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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서현 제일기획 사장(왼쪽)과 정성이 이노션 고문 |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은 3세 경영권 승계를 앞두고 있다. 이서현 삼성에버랜드 사장이 제일기획 경영권을, 정성이 이노션 고문이 이노션 경영권을 물려받는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제일기획과 이노션은 그동안 광고시장의 양강구도를 형성해 왔다. 이서현 사장은 2009년부터 제일기획 경영에 참여했고, 정성이 고문은 2005년 이노션 설립 당시부터 사실상 경영을 주도해 왔다. 국내 최대 재벌가 두 딸의 양보없는 싸움이 벌어진 지도 벌써 5년이 넘는다.
재벌가 두 딸의 광고전쟁은 경영권 승계와 함께 더욱 치열하게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정성이 이노션 고문은 이미 이노션의 최대주주에 올라 사실상 승계가 끝났다. 하지만 이서현 사장은 제일기획의 주식을 한 주도 갖고 있지 않다. 삼성SDS가 상장된 뒤 지분을 매각하면 5천억 원 정도의 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사장은 이것으로 제일기획을 지배할 수 있는 지분을 매입해야 한다.
광고회사 수장으로서 재벌가의 두 딸은 같은 과제에 직면해 있다. 제일기획과 이노션은 그동안 그룹 계열사의 일감 몰아주기로 급속하게 성장해왔다. 그런데 최근 일감 몰아주기 규제로 성장이 한풀 꺾였다. 정성이 고문과 이서현 사장이 회사를 키우려면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야 한다.
◆ 이서현, 제일기획 지분 0%...정성이, 이노션 지분 40%
이서현 사장은 현재 삼성에버랜드 패션사업부문 사장과 제일기획 사장을 겸하고 있다. 이 사장이 패션사업부문을 물려받을 것이라는 전망에 대해서 이견이 없다. 그는 미국 파슨스디자인대학교를 졸업한 뒤 12년 동안 제일모직에서 일하면서 삼성그룹 안에서‘이서현=패션’이라는 공식을 만들어놓았다.
이 사장이 제일기획을 물려받으려면 제일기획을 지배할 수 있는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 이 사장은 2009년부터 제일기획에서 일했다. 그가 수장을 맡는 동안 제일기획은 글로벌 광고회사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하지만 이 사장이 제일기획 주식을 단 한 주도 소유하지 않은 점은 이 사장의 경영권 승계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한다.
제일기획은 삼성그룹 지배구조에서 하단에 위치해 오너 일가의 지배력이 취약하다. 제일기획 최대주주는 삼성물산으로 보유지분이 12.64%다. 이 외에도 삼성전자 삼성카드 삼성증권 삼성화재 등 주로 금융 계열사들이 약간씩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오너 일가의 지분은 없다.
따라서 이 사장이 제일기획을 지배하려면 지분을 매입해야 한다. 제일기획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최소 5%의 지분을 보유해야 한다. 제일기획 지분 5%를 사들이는데 필요한 자금은 1400억 원으로 추산된다.
이 사장은 현재 삼성에버랜드(8.37%)와 삼성SDS(3.9%)의 지분을 갖고 있다. 두 회사 모두 아직 비상장회사다. 하지만 최근 삼성SDS가 올해 안에 상장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 사장의 삼성SDS 지분 가치는 5천억~7천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상장과정에서 공모가가 높아질 경우 지분가치는 더 커질 수 있다.
이 사장이 삼성SDS 보유지분을 팔면 제일기획 지분을 충분히 매입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사장의 제일기획 지배는 시간 문제일 수 있다. 이 사장이 보유한 삼성SDS 지분과 삼성물산이 보유한 제일기획 지분을 맞바꿀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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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이 이노션 고문 |
이 사장의 남편 김재열 삼성엔지니어링 사장은 이 사장에 앞서 제일기획에 몸 담은 적이 있다. 김 사장은 2000년 이 사장과 결혼한 뒤 2002년 제일기획 상무로 선임되면서 사위경영의 첫 발을 뗐다. 김 사장은 현재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을 맡고 있어 이 회장이 스포츠 관련 대외활동에서 김 사장을 후계자로 키우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정성이 이노션 고문의 경우 일찌감치 지분문제를 해결했다. 정 고문은 직접 이노션 설립을 주도했고 출자도 했다. 설립 당시 출자 비율은 정성이 고문이 40%, 정의선 부회장이 40%, 정몽구 회장 20%였다.
