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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 금융 허브의 심장부인 싱가포르 래플스플레이스 일대에는 높은 빌딩들이 들어서 있다. 현재 이곳에는 한국 은행과 증권사를 포함해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600여 개의 대형 금융기관 및 글로벌 자산운용사들이 밀집해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싱가포르관광청>
싱가포르가 단순 동남아 거점을 넘어 아시아·태평양 사업을 연결하는 금융 허브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등 동남아뿐 아니라 한국, 인도, 홍콩 등을 오가며 글로벌 기업·투자자 미팅을 이어간다.
이에 현지에 진출한 주요 은행의 싱가포르 지점장들은 아시아지역본부장 등을 겸임하며 아시아·태평양 사업을 총괄하는 경우가 많다.
싱가포르는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서구권 선진시장과는 또 다르다.
달러 중심의 글로벌 자본시장 인프라와 낮은 세율, 풍부한 글로벌 유동성, 영어 중심의 생활과 비즈니스 환경을 갖춘 선진 금융시장이면서도 같은 아시아 문화권에 속해 국내 은행에 차별화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홍콩의 중국 반환 뒤 싱가포르의 아시아 금융허브 역할이 더욱 강화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싱가포르는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 아시아 금융허브 역할이 더욱 커졌을 뿐 아니라 세계 최대 인구를 보유한 인도 시장까지 연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략적 요충지로 떠오르고 있다”며 “한국 금융사 입장에서도 아시아 전반의 네트워크와 글로벌 사업을 확장할 수 있는 중요한 거점”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는 한국에서 비행기로 약 6시간 거리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이 작은 도시국가가 국내 은행권의 새로운 글로벌 거점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28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우리·하나 등 4대 시중은행과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까지 모두 6개의 국내 은행이 지점과 현지법인 형태로 싱가포르에 진출해 있다.
이들은 싱가포르 금융지구 중심인 마리나베이와 래플스플레이스 일대에서 글로벌 금융기관과 경쟁하며 투자금융과 자본시장 사업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주목할 점은 현지 사업 전략이다.
국내 은행들은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신흥국 시장에서는 현지 진출 국내기업과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이자이익 중심의 대출사업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선진 금융시장’으로 분류되는 싱가포르는 같은 아세안 국가임에도 국내 은행에 베트남, 인도네시아와 전혀 다른 생존 공식을 요구하고 있다.
▲ 싱가포르는 단순한 금융 허브를 넘어 지정학적 이점과 고도화된 항만 인프라를 바탕으로 물류·무역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싱가포르 해상 교역의 한 축을 담당하는 마리나 베이 남단 모습. <싱가포르관광청>
28건의 자유무역협정(FTA)을 바탕으로 글로벌 교역 허브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다국적 기업들의 아시아·태평양 지역본부가 몰려 있다. 별도의 경제특구 없이 나라 전체가 하나의 자유무역지대다.
글로벌 기업과 자금, 물류가 집중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업금융(CIB)과 무역금융, 외환,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 기업 대상 금융시장 규모가 커졌다.
최근에는 반도체와 바이오, 첨단 제조업 투자도 빠르게 확대되며 글로벌 공급망 허브 역할도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 은행의 현지 사업 모델 역시 단순 대출 영업을 넘어 신디케이트론과 인수금융, 프로젝트파이낸싱(PF), 파생상품, 자산관리(WM) 등 고부가 투자금융이 주를 이룬다.
4대 시중은행 가운데 싱가포르에 가장 먼저 진출한 곳은 하나은행이다.
하나은행은 외환은행 시절인 1973년 싱가포르에 진출했다. 현재는 아시아지역본부와 IB센터 등을 중심으로 현지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한국 은행 가운데 유일하게 싱가포르달러(SGD) 결제망과 소매(리테일)금융 창구를 운영하며 차별화에 나서고 있다.
우리은행은 1980년 싱가포르에 진출한 뒤 기업금융과 투자금융 확대에 힘을 싣고 있다. 최근에는 기존 기업대출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항공기·선박금융과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으로 포트폴리오 다변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신한은행도 싱가포르를 무대로 투자금융 영토를 적극 넓히고 있다. 현지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한국 기술기업과 동남아 벤처캐피털(VC), 글로벌 자본을 연결하는 투자 허브 역할 강화에 공을 들이고 있다. 스타트업 육성과 글로벌 네트워크 연결을 통해 생산적금융 확대에도 힘을 싣고 있다.
KB국민은행은 2022년, 4대 은행 가운데 가장 늦게 싱가포르에 진출했지만 공격적으로 투자금융 역량 강화에 나서고 있다. 2022년 싱가포르 지점을 설립한 뒤 홍콩에 있던 아시아심사센터를 이전했고 현지에 진출한 국내외 기업들을 대상으로 기업금융과 자본시장 사업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KB금융그룹 차원의 ‘KB 글로벌 핀테크랩’도 싱가포르에서 운영하면서 KB스타터스 기업들의 동남아 진출과 글로벌 네트워크 확대를 지원하고 있다.
▲ 2022년 1월19일 싱가포르 래플스호텔에서 열린 KB국민은행 싱가포르지점 개점식에서 (왼쪽부터) 이창배 GS칼텍스 싱가포르법인장, 정동욱 KB국민은행 싱가포르지점장, 최훈 주싱가포르한국대사관 대사, 니콜라스 마르퀴에 IFC 싱가포르 대표, 라이너스 고 OCBC 부행장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KB국민은행 >
한국수출입은행은 싱가포르 법인을 중동과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연결하는 정책금융 허브로 운영하고 있다. 기술보증기금은 2025년 6월 첫 해외 지점을 싱가포르에 열고 국내 중소·벤처기업의 동남아 진출과 기술사업화 금융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산업은행 역시 최근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 산하 자산운용그룹 세비오라(Seviora)와 투자 협력 업무협약(MOU)을 맺으면서 첨단산업 투자 협력 확대에 나섰다.
싱가포르 금융시장의 또 다른 강점은 기업금융과 투자금융뿐 아니라 자산관리(WM) 시장까지 함께 발달해 있다는 점이다.
자산운용업계의 한 관계자는 “싱가포르에서는 패밀리오피스 등 고액자산가 대상 자산관리 사업이 매우 발달해 있다”며 “은행권 역시 기업금융과 함께 자산관리·자산운용 사업을 핵심 축 가운데 하나로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기회가 많은 만큼 싱가포르에서 경쟁력 강화를 노리는 곳은 국내 은행뿐이 아니다.
싱가포르개발은행(DBS), 싱가포르화교은행(OCBC)와 같은 현지 대형은행은 물론 씨티은행, 스탠다드차타드 등 글로벌 투자은행은 이미 싱가포르 내에서 단단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
이에 국내 은행들은 싱가포르에서 강도 높은 경쟁을 펼쳐야 한다.
한 차원 높은 규제 역시 싱가포르에 진출한 국내 은행들이 극복해야 할 요인으로 꼽힌다.
싱가포르는 금융시장 개방도가 높은 대신 내부통제와 자금세탁방지(AML), 리스크 관리 기준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엄격한 곳으로 평가된다.
이에 국내 은행들은 싱가포르에서 투자금융과 자산운용 영토를 넓혀갈수록 글로벌 기준에 맞는 내부통제 강화를 동시에 추진할 수밖에 없다.
국내 은행들은 싱가포르에서 소매와 담보대출 중심의 해외 영업을 넘어, 글로벌 규제 수준에 걸맞은 투자은행으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 있는 셈이다. 박혜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