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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준 포스코 회장이 지난 3월 서울 대치동 포스코센터 서관에서 열린 '제47회 정기주주총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사즉생(死則生). 죽기를 각오하면 살 수 있다는 뜻이다.
권오준 포스코 회장이 이 말을 자주 꺼낸다. 그만큼 권 회장이 포스코의 위기를 절박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포스코 임직원 모두 초심으로 돌아가 사즉생의 각오로 글로벌 경영위기를 극복하고 위대한 포스코(POSCO the Great)를 재건해 사랑받고 존경받는 기업으로 거듭나겠다.” 권 회장이 지난 12일 포항을 방문해 시민들에게 한 말이다.
권 회장이 이 말을 이번에 처음한 것은 아니다. 권 회장이 지난 5월 비상경영쇄신위원회를 만들며 모든 계열사 대표의 사표를 받을 당시 포스코는 “사즉생의 각오로 경영쇄신을 반드시 이뤄내겠다는 권 회장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즉생’은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휘하 장졸들에게 한 말이다. 곧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이 집약된 말이기도 하다.
지금 포스코의 위기는 권 회장이 지닌 리더십의 위기이기도 하다. 권 회장의 리더십 위기는 전병일 전 대우인터내셔널 사장의 ‘항명’과 ‘사임’ 과정에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권 회장은 리더십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까?
◆ 인사권 행사 주저하는 권오준
18일 재계에 따르면 권오준 회장은 대우인터내셔널 사태의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한 전병일 전 사장을 보좌역으로 내정했다. 전 전 사장은 대우인터내셔널이 추진해 온 사우디아라비아 국민차사업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
전 전 사장이 자진사퇴하면서 포스코와 대우인터내셔널의 갈등은 봉합됐다. 하지만 이번 일로 권 회장의 리더십은 크게 흠집이 났다.
권 회장은 최근 전 전 사장의 해임을 결정했다가 반발과 비판여론이 확산되자 하루 만에 이를 철회했다. 대신 언론보도에 대한 책임을 물어 홍보임원을 경질해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하는 꼴’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권 회장은 지난달 비상경영쇄신위원회를 만들며 계열사 대표이사들의 사표를 받았다.
하지만 이번 일로 당시 사표를 받은 일이 과연 ‘사즉생’의 의지냐는 말이 나돌고 있다. 권 회장이 경영쇄신 의지를 외부에 보여주기 위한 ‘이벤트’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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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청명 포스코 부사장 |
앞으로 권 회장이 인사권을 행사하는 데 적잖은 부담을 안게 될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대우인터내셔널 사태는 권 회장이 계열사 구조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언제든지 또 튀어나올 수 있다. 만약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권 회장이 결단력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대우인터내셔널 사태의 한 축인 조청명 부사장이 포스코플랜텍 대표이사로 내정된 데 대해서도 뒷말이 나온다.
권 회장이 조 부사장을 가치경영실장에서 물러나게 하면서 ‘읍참마속’을 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결국 그런 결단력은 빛이 바라고 말았다는 것이다.
◆ 포스코플랜텍, 원칙 없이 우왕좌왕
권오준 회장은 취임 직후부터 ‘철강 본원의 경쟁력을 찾겠다’는 원칙을 내놓았다. 권 회장은 포스코를 제외한 모든 계열사가 구조조정의 대상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하지만 권 회장은 포스코의 대표적 부실계열사인 포스코플랜텍을 놓고 원칙 없이 갈지자 행보를 보였다.
권 회장은 지난해 말 포스코플랜텍에 2900억 원을 지원했다. 이사회에서 일부 사외이사가 강하게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결국 유상증자를 결정했다. 권 회장이 포스코플랜텍은 반드시 살리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포스코플랜텍이 여러 차례 유상증자에도 경영정상화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어서 이런 결정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지적을 받았다. 권 회장이 구조조정 원칙을 스스로 어겼다는 말도 나돌았다.
그러나 권 회장은 몇 달 만에 포스코플랜텍에 대한 입장을 180도 바꿨다.
포스코플랜텍이 올해 1분기에도 700억 원이 넘는 당기순손실을 내자 권 회장은 포스코플랜텍에 추가 자금지원을 안 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 때문에 포스코플랜텍에 대한 추가 지원을 요구하는 금융권과 마찰을 빚었다.
권 회장은 포스코플랜텍에 포스코의 일감을 주는 ‘편법’으로 금융권을 설득했고 포스코플렌텍은 워크아웃 절차를 밟게 됐다.
권 회장이 포스코플랜텍에 대해 좀 더 빨리 결단을 내리지 못한 데 대해 포스코 안팎에서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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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준 회장이 지난해 10월 광양제철소에서 열린 4열연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 구조조정의 원칙에 대한 의문
권 회장이 잘 안 되는 사업만 매각하려 해 구조조정 자체가 지지부진해졌다는 비판도 나온다.
