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6월29일 청와대에서 이재명 대통령 주재로 열린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투자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유독 'AI 수출'을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연합뉴스>
최 회장은 지난 6월2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SK 중장기 투자 전략을 발표하며 유독 '수출'을 강조했다.
그는 "이번 프로젝트는 대한민국이 인공지능(AI)을 소비하는 나라에서 AI를 수출하는 나라로 전환하는 근간이 될 것"이라며 "SK는 AI를 통해 대한민국의 성장에 동참하고, 글로벌 AI 생태계를 주도해 나가는 데 힘쓰겠다"고 밝혔다.
이날 SK그룹이 따로 언론에 배포한 보도 참고 자료에도 'SK, 전국 AI 인프라 구축 본격화…"AI 소비국서 수출국으로"'라는 제목이 달렸다.
최 회장은 "AI 생태계의 핵심 인프라인 AI 데이터센터를 전국 각 지역에 총 15GW 규모로 구축하고, 이를 '글로벌 AI 수출국'으로서의 기반으로 삼겠다는 계획"이라고 했다.
이어 "AI 메모리 수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총 1100조 원 규모의 투자 로드맵을 마련하고, 용인·청주·서남권을 아우르는 반도체 생산 벨트 구축도 추진한다"고 밝혔다.
최 회장 발언과 SK그룹 보도 참고 자료 모두 '수출'을 유난히 강조한 게 눈길을 끈다. 수출이 우리나라 경제의 핵심 동력이긴 하지만, 철강·자동차·반도체 같은 제조업이 아닌 AI 수출을 앞세웠다는 점도 주목된다.
여러 해석이 뒤따랐다.
먼저 최 회장이 얼마 전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과 인터뷰를 하며, 메모리 생산 능력을 더 늘릴 경우 한국 이외 지역에서 공장 신설을 검토할 수 있으며, 일본도 후보지라고 한 발언의 파장을 불식시키려는 발언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기술은 한 번 밖으로 나가면 돌아올 수 없다. 더욱이 일본은 미국과 함께 우리나라에 앞서 메모리 반도체 종주국이었고, 지금은 메모리 반도체 산업을 재건해 옛 영화를 되찾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일본에 메모리 반도체 공장을 짓게 되면, 일본이 메모리 반도체 산업을 다시 키워 우리의 경쟁국으로 부상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이에 적잖은 파장이 일었다.
SK그룹 측은 '세계가 각자도생의 시대로 접어든 지금, 한국도 유럽이 경제공동체를 만든 것처럼 더 큰 경제권을 상상해야 한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최 회장이 SK하이닉스 메모리 반도체 공장을 일본에도 지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최 회장이 호남권 반도체 공장 건설 의지를 밝히며 수출을 강조해, 이런 뒷말을 불식시키려 했다는 해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최 회장이 오래 전부터 수출과 해외 시장 진출을 강조해온 것의 연장선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최 회장은 2003년 SK글로벌 1조5천억 원대 분식회계 혐의로 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을 때부터 수출 기업 변신을 강조해왔다.
당시 검찰은 계열사 재무제표를 분식 회계하고, 내부거래를 통해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로 최 회장과 손길승 회장 등 SK그룹 최고 경영진 10명을 구속 기소했고, 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됐다.
당시 SK그룹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최 회장이 '같은 성격의 다른 그룹 계열사들도 대부분 비슷한 회계 방식을 적용해왔는데, 왜 우리만 지목돼 구속 기소했냐'고 불만을 제기했다. 또 최 회장은 측근으로부터 "다른 그룹들은 모두 수출이 주력이라 대외 신인도가 중요한 반면 SK그룹 주력 사업은 에너지와 이동통신 등 내수 중심이라 대외 신인도에 미칠 영향이 크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 것 같다'는 보고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어찌됐건 이후부터 SK그룹 안에서 '수출'과 '해외 시장 진출'이 유난히 강조됐다.
