당해 여당 의원 생활을 했으나 정 명예회장이 19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하자 당적을 옮겨 대선 유세를 돕기도 했다.
정 명예회장은 대선에서 고배를 마신 뒤 정치에서 손을 뗐지만 정 후보는 정계에 남았다. 그러나 일부 정치 전문가들은 정 후보가 눈에 띄는 의정활동이 없어 오히려 정 명예회장보다 존재감이 낮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잦은 해외출장으로 결석률이 높고 대표 발의한 법률안도 ‘외국 대리인 로비활동 공개에 관한 법률안’뿐이다.
한 전문가는 “정 명예회장은 1992년 대선 당시 반값 아파트와 경부고속도로 2층 건설 등 지금도 국민들 기억 속에 파격적이고 신선하게 남은 공약을 냈다”며 “2002년 대선에 나왔던 정 후보의 공약 중 국민의 기억 속에 남은 것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