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왼쪽)과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오른쪽) |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경영권을 건 승부에 가장 큰 장애물은 ‘형제 싸움’일 수도 있다. 박삼구 회장은 동생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과 원수처럼 싸우고 있는지도 벌써 5년이나 흘렀다. 그러나 세월은 상처를 아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덧나게 하고 있다.
박삼구 회장이 지난 3월 주주총회에서 아시아나항공 대표이사로 경영일선에 복귀했을 때 가장 강력히 제동을 건 이도 바로 박찬구 회장이었다.
박찬구 회장은 아시아나항공의 보유지분을 무기삼아 박삼구 회장이 대표이사로 선임된 과정을 문제삼아 소송을 냈다. 박찬구 회장은 “박삼구 회장을 대표이사로 앉히기 위해 비정상적으로 주총이 이뤄졌다”며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마디로 박삼구 회장이 경영일선에 복귀해서는 안된다는 얘기였다.
박삼구 회장은 이에 맞서 금호석유화학이 보유한 아시아나항공 지분을 매각하라고 맞소송을 냈다. 2010년 두 형제가 갈라서면서 채권단에 서로 보유지분을 매각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라는 요구다. 박삼구 회장은 이미 금호석유화학 주식을 모두 매각했는데 박찬구 회장이 이를 지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찬구 회장은 “당시 약속은 강제조항이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형제가 마치 원수처럼 싸우고 있는 뿌리도 역시 경영권 분쟁이었다. 창업주인 부친은 65세 때 경영권을 형제에게 승계하라는 유훈을 남겼는데 이 유훈이 지켜지지 않으면서 형제는 견원지간이 됐다.
◆ 흔들리는 ‘65세 룰’ 싹트는 형제갈등
금호그룹은 2000년대 중반까지 오너 가족 간 사이가 매우 돈독한 것으로 유명했다. 기업을 설립한 박인천 창업주는 가족 화합을 늘 당부했다. 박인천 창업주는 택시 두 대로 사업을 시작해 호남지역 최고의 재벌이 됐다. 그런 그에게 경영에 참여한 네 아들은 가장 큰 자산이었다.
박인천 창업주는 1984년 세상을 떠나기 전 2세경영을 대비해 원칙을 세워놓았다. 그는 여러 사람이 관여하면 분란이 생기기 쉽다는 이유를 들어 경영 상속권을 아들만 받는 것으로 제한했다. 그리고 그룹 회장직은 형제간 합의에 따라 선임하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주요 사안은 합의와 다수결로 해결하되 최종 결정권은 손윗사람에게 있다고 정해놓았다.
그뒤 막내 박종구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을 제외한 네 형제는 창업주의 유훈에 따라 금호그룹을 25년 동안 경영했다. 형제들은 개인사업을 하지 않고 기업경영에만 전념하기로 약속했다. 장남인 박성용 전 회장부터 순서대로 동생에게 회장직을 물려주는 데에도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65세 룰’이 생겨났다. 65세에 금호그룹의 경영권을 물려주는 원칙이 세워졌다. 장남인 박성용 회장은 65세가 된 1996년 자진해 물러났다. 둘째 박정구 회장도 6년 동안 그룹을 경영하면서 “65세에 회장직을 동생에게 주겠다”고 자주 말했다. 그는 공교롭게도 65세를 맞은 2002년 폐암으로 타계했다. 그리고 셋째 박삼구 회장이 57세의 나이로 총수에 올랐다.
이런 형제승계를 뒷받침하기 위해 형제 간 ‘황금지분율’ 원칙도 세워졌다. 당시 네 형제는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각각 10.01%씩 나눴다. 새로 회사를 만들 때도 똑같이 지분을 나눴다. 그룹의 주요 경영현안도 가족회의를 통해 결정했다.
박삼구 회장도 65세가 되는 2010년 넷째 박찬구 회장에게 자리를 물려줄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두 형제는 2006년부터 부딪치기 시작했다. 갈등의 원인은 대우건설 인수였다.
박삼구 회장은 그해 건설업계 1위 기업인 대우건설을 인수했다. 박찬구 회장은 당시 “무리한 인수에 따른 후유증이 염려된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박삼구 회장은 오히려 다음해 대한통운을 사들이며 더욱 몸집을 불렸다.
