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웨이가 미국 정부의 반도체 장비 규제를 우회할 잠재력이 있는 신기술을 공개했다. 인공지능 반도체의 성능 한계를 넘어 엔비디아 제품을 대체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기술이다. 화웨이 '어센드' 인공지능 반도체 시스템 전시장 사진. <연합뉴스>
미국과 정상회담을 계기로 중국 정부가 반도체 자급체제 구축 역량을 과시하며 엔비디아를 비롯한 해외 기업에 의존을 낮추는데 더욱 속도를 내겠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 화웨이 신기술로 ‘1.4나노 수준’ 반도체 자체 상용화 목표
중국 관영매체 차이나데일리는 26일 “화웨이의 기술 로드맵은 미국의 첨단 반도체 장비 규제를 피해 대안을 찾으려는 중국의 노력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화웨이는 25일 중국 상하이에서 기술 콘퍼런스를 열고 새로운 개발 체계를 도입해 2031년까지 1.4나노 미세공정 수준의 반도체 성능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공개했다.
반도체 트랜지스터를 소형화하는 기존의 미세공정 반도체 개발 방식에 의존하는 대신 회로와 시스템 전반에서 데이터가 전달되는 시간을 줄이는 데 집중하는 방식을 사용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화웨이는 "‘타우 스케일링’으로 이름붙은 해당 신기술을 기반으로 모두 381종의 반도체를 설계했다"며 "이 기술이 스마트폰과 인공지능(AI) 연산 등 폭넓은 분야에 활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2026년 하반기 중 화웨이가 자체 개발한 고사양 스마트폰 프로세서도 타우 스케일링 기술을 적용해 상용화를 앞두고 있다.
차이나데일리는 “반도체 업계 전문가들은 중국이 기존의 방식으로는 1.4나노 수준 기술을 확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며 “하지만 타우 스케일링 기술이 성공적으로 적용된다면 반도체 장비의 한계를 넘어 성능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미국은 현재 중국이 네덜란드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수입할 수 없도록 규제하고 있다. EUV는 7나노 미만 미세공정 반도체 생산에 현재 필수로 쓰인다.
하지만 화웨이가 이를 우회할 수 있는 기술로 1.4나노 반도체 수준의 성능을 구현하는 데 성공화되면 미국의 반도체 장비 규제를 사실상 무력화할 잠재력이 있다.
차이나데일리는 반도체 파운드리 1위 기업인 대만 TSMC가 2028년부터 1.4나노급 미세공정 반도체 양산을 계획하고 있는 만큼 화웨이가 TSMC와 직접 경쟁이 가능할 정도의 공격적 목표를 수립했다고 평가했다.
▲ 중국 기술 박람회에 전시된 반도체 웨이퍼 사진. <연합뉴스>
중국은 이미 화웨이를 포함한 자국 기업의 반도체로 인공지능 기술 발전에 성과를 내고 있다는 시각이 나온다.
이와 관련해 차이나데일리는 중국 인공지능 스타트업 딥시크가 발표한 최신 V4 모델이 화웨이 ‘어센드’ 시리즈 반도체를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와 동등한 하드웨어 체계로 활용한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엔비디아 제품 대신 화웨이 인공지능 반도체를 활용해도 인공지능 모델 학습 및 구동에 차질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했다는 의미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화웨이 인공지능 반도체는 이미 엔비디아가 중국 시장에 판매하던 보급형 H20 시리즈 제품과 필적하는 성능을 구현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중국 빅테크 업체를 비롯한 인공지능 기업들이 엔비디아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 생태계에 의존하고 있어 단기간에 자국산 제품으로 이를 대체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딥시크가 최신 인공지능 모델에 화웨이 반도체를 비교적 손쉽게 도입할 수 있도록 하며 본격적으로 고객사 기반을 확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셈이다.
차이나데일리는 “해외 첨단 반도체 조달이 어려워지자 중국에서 자국산 인공지능 반도체 도입이 가속화되고 있다”며 “중국 기업들은 반도체 소재와 패키징, 장비 등 공급망 전반에서도 점차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고 덧붙였다.
중국이 이르면 2027년부터 인공지능 GPU 시장에서 국산화율 50%를 달성할 것이라는 증권사 모간스탠리의 예측도 제시됐다.
타우 스케일링 기술로 1.4나노 수준의 반도체도 구현이 가능해진다면 화웨이 제품의 성능을 한층 더 끌어올릴 잠재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블룸버그는 자체 조사기관 블룸버그인텔리전스 분석을 인용해 “화웨이의 신기술이 완전히 상용화되면 중국의 인공지능 반도체 성능 향상에 기여할 수 있다”며 “중국 IT기업들이 엔비디아 반도체 수입 규제에도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 화웨이 반도체 신기술 '타우 스케일링'의 의미. <그래픽 챗GPT 제작>
블룸버그는 수 년째 이어진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기술 규제가 중국 인공지능 산업의 발전 속도를 어느 정도 둔화시켰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화웨이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반도체 자급체제 구축 노력이 더 활발해지는 계기로 작용했다고 덧붙였다.
화웨이가 타우 스케일링 기술로 미국의 규제 조치에 핵심인 첨단 미세공정 반도체 기술을 자체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된다면 미국의 전략은 결국 실패로 평가될 공산이 크다.
투자기관 헤지아이 리스크매니지먼트의 펠릭스 왕 책임자는 “화웨이가 기술 혁신을 이뤄내는 데 성공한다면 TSMC나 인텔과 기술 격차를 상당 부분 좁힐 수 있다”며 “중국의 반도체 자급체제 구축 시도를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블룸버그에 전했다.
중국의 반도체 기술 성과는 지난 14~15일 열린 미중 정상회담 뒤 더욱 뚜렷하게 확인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엔비디아 고성능 반도체 H200의 중국 수출을 승인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에서 이를 허용하지 않아 2025년 말부터 현재까지 사실상 판매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정상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중국은 자체 기술 개발을 원하고 있어 엔비디아 반도체를 구매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엔비디아도 20일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서 향후 매출 전망치에 중국 실적을 반영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최소한 수 개월 안에는 수입 허가가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한다는 뜻이다.
뉴욕타임스는 “중국 기업들은 이제 정부의 수입 허가를 기다리는 대신 자국 공급망 기반의 인공지능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다”며 “이는 중국 당국에서 바라고 있는 일”이라고 전했다.
화웨이가 미중 정상회담 뒤 얼마 지나지 않아 1.4나노 수준의 반도체 개발 목표를 내놓은 점도 이런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중국이 인공지능 반도체 자급체제 구축에 분명한 자신감을 찾았다는 뜻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마저도 미국을 겨냥한 중국 정부의 협상카드에 해당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싱크탱크 메르카토르 중국연구소의 웬디 창 연구원은 뉴욕타임스에 “엔비디아는 중국 시장을 여전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며 “이는 중국 정부가 미국에 더 큰 양보를 이끌어내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고 전했다.
창 연구원은 중국 정부가 미국에서 더 성능이 높은 엔비디아 반도체 수입 권한을 확보하기 위해 화웨이의 반도체 기술력을 과시하며 협상력을 더욱 키우는 전략을 쓰고 있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