정 회장은 그 뒤 이노션 지분 전량을 정몽구재단에 기탁했다. 정몽구재단은 정 회장으로부터 넘겨받은 지분 중 절반을 스틱인베스트먼트 컨소시엄에 매각했다.
최근 정의선 부회장이 자신이 보유한 이노션 지분 전량을 매각하기로 결정하면서 정성이 고문은 이노션의 단독 최대주주가 됐다. 정 부회장은 지난달 이노션 보유 지분 40%를 MSPE와 SCPE가 구성한 컨소시엄에 매각하기로 합의했다.
이노션은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에서 비켜있기 때문에 정 고문의 이노션 상속은 쉽게 이루어졌다. 현대차그룹에서 이노션으로부터 출자를 받은 계열사와 이노션에 출자한 계열사는 없다. 이 때문에 정 부회장이 이노션 지분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정성이 고문의 이노션 상속은 사실상 끝났다.
◆ 이서현의 여장부 경영 vs. 정성이의 어머니 경영
두 재벌가 딸들이 제일기획과 이노션에 대해 전문경영인을 내세워 경영 실무를 맡도록 한 점은 똑같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경영참여방식은 달랐다. 이서현 사장이 제일기획에서 큰 그림을 그리며 굵직굵직한 업무를 주도했다면, 정성이 고문은 기업문화 조성과 인재발굴 및 육성, 프로젝트 수주 및 관리 등 세세한 면까지 여성적 리더십을 발휘했다.
이서현 사장이 2009년 제일기획 기획담당 임원으로 경영일선에 나서면서부터 제일기획은 글로벌 광고회사로 변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사장은 특히 현지화 전략을 강조하면서 글로벌 광고회사의 인수합병을 진두지휘했다. 이 사장은 2009년 미국 더바바리안그룹, 2012년 미국 맥키니와, 중국 브라보 등의 인수를 주도하면서 제일기획의 글로벌화를 이끌었다. 이 사장은 또 글로벌인재 양성을 위해 매년 경상이익의 7%를 임직원 교육비에 지출하는 통큰 투자를 결정했다.
제일기획이 지난해 칸 광고제에서 그랑프리(대상)를 포함해 모두 20개 부문에서 수상하자 이 사장의 글로벌전략이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는 말이 나왔다. 제일기획은 지난해 칸 광고제에서 그랑프리 1개 티타늄상 1개, 금상 4개, 은상 3개, 동상 11개 등 20개 부문에서 본상을 수상했다. 당시 제일기획은 직전년도 12개 부문 수상이라는 기록을 갈아치우는 동시에 국내광고 회사 가운데 최다부문 수상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이 사장의 성과는 제일기획의 매출성장에서도 확인된다. 이 사장이 제일기획에서 임원을 맡기 시작했던 2009년부터 2013년까지 매출은 2배 가량 증가해 2조천억 원 수준으로 성장했다. 또 이 사장이 주도했던 해외 광고회사 인수합병 실적도 좋았다. 제일기획의 해외거점은 2009년 34개국에서 2013년 39개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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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서현 삼성에버랜드 패션사업부문 사장 겸 제일기획 사장 |
이서현 사장이 제일기획에서 해외사업을 주도하며 바깥살림을 챙겼다면 정성이 고문은 이노션의 기업문화 개선과 인재발굴 및 육성, 프로젝트 수주 및 관리 등 안살림을 꾸렸다고 할 수 있다.
정 고문은 1985년 선두훈 코렌텍 대표와 결혼한 뒤 현대가의 여인들처럼 전업주부의 길을 걸었다. 선두훈 대표는 의사 출신으로 2000년 코렌텍을 창업하면서 사업가로 변신했다. 남편에 이어 정 고문도 전업주부에서 사업가로 전향한다.
정 고문은 2003년 정몽구 회장의 부름으로 20여년 동안의 전업주부 생활을 끝냈다. 당시 모친 이정화 여사와 함께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이사를 맡으며 경영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러다 2005년 이노션이 설립되면서 정 고문은 설립단계부터 적극 참여했다.