특히 박삼구 회장이 ‘65세 룰’을 무시하고 3세 승계를 준비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박삼구 회장의 아들인 박세창 금호타이어 부사장이 2005년 금호아시아나에 입사한 뒤 1년 만에 전략경영본부 이사로 올랐다. 박 부사장은 당시 상무였으나 사장단 회의에 나와 보고를 받는 등 기업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박삼구 회장의 측근들은 “65세 룰은 우연일 뿐”이라는 말도 꺼내 들었다. 박삼구 측의 한 인사는 당시 “박삼구 회장이 활동중인 상황에서 차기 경영권 승계를 논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65세 형제승계론은 없다“고 잘랐다. 이에 대해 박찬구 회장이 박삼구 회장에 대해 의심을 품고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
|
|
▲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오른쪽)과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왼쪽)이 2010년 5월12일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모친 빈소를 지키고 있다. <뉴시스> |
◆ 위기의 금호그룹, 원수가 되는 형제
박삼구 회장은 대우건설과 대한통운 인수합병을 통해 금호그룹을 2009년 재계 8위까지 올려놓았다. 건설과 물류업계 1위였던 만큼 두 회사 인수에 상당한 자금이 동원됐다. 박삼구 회장은 대우건설 인수에 6조4225억 원을 투입했는데 신한은행 등 17개 은행에서 3조5천억 원을 빌렸다.
박삼구 회장은 채권단에게 2009년 말 기준으로 대우건설 주가가 3만1500원 아래로 내려갈 경우 그 가격에 주식을 되사는 약속을 했다. 그런데 그해 대우건설 주가는 1만 원대로 떨어졌다. 박삼구 회장은 이런 약속 때문에 4조 원의 추가자금 부담이 생겼다. 박삼구 회장은 금호그룹이 유동성 위기에 빠지자 그해 6월 대우건설 매각 방침을 밝혔다.
그런데 이때 금호그룹에서 화학분야를 맡아 경영하던 박찬구 회장이 갑자기 금호석유화학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두 형제는 나란히 10.01%씩 보유하던 ‘황금지분율’이 깨진 것이다. 박찬구 회장은 아들 박준경 금호석유화학 상무의 지분을 포함해 1개월 만에 18.47%까지 지분을 끌어올렸다.
박찬구 회장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당시 두가지 분석이 나왔다. 첫 번째는 박찬구 회장이 금호그룹 위기를 감안해 금호석유화학의 독립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위기를 틈타 박찬구 회장이 금호그룹 경영권을 쥐려고 했다는 것이다. 당시 금호석유화학은 금호타이어에서 아시아나항공으로 이어지는 금호그룹 출자 구조의 정점에 선 지주회사였다.
박찬구 회장은 뒷날 ‘황금지분율’을 깬 데 대해 “그룹의 유동성 위기가 금호석유화학에 급속히 퍼지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며 “(박삼구 회장의) 그릇된 경영판단에 휘둘리지 않는 합리적 의사결정구조를 갖추려는 일념으로 결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박삼구 회장은 격노했다. 박삼구 회장은 그해 7월28일 금호석유화학 이사회를 소집해 박찬구 회장을 해임했다. 박삼구 회장은 “박찬구 회장이 본인의 이해관계를 따지고 경영에 반하는 행위를 해 기업경영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고 해임이유를 밝혔다. 박삼구 회장은 “동생을 해임하는 상황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며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겠다고 했다.
그렇게 형제는 원수가 됐다. 그뒤 채권단은 워크아웃을 진행하면서 금호그룹을 박삼구 회장의 금호아시아나그룹과 박찬구 회장의 금호석유화학으로 쪼갰다. 워크아웃이 끝난 2010년 3월 박찬구 회장은 금호석유화학 회장이 됐다. 그해 11월 박삼구 회장도 금호아시아나그룹으로 돌아왔다.
계열분리 뒤에도 형제는 끊임없이 다퉜다. 금호석유화학은 2011년 3월 공정거래위원회에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를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 제외해 달라는 내용의 신청서를 제출했다.
박찬구 회장은 그해 4월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검찰수사를 받게 되자 배후로 박삼구 회장을 지목했다. 수사를 받는 도중 박삼구 회장을 포함한 금호아시아나그룹 임직원 4명을 사기 및 위증 혐의로 고소하기도 했다. 박찬구 회장은 지난 1월 열린 1심에서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2012년 ‘금호’ 브랜드를 놓고 충돌을 벌였다. 금호산업이 계열사의 상표권 사용료를 높이자 금호석유화학은 돈을 낼 수 없다고 맞섰다. 당시 박찬구 회장은 금호 상표는 박인천 창업주의 아호이므로 형제 모두가 공유해야 한다며 반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