권 회장이 매각하겠다고 밝힌 부실자산은 매각이 거의 진행되지 않고 있다. 포스코가 지난해 7월 매각계획을 발표한 광양LNG(액화천연가스) 터미널은 1년 넘게 팔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권 회장이 구성원의 반발을 지나치게 의식하면서 구조조정을 진행한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구조조정은 원래 잘 안 되는 사업을 헐값에 파는 게 아니라 잘 나가는 사업을 웃돈을 받고 최대한 비싸게 파는 것”이라며 “권 회장이 일부 구성원의 반발을 무릅쓰고 잘 나가는 계열사를 매각했던 일부 경영자들과 달리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권 회장은 대우인터내셔널 미얀마가스전 매각에 대해서도 “경기가 아주 나빠져 포스코가 망할 지경에 처한다면 그 전에 방법을 찾아야 하고, 그에 대한 여러 가지 방안을 검토 중”이라며 “당장 매각하겠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얀마가스전 매각 문제는 전병일 사장이 자진사퇴하면서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상태다.
권 회장이 조청명 부사장을 가치경영실장으로 임명하고 포스코그룹의 구조조정을 맡긴 것부터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포스코 계열사 대표들이 대부분 조 부사장의 선배이다 보니 조 부사장이 마음껏 구조조정을 추진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 리더십 우려 현실화됐나
권 회장의 리더십에 대한 우려는 권 회장이 지난해 초 포스코 회장에 내정됐을 때부터 나왔다.
권 회장은 포항산업과학연구원, 포스코기술연구소 부소장, 기술연구소장, 기술총괄 사장 등을 거친 연구원 출신이다. 그러다보니 권 회장 리더십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나왔다.
연구원 출신인 만큼 포스코의 기술 경쟁력을 높이는 데 최적임자로 꼽혔다. 또 포스코 내부의 각종 정치싸움에 ‘빚이 없는’ 만큼 인적쇄신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받았다.
그러나 경영 경험이 없어 포스코가 안고 있는 각종 현안에 ‘강단있게’ 대응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도 존재했다. 계열사를 포함해 4만여 명에 이르는 거대조직을 이끌 만한 정치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염려였다.
권 회장은 이런 우려에 대해 “경영을 배우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권 회장은 가치경영실을 신설하고 기존 포스코에 몸담던 실세가 아닌 조청명 부사장을 가치경영실장에 임명해 인적쇄신과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하지만 권 회장은 그 뒤 보여준 인사에서 쇄신보다는 안정을 선택했다.
권 회장이 그동안 보여준 리더십은 ‘최고 기술전문가인 것은 분명하지만 최고 경영자가 될 수 있을지 미지수’라는 평가를 낳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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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준 포스코 회장(왼쪽)과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 9일 오후 서울 대치동 포스코센터 서관에서 열린 제16회 철의날 기념식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
◆ 검찰수사에 더욱 흔들린 권오준 리더십
검찰수사가 장기화하는 점도 권 회장의 리더십을 흔들고 있다.
포스코건설에서 시작된 비자금 수사가 포스코그룹 전체로 번지며 벌써 3개월째 포스코그룹을 흔들어 대고 있다.
권 회장은 이 과정에서 검찰수사로 흔들리는 포스코그룹을 다잡는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권 회장이 정권과 연이 없는 만큼 역대 포스코 회장 가운데 가장 정권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며 “정권의 전폭적 지원이나 포스코 임직원들의 지지를 받으며 특유의 결단력을 보여줬던 역대 회장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특히 권 회장 스스로 검찰수사가 자신의 거취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검찰수사로 흔들리는 포스코그룹의 조직장악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대우인터내셔널에서 벌어진 ‘항명’도 이런 분위기 속에 터져나왔다.
◆ 포스코 리더십 회복할 수 있을까
권 회장이 리더십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기회는 아직 남아있다.
권 회장은 포스코와 대우인터내셔널의 갈등이 어느 정도 수습된 만큼 경영쇄신에 더욱 힘쓸 것으로 전망된다. 권 회장은 늦어도 7월 초까지 비영경영쇄신위원회를 통해 강력한 쇄신안을 내놓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쇄신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권 회장이 이제부터라도 과감한 결단력을 보여줄 때 리더십 위기를 기회로 바꿔놓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권 회장이 포스코의 고질적 병폐로 꼽히는 순혈주의를 바꿔낼 수 있을지도 주목된다.
대우인터내셔널 사태도 결국 포스코의 순혈주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시각도 있다. 포스코의 외형을 키운 포스코의 기존 경영진과 권 회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경영진 간 다툼으로 빚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권 회장도 취임 때부터 포스코의 순혈주의를 없애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했다. 권 회장은 취임 당시 “시대에 뒤떨어진 순혈주의를 과감히 내던지겠다”고 강조했다.
비상경영쇄신위원회도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로 순혈주의를 지목했다. 권 회장이 지난해 취임과 동시에 단독대표 체제로 전환하고 회장 직속으로 가치경영실을 신설하는 등 회장의 권한을 강화한 것도 고질적 기업문화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권 회장이 기존 포스코 내부의 정치싸움과 무관한 연구원 출신으로 빚이 없다는 강점을 얼마나 살려내 인적쇄신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리더십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를 가르는 열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조은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