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의 마음] 나에게는 '인류애 폴더'가 있다

▲ 별것 아닌 말 한마디와 작은 서비스 하나, 타인을 배려하는 조심스러운 움직임 같은 것들은 비장하지는 않지만 하찮지도 않다. <연합뉴스> 

[비즈니스포스트] 나의 스마트폰 안에는 ‘인류애’라는 이름의 폴더가 있다. 나는 거기에 때때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마주치는 사진, 소위 말해 ‘짤’을 하나씩 저장한다.

그 사진들의 내용은 이런 것들이다.

매일 전화로 단골 밥집에 식사를 주문하던 사람이, 어느 날 좋지 않은 일이 있어 밤새 울다가 평소처럼 주문을 했더니 사장님에게서 장문의 위로 문자와 함께 미숫가루 서비스를 받았다는 이야기. 그 문자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삶은 작은 기쁨으로 큰 아픔을 잊으면서 사는 거지요.”

또는 어떤 수업의 교수님이 언제부턴가 매번 지각하고, 수업을 서둘러 마치고 급하게 사라지는 바람에 학생들이 좋지 않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암 선고를 받은 뒤 항암치료를 받으며 수업을 이어가고 있었다는 이야기. 물론 어떤 사정이 있다고 해서 지각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람에게는 바깥에서 보이는 태도만으로는 알 수 없는 사정이 있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집안 식구 중 누군가 낮잠을 잘 때의 분위기를 좋아한다는 짧은 글도 들어 있다. 그 잠을 깨우지 않으려 조심히 움직이는 주변 사람들, 낮아진 말소리,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 고르게 들리는 숨소리 같은 것들이 좋다고 적은 단상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얘기하고 싶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붙은 시를 찍은 사진이다. 사진을 찍은 이의 마음을 특히 움직인 구절은 이것이었다. “나는 불행 중 수많은 다행으로 자랐다.” 그 표현 앞에서 일렁였을 누군가를 상상하게 하는 사진이었다.

몇 년 전부터인가, 나는 이런 것들을 모아두기 위해 폴더를 만들었다. 그리고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저장했다.

폴더 이름을 인류애라고 붙인 것은, 스스로에게 인류애를 일깨우고 싶을 때 보기 위해서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에게는 사람을 지치게 하는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어서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인류애가 닳아 없어지는 느낌이 들 때면 그 폴더를 열어본다.

인류애가 조금씩 깎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은 거창한 사건 뿐만 아니라, 일상에도 얼마든지 있다. 나는 주로 도시의 익명성이 주는 서늘함을 느낄 때 그 폴더를 연다.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 서로가 서로를 사람이라기보다 통행을 방해하는 짐이나 불쾌한 소음처럼 대하는 표정들을 마주할 때, 누군가에게서 이유 없는 불친절을 겪을 때, 누구도 특별히 나쁜 사람은 아닌데, 각자의 사정으로 예민해진 사람들이 서로에게 괜히 모질어지는 장면을 볼 때가 특히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도시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내가 도시에 살 수밖에 없는 체질의 인간이라는 것을 안다. 나에게 아주 끈끈한 몇 명의 사람만 있으면, 그 밖의 사람들과는 서로에게 적당히 무관심한 것이 좋고 오히려 편하다. 편의점과 지하철과 배달과 병원과 미술관과 카페가 가까이 있는 삶도 사랑한다. 때로는 아무도 나를 모르고, 나 역시 아무도 모르는 상태가 주는 편안함이 있다.

다만 그러다보면 비타민이나 미네랄처럼, 부족해지면 은근히 티가 나는 마음의 미량영양소 같은 성분이 고갈된다고 느낄 때가 있는 것 같다. 타인의 다정함을 기대하는 일이 순진한 일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라든가, '세상은 원래 그런 거지' 하면서 너무 빨리 체념하게 되는 마음을 가지려고 할 때가 그렇다. 

나는 아마 그 성분을 보충하기 위해 짤을 모았던 것 같다. 처음부터 그런 의식적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아놓고 보니 공통점이 보였다. 그 사진들은 대단한 희생이나 눈물겨운 헌신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자신을 전부 베어내면서까지 누군가를 구하는 내용도 아니었다. 다만 사람들이 서로를 아주 조금 덜 외롭게 만든 순간들이었다. 별것 아닌 말 한마디와 작은 서비스 하나, 타인을 배려하는 조심스러운 움직임 같은 것들은 비장하지는 않지만, 하찮지도 않다. 

그러니까 나의 이 폴더는 일종의 ‘정서조절 전략’이다. 마음이 흔들릴 때 꺼내볼 수 있는 작은 대처 자원을 미리 모아두는 일이다. 우리는 기분이 괜찮을 때에는 세상에 따뜻한 장면들이 있다는 사실을 비교적 쉽게 기억하지만, 마음이 지친 날에는 그런 기억에 잘 접근하지 못한다. 그래서 마음이 괜찮을 때 작은 증거들을 모아두었다가, 마음이 덜 괜찮은 날 다시 꺼내보는 것이다.

이런 마음의 비상식량은 컨디션이 비교적 좋을 때 조금씩 모아두는 편이 좋다. 감기 기운이 심해진 뒤에야 죽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보다 평소에 하나쯤 미리 사두는 편이 나은 것처럼 말이다.  

당신에게도 이런 작은 비상식량이 있었으면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웃긴 동물 영상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을 다정하게 대해준 사람들에게서 받은 문자메시지일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고통스러웠지만 결국 지나가고 괜찮아졌던 날의 일기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세상에 이렇게 따뜻한 사람이 있구나” 싶게 만드는 뉴스 기사일 수도 있다.

지금 스마트폰을 열어서 자신만의 폴더 하나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제목은 무엇이어도 좋다.

‘세상 모든 것에 빡칠 때 열어보기’ 정도도 괜찮을 것 같다. 반유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고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여성학협동과정 석사를 수료했다. 광화문에서 진료하면서, 개인이 스스로를 잘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친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책 '여자들을 위한 심리학', '언니의 상담실', '출근길 심리학'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