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이란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가능성이 커지면서 유가 급등, 운송비 인상 등의 영향으로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국내 주요 기업의 수출에 '경고등'이 켜졌다.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호르무즈 해협이 막혀 국제 유가가 치솟으면 정유, 석유화학뿐만 아니라 반도체, 철강 등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하는 산업도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 해운과 항공 운임 인상이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수출 기업의 비용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최근 미국 관세 불확실성도 커진 상황에서 중동의 지정학적 리스크 확대는 국내 기업의 수출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팽배해지고 있다.
3일 관련 업계 취재를 종합하면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을 받은 이란의 군사 보복이 예상을 넘어서는 것으로 파악되면서,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장기화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로이터 등에 따르면 에브라힘 자바리 이란 혁명수비대(IRGC) 소장은 2일(현지시각) 이란ISNA통신을 통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려는 모든 선박을 불태우겠다"며 "이 지역에서 단 한 방울의 석유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호르무즈 해협은 페르시아만 입구에 위치한 중동의 전략적 요충지로, 전 세계 해상 원유 수송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곳이다. 한국은 원유의 70.7%, 액화천연가스(LNG)의 20.4%를 중동에서 들여오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의 현실화 가능성에 2일 ICE선물거래소에서 5월 인도분 브렌트유 선물 종가는 배럴당 77.74달러로 전 거래일 대비 6.7% 상승했다. 장 중 한 때 브렌트유 선물은 배럴당 82.37달러로, 지난해 1월 이후 1년 여만에 최고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영국 투자은행 바클레이즈는 "호르무즈 해협 상황은 유동적이고, 혼란이 지속된다면 브렌트유 가격은 배럴당 10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며 "유가가 10% 상승하면 달러가 0.5~1.0% 강세를 보여, 글로벌 금융 여건이 제약되고 신흥국 수입 수요가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국제유가 상승은 정유, 석유화학 산업뿐 아니라 반도체(삼성전자 SK하이닉스), 철강(포스코) 등 막대한 전력을 소모하는 기업들의 제조원가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최근 국제 유가가 60달러 초반대까지 떨어지면서 산업계에서는 전기요금을 인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으나, 이번 사태로 오히려 요금 인상 가능성이 커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산업용 전기요금은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7차례에 걸쳐 70%가량 인상됐다.
일각에서는 유가 상승에 따른 글로벌 전력 단가 인상이 장기적으로 이어질 경우, 빅테크 등 IT 기업들의 글로벌 기업들의 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가 더 보수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AI 데이터센터는 '전력 먹는 하마'로, 유가가 오르면 화석 연료 기반의 발전 단가가 상승하는 만큼, 전기요금 인상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생산하는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AI 반도체 수출에 직격탄이 될 수 있는 요인으로 꼽힌다.
황산해 LS증권 연구원은 "중동의 불확실성은 빅테크와 AI 투자 사이클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며 "지난 1일 아랍에미리트(UAE) 내 아마존웹서비스(AWS) 데이터센터 인근에서 낙하물로 인한 화재 발생은 중동의 AI 투자와 반도체 주문이 위축될 수 있는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 삼성전자와 LG전자, 현대차그룹, 포스코 등 국내 주요 기업들은 중동 긴장 고조로 해운과 항공 운임 상승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선박이 우회경로로 선회할 경우 해상 운임은 50~80%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운송기간도 3~5일 가량 더 늘어날 것으로 분석됐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생산하는 가전과 TV, 현대자동차그룹의 자동차, 포스코의 철강 제품은 무거운 만큼, 해상 운송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LG전자는 지난 2024년 이란의 지원을 받는 예멘 후티 반군의 공격으로 발생한 '홍해 리스크'로 2023년 대비 16.7% 늘어난 3조1110억 원의 물류비를 지출하기도 했다.
스마트폰 공급망에도 '비상'이 걸렸다.
세계 스마트폰 출하량의 대부분은 항공 운송을 통해 이동하는데, 중동 위기가 장기화되면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 전반의 항공 노선, 운영 비용, 재고 계획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중동 전쟁은 이미 메모리 가격 상승으로 부담이 가중된 스마트폰 공급망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며 "유가 상승은 연료 가격 상승, 나아가 운송비 증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국내 주요 기업은 미국 관세 리스크도 안고 있는 만큼 고유가, 고운임에 더 취약해진 상황이다.
미국 무역확장법 232조로 자동차에는 15%, 철강에는 50%의 관세가 적용되고 있는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 국회의 대미투자특별법안 처리 지연을 이유로 자동차 품목 관세를 25%로 재인상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만약 자동차 25% 관세가 현실화된다면, 현대차그룹의 연간 관세 부담은 10조 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가전 업계도 15%의 보편 관세를 받고 있으며, 냉장고·세탁기 등에 사용되는 철강·알루미늄은 파생 관세(50%)가 적용되고 있다.
반도체는 아직 품목 관세율이 정해지지 않았는데, 트럼프 행정부가 향후 관세 체계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반도체에 선별적으로 고율의 관세를 적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경제 6단체는 이날 공동 입장문을 통해 "최근 미국 연방대법원의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 위법 판결로 통상 환경 불확실성이 고조되고 있다"며 "이번 판결을 계기로 미국은 대체법 등을 활용해 기존 관세정책 방향은 유지하면서도 추가로 특정 국가·품목에는 선별적 관세를 부과할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나병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