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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
김승연(62) 한화그룹 회장은 극과 극으로 엇갈리는 평가를 받는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경영성과에 걸맞는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는 게 맞다. 29살의 어린 나이에 창업주 김종회가 갑작스럽게 숨지면서 회사를 물려받아 매출을 40배나 키워놓은 것은 결코 낮게 볼 수 없다.
김 회장이 1981년 한화그룹 회장으로 취임할 때 한화의 매출은 1조 원 수준이었다. 그러나 지금 한화는 40조 원 매출을 넘보고 영업이익은 1조 원대에 안착했다. 자산기준으로 재계 서열 9~10위를 차지할 수준으로 한화는 성장했다.
그런데도 김 회장 하면 어두운 이미지가 덧칠돼 있다. ‘아들 보복폭행’ 탓이 크다. 2007년 차남이 술집에서 종업원과 시비 끝에 매를 맞자 경호원들을 데리고 가서 그 종업원을 직접 두드려 팼다.
김 회장은 이 일로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내가 너무 감정이 북받쳐서 남자로서 사과를 받게 한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일이 잘못돼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면서 "후회스럽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지난해 개봉된 영화 ‘전설의 주먹’에서 임원에게 몽둥이를 휘두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김 회장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많은 것도 이 사건 때문이다.
하지만 김 회장을 잘 아는 사람들의 평가는 다르다. 긍정적으로 김 회장을 보는 사람들이 많다.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얼마전 언론과 인터뷰에서 “김 회장은 밖에서 나쁘게만 보지만 겪어보니까 의리가 대단하고 인간적으로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김 회장 집에 가면 명절이든 아니든 아들들을 다 불러 항상 큰 절을 하게 한다”고 덧붙였다.
김 회장이 돌아왔다. 지난 2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고 풀려났다. 그리고 곧바로 한화를 비롯해 한화케미칼 한화건설 등 모든 계열사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밝혔다. 최근 주총에서 그 약속을 지켰다. 김 회장이 다시 돌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회장 직함을 제외하고 계열사에서 모두 물러난 만큼 ‘절반의 복귀’가 맞는 말일 것이다.
◆ 의리의 김승연이 선택한 원로 비상경영
김 회장이 풀려나면서 한화그룹 안팎의 시선은 김 회장 부재 때 구축된 원로 중심의 비상경영위원회가 얼마나 계속될 것인가로 모아진다.
한화는 지난 4월 김연배 한화투자증권 부회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홍기준 한화케미칼 부회장이 제조 부문을, 홍원기 한화호텔앤드리조트 사장이 서비스 부문을 각각 맡는 비상경영위원회를 만들어 그룹을 운영해 왔다. 홍원기 사장은 김 회장과 동갑이고, 나머지는 모두 김 회장보다 나이가 많다. 김 위원장은 올해 칠순이다. 모두 대학 졸업 후 한화그룹에 입사해 30~40년 동안 한화에서 잔뼈가 굵어온 ‘한화맨’들이다.
김 회장이 비상경영체제로 ‘원로 경영’을 선택한 데는 역시 김 회장의 ‘의리 경영’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장남 김동관씨가 31살로 아직 젊은 상황에서 원로들을 경영 일선에 배치한 것은 역시 ‘의리의 김승연’다운 선택이었다는 얘기다. 비상경영위원회는 1952년 한화가 창사한 이후 처음 경험한 경영체제였다.
김 회장의 의리는 이미 유명하다. 그룹 경영 뿐만 아니라 회사 밖 활동에서도 김 회장의 의리는 잘 드러난다.
김 회장은 2010년 천안함 사태 관련 유가족을 우선 채용하겠다고 밝혔고 7명을 채용하는 등 그 약속을 지켰다.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2012년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한화가 대신 해주었다”고 감사패를 전했다. 1997년 국가기밀을 유출했다는 혐의로 미국 연방교도소에 수감됐던 로버트 김에게 수년 동안 생활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1998년 경향신문을 소유하고 있을 때 노조위원장 출신의 사회부장이 숨지자 빈소를 찾아가 8시간이나 지키며 고인의 장남에게 “아버지가 해야만 하는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나를 찾아오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1998년 그룹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한화에너지를 현대정유에 매각하는 과정에서도 “돈을 덜 받아도 좋으니 근로자들을 해고하지 않는 조건으로 신속하게 매각작업을 추진해 달라”고 주문했다. 2013년 2천명이 넘는 비정규직 직원을 한꺼번에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비상경영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 3명의 CEO도 모두 김 회장과 의리로 굳게 연결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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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배 비상경영위원장 겸 한화증권 부회장 |
김연배 부회장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1999년 9월까지 한화그룹 비서실 및 구조조정위원회의 재무팀장, 2002년 11월까지 한화그룹 구조조정본부 본부장으로 일했다. 한화그룹의 구조조정은 김 부회장의 손을 거쳤다. 2002년 12월부터 한화증권 부회장직을 맡고 있다. 한화증권으로 옮긴 이유는 대한생명과 한화증권을 묶어 향후 금융부분을 그룹의 중심으로 세워달라는 김 회장의 뜻이 담겨있다.
김 부회장은 대한생명 인수작업을 진두지휘했고 그 때문에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김 부회장은 2002년 12월 대한생명 인수를 위한 컨소시엄 참여사인 맥쿼리생명에 300억여 원을 빌려주고 형식적으로 컨소시엄에 참가토록 해 공정한 입찰을 방해한 혐의를 받았다. 또 당시 전윤철 경제부총리에게 뇌물을 전달하려 한 혐의도 받았다. 김 부회장은 당시 대한생명 인수 로비와 관련해 “혼자서 한 일”이라고 김 회장을 보호하기 위해 애를 썼다.