SK텔레콤(이동통신)과 SK주식회사(에너지) 등 주요 계열사마다 수출과 해외 시장 진출을 챙기는 조직이 신설되거나 강화됐다. 새해 경영전략 발표 때 수출과 국외 사업이 앞세워졌다. 실적 발표 때 매출 대비 수출 비중과 추이 수치를 따로 설명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다.
SK그룹의 이동통신 계열사 SK텔레콤의 해외 진출이 가속화한 것도 이 즈음부터다.
베트남과 미국에선 직접 이동통신 서비스에 나섰고, 중국에선 이동통신 사업자 지분을 인수했다. 중국 이동통신 사업자와 합작법인을 설립하기도 했다. 브라질 이동통신 사업권에도 도전했다. 결과는 대부분 좋지 않았다.
SK텔레콤은 이후 새로운 성장전략과 수출 기업 변신 길을 찾았다.
제2 시내전화 사업자 하나로텔레콤(SK브로드밴드)을 인수해 이동통신에 더해 초고속인터넷과 전용망 같은 유선통신 사업도 하는 종합 통신사로 변신했다.
전문업체 인수합병을 통해 물리적·디지털 보안 자회사을 키우고, 웨이브를 통해 OTT 시장에도 뛰어들었다. 하이닉스를 인수해 메모리 반도체 제조업에도 진출했다.
SK텔레콤의 기업 인수합병을 통한 사업 영역 확장은 이외에도 많다. SK텔레콤에서 분리된 SK스퀘어의 자회사로 돼 있는 업체들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SK하이닉스 인수는 '신의 한수'로 평가되기도 한다.
'최 회장이 에너지·화학과 이동통신으로는 그룹 성장이 더 이상 어렵다고 판단해 내부 반대를 무릅쓰고 사내외 이해관계자들을 직접 설득해 하이닉스 인수를 관철했다'는 서사를 갖고 있다.
▲ 이재명 대통령이 29일 청와대에서 열린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기업 투자계획 발표 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게 허리 숙여 감사 인사를 하고 있다. 왼쪽은 최태원 SK그룹 회장. <연합뉴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반도체 경기 사이클이 호황으로 돌아섰고, 호황 국면이 길어졌다.
이어 생성형 AI 등장에 따라 세계적으로 데이터센터 등 AI 인프라 구축 움직임이 일며, 고성능 메모리(HBM)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기 시작했고, SK하이닉스는 삼성전자와 함께 전례 없는 실적을 내고 있다.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반도체 사업 한가지만 하는 가벼운 몸집 덕에 AI 흐름을 발 빠르게 따라가며 시장을 선점할 수 있었다.
고성능 메모리(HBM) 상용화에 한 발 앞서 도전할 수 있었고, 이게 들어맞아 실적에서 여러 천문학적 기록들을 잇따라 내고 있다. 영업이익과 시가총액에서 각각 삼성전자를 제치기도 했고, 지금은 삼성전자와 함께 각각 '천조 원' 단위의 투자 계획까지 내놓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가 불황일 때, SK하이닉스는 임직원 급여와 투자를 동결하거나 미룰 정도로 직격탄을 맞았다. 삼성전자는 때마침 스마트폰 사업이 호황기를 맞은 덕에 메모리 반도체 불황 타격을 덜 받았다.
하지만 메모리 반도체 경기가 초호황기를 맞은 지금, 두 업체의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삼성전자의 경우 비메모리 반도체와 팹, 소비자 가전, 모바일(스마트폰 등) 등의 사업이 메모리 반도체에서 얻은 실적을 갉아먹고 있다.
최 회장은 이재용 삼성 회장과 함께 이재명 대통령의 '90도 감사 인사'를 받기까지 했다. 애초 이 대통령은 이들이 국가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며 큰절을 하려다가 주위의 만류로 허리를 90도 숙이는 인사로 대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적으로 최 회장이 수출과 해외 진출을 강조한 것이 AI 대전환 시대에 반도체 사업 대성공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가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왜 'AI 수출'을 전면에 내세웠는지, 그 배경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겠다. 김재섭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