정 고문은 이노션에 사내식당과 카페를 만들어 직원들이 이용할 수 있게 했고 온돌방 형태의 회의실을 만들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직원복지 향상에 도움이 되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일한다면 직원들이 더욱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정 고문이 특히 신경을 쓰는 부분은 인재발굴과 육성이었다. 정 고문은 이노션 설립을 준비할 당시 박재범 초대 이노션 대표이사와 제일기획 연구소 소장 출신의 박재항 마케팅본부장을 직접 영입했다. 이 두 사람을 따라 광고인력들이 대거 이동해왔고 이 때문에 이노션은 단기간에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정 고문이 종종 신입사원 면접관을 맡는 것도 그의 인재중심 경영철학을 잘 보여 준다. 광고회사는 설비투자가 거의 없고 오로지 사람들이 내는 아이디어에서 이익을 창출한다. 이 때문에 정 고문은 이노션의 미래가 인재들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이노션은 업계 2위로 제일기획 뒤를 쫓고 있다. 그러나 이노션은 제일기획보다 생산성이 높다. 2012년 이노션의 1인당 취급액은 72억9945만 원으로 제일기획의 42억8606만 원을 웃돈다. 1인당 순이익도 이노션(1억6802만 원)이 제일기획(9629만 원)을 앞섰다. 후발회사로서 인력을 계획적으로 운영했을 뿐 아니라 그룹의 광고물량 지원도 컸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정 고문은 최근 현대기아차 신차발표회는 물론 해외모터쇼에도 빠짐없이 참석하는 등 경영실무를 꼼꼼히 챙기고 있다. 정 고문은 정의선 부회장의 지분정리로 명실상부 이노션의 오너가 된 만큼 안살림뿐 아니라 회사의 주요 사안들을 직접 처리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 이서현과 정성이가 풀어야 할 숙제
제일기획과 이노션은 국내 광고시장에서 2강체제를 형성하고 있다. 이노션은 그동안 제일기획과 격차를 좁혀왔지만 지난해 두 회사의 격차는 다시 벌어졌다. 일감 몰아주기 규제가 강화되면서 두 회사의 희비가 엇갈렸다.
한국광고협회에 따르면 2013년 국내 광고시장 전체 취급액은 14조1927억 원으로 전년과 비교해 0.6% 줄었다. 이런 가운데 제일기획의 취급액은 5조1981억 원으로 2% 증가했다. 하지만 이노션의 취급액은 3조7191억 원으로 4% 감소하면서 제일기획 따라잡기에 제동이 걸렸다.
이노션의 광고 취급액이 줄어든 것은 일감 나누기 때문이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7월 1200억 원 규모의 이노션 일감을 외부거래로 전환한다고 밝혔다. 그룹 이미지 광고와 기아차 광고 등을 독립광고회사에 배정했다.
현대차는 일정물량에 대해 이노션이 아예 프리젠테이션에 참여하지 못 하도록 했다. 이노션 전체 매출 중 40%가 내부거래를 통해 발생할 정도로 이노션의 그룹 의존도는 높다. 일감 몰아주기로 성장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에서 일감 나누기는 매출감소를 불러왔다.
반면 제일기획의 선전은 글로벌전략의 성공에 기인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제일기획은 내부거래 비중을 줄이기 위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광고주를 꾸준히 영입해온 탓에 일감 나누기에도 불구하고 실적방어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일기획의 내부거래 비중은 여전히 높은 편이다. 특히 제일기획의 해외부문 매출에서 삼성전자의 글로벌 마케팅 매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85~90%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행법상 해외계열사는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제일기획은 막대한 규모의 삼성전자 해외광고를 취급하면서 수익을 보전할 수 있었다.
제일기업과 이노션은 그동안 계열사 광고물량을 독식하면서 다른 광고회사들로부터 눈총을 받아왔다. 특히 제일기획과 이노션이 별도조직인 더사우스컴퍼니와 더캠페인랩을 설립하자 이제는 중소광고시장까지 넘본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일감 몰아주기 규제가 강화되면서 제일기획과 이노션은 다른 광고회사들과 상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면서도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독립 중소광회사들도 대기업 물량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라며 “대기업 계열 광고회사들도 이제 안주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쟁 영역을 찾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