김 회장의 김 부회장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김 부회장은 2005년~2006년 복역기간 중에도 매월 3천만 원의 급여를 지급받고, 복역 후에 김 회장으로부터 12억 원 상당의 주식을 증여 받았고, 현재까지 매월 5천만 원의 급여를 받고 있다.” 검찰의 수사보고서에 나온 내용이다. 김 회장은 2007년 초 1만여 명의 한화 임직원들에게 김 부회장이 쓴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에 대한 독후감을 전원 제출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제조 부문을 맡은 홍기준 한화케미칼 부회장은 세계 4위 태양광업체인 중국 솔라펀을 인수한 주역이다. 태양광은 김 회장이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 분야다. 솔라펀 인수는 당시 M&A업계에서도 이례적이라 평가했다. 통상 일러야 6개월이 걸리는 M&A를 3개월 만에 해치웠다. 홍 부회장은 솔라펀 인수에 대한 공을 모두 김 회장에게 돌렸다.
홍 부회장은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1975년 경인에너지에 입사해 1994년 한화에너지 기획 실장, 2001년에 한화종합에너지 대표이사, 2009년 한화케미칼 대표이사를 맡은 정통 한화맨이다. 한화케미칼은 홍 부회장이 대표이사를 맡은 해 매출 3조337억 원과 영업이익 4108억 원으로 사상 최고의 실적을 거두기도 했다.
서비스 부문을 맡은 홍원기 한화호텔앤리조트 사장은 2007년 부실했던 한화기계㈜를 되살려 김 회장의 신임을 얻었다. 홍 사장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77년 한화테크엠에 입사해 1999년 그룹 감사실장, 한화테크엠 대표 등을 거쳐 2007년 한화호텔리조트 대표이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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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기준 한화케미칼 부회장 |
김 부회장을 중심으로 한 비상경영위원회는 원로들인데도 불구하고 김 회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부회장은 비상경영위원장이 된 뒤 이라크 중국 일본 등 해외 현장을 누비며 해외건설과 태양광사업 등 그룹의 주요 사업들을 집중적으로 점검했다. 또 일주일에 한번씩 국내 공장들을 찾아 조직의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휴가도 자진 반납했다.
그러나 비상경영위원회 성적은 그다지 신통치 않다. 지난해 3분기까지 한화그룹의 매출은 28조3470억 원으로 전년 동기 26조5470억 원에 비교하면 6.8% 늘어났다. 그러나 영업이익은 8990억 원으로 전년도 같은 기간 1조2480억 원과 비교해 28%나 줄어들었다. 특히 주력기업인 한화케미칼의 경우 2012년 1천억 원의 손실을 낸 데 이어 지난해에도 같은 수준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 힘에 부친 원로 경영, 김승연 복귀로 기지개
한화가 2012년 5월 이라크 전후 재건사업의 하나로 따낸 비스야먀 신도시 건설(9조 원 규모)의 경우에도 이후 담수화 처리시설 등 11조 원 규모의 추가사업을 수주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논의는 진전되지 않고 있다. 김 부회장이 직접 이라크를 방문하기도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6월 ING생명 인수를 포기하기도 했다. 한화생명은 ING생명 한국법인 인수에 자신감을 비추면서 본입찰 제안서를 제출했다. 차남규 한화생명 사장은 "ING인수는 한화생명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나 결국 MBK파트너스에게 지고 말았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김 회장이 없는 상황에서 비상경영위원회가 열심히 일했지만 성장보다는 안정에 주력할 수밖에 없어 큰 결정을 내리기는 힘들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이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한화는 사업개편에 속도를 내고 있다. 김 회장은 외환위기 때 강력한 구조조정을 통해 한화그룹을 다시 본궤도에 올려놓아 ‘구조조정의 마술사’라는 말도 들었다. 마치 그때를 방불케 할 정도로 사업개편의 속도가 빠르고 폭도 크다.
한화케미칼은 지난 17일 자회사 한화L&C의 건재사업 부문을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오는 7월 매각을 완료한다는 계획인데, 예정대로 진행되면 3000억 원 정도를 손에 쥔다. 또 한화케미칼은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는 제약 자회사인 ‘드림파마’를 매각하기로 했다. 드림파마는 의약품과 건강기능식품 사업을 하는데, 지난 12년 매출 855억 원에 영업이익 74억 원으로 위축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화는 이들 사업의 매각을 통해 자금을 확보한 뒤 한화케미칼을 통해 글로벌 화학기업인 다우케미칼의 기초화학 사업부 인수전에 뛰어들려고 한다. 한화케미칼이 한화솔라원, 한화큐셀 등을 잇따라 인수해 태양광 사업에 진출했으나 아직 성과를 내지 못해 부채가 늘어나고 있은 만큼 재무를 개선하고 화학과 소재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해 태양광 사업 부문의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물론 한화 측은 “사업 구조조정은 그룹의 공식적인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비상경영위원회가 결정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또 김 회장은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경영에 전혀 관여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아직도 치료에 전념하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한화의 이런 움직임을 김 회장의 복귀와 연결해 분석하는 분위기가 훨씬 강하다. 한화케미칼에 대해 과감한 사업개편을 추진하는 것은 그룹의 위기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 태양광 사업에 힘을 쏟기 위한 김 회장의 경영구상과 일치한다. 김 회장이 집행유예로 풀려나자마자 한화가 실타래 풀 듯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것은 비상경영위원회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분석이다.
김 회장이 의리를 앞세워 구축한 한화의 비상경영위원회는 결코 ‘안녕’하지 못했다. 김 회장이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보여준 한화의 사업재편 속도는 ‘오너 경영’의 두 얼굴을 모두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