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KSC싱가포르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관계자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종현 YMX 이사, 문준식 KSC싱가포르 소장, 텡스치 프로그램 매니저, 김태언 매니저, 강춘썬 프로그램 디렉터. <비즈니스포스트>
타워 안으로 들어가자 드넓은 식물원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국내 건설사인 현대건설과 GS건설 컨소시엄이 지은 마리나원 웨스트타워는 실내에 대형 폭포와 심장 모양의 녹색 광장을 품고 있다.
KSC싱가포르는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산하 기관으로 국내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을 돕는 역할을 한다. 마리나원 웨스트타의 내부 인테리어가 글로벌 시장을 향해 뛰는 국내 스타트업의 창의성과 혁신, 도전정신을 품고 있는 울창한 수풀처럼 느껴진 이유다.
이곳 5층에 위치한 공유오피스에는 KSC싱가포르와 국내 유망 스타트업 19개사가 입주해 있다.
6월11일 찾은 KSC싱가포르 사무실에서는 문준식 소장과 3명의 직원이 국내 기업들의 현지 안착과 글로벌 네트워킹을 지원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현재 KSC싱가포르는 싱가포르 정부 정책과 K스타트업의 현지 진출 수요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반도체, 인공지능(AI), 서비스 플랫폼, 사이버보안·네트워크, 정밀의료, 푸드테크를 ‘6대 특화 업종’으로 지정해 운영한다.
문준식 소장은 “입주기업들이 현지 기관, 투자자, 잠재 고객사와 만나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물리적 공간과 네트워크를 유기적으로 지원한다”며 “금융 중심지에 위치해 입주기업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다”고 말했다.
▲ KSC싱가포르가 위치한 마리나원 웨스트타워. 현대건설·GS건설 컨소시엄이 시공을 맡아 2017년 준공했다. <비즈니스포스트>
문 소장은 싱가포르를 인도네시아·베트남·말레이시아 주변 아세안 국가 진출을 위한 요충지로 꼽았다. 싱가포르에는 7천개가 넘는 다국적기업(MNC)의 아시아 본부가 위치해 있어 스타트업이 기술 실증과 기업간거래(B2B) 기회를 확보하는 데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그는 “싱가포르는 규제가 유연하고 글로벌 기업과 투자자들이 밀집해 있어 핀테크, 인공지능(AI), 헬스테크 같은 규제 민감도가 높은 신산업 모델을 검증하기에 최적의 환경”이라며 “선진시장인 싱가포르에서 레퍼런스를 확보하면 다른 동남아 국가로 확장도 수월하다”고 말했다.
다만 한국에서 성과를 낸 기업이라도 현지에서는 사업성을 재입증해야 한다. 문 소장은 스타트업의 싱가포르 법인 설립은 종착지가 아닌 ‘시작점’이라고 말했다.
문 소장은 “한국 스타트업이 동남아에 진출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글로벌 트랙 레코드(실적)의 부재”라며 “한국 스타트업의 기술 수준은 현지에서도 높게 평가받지만 싱가포르 벤처캐피털(VC)들은 동남아 시장에서 검증된 사례가 있어야 본격적으로 투자에 나선다”고 강조했다.
싱가포르와 동남아 투자시장의 구조적 특성도 한국 기업들에게 진입장벽으로 작용한다.
문 소장은 “동남아 벤처캐피탈(VC)과 펀드 상당수는 출자자(LP)에게 동남아 성장 스토리에 투자하겠다고 약속하고 자금을 모집한다”며 “한국을 비롯한 역외 스타트업은 현지에서 유의미한 사업적 기반이나 잠재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투자 유치가 어렵다”고 말했다.
▲ KSC싱가포르가 입주한 공유오피스 전경. <비즈니스포스트>
국내 스타트업이 이같은 장벽을 넘을 수 있는 열쇠는 기술력과 이를 증명할 '현지 개념증명(PoC)'이다. PoC는 아이디어나 기술, 비즈니스 모델이 실제로 구현 가능하고 효과가 있는지 소규모로 실험·검증하는 과정을 말한다.
문 소장은 “싱가포르 현지 기관 등을 통해 PoC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입소문이 나면, 글로벌 기업과 투자사들로부터 후속 PoC, 사업 협력, 투자 등 다양한 제안이 들어온다”며 “KSC싱가포르는 현지에서 입주 스타트업들이 레퍼런스를 쌓을 수 있도록 물꼬를 터 주는 역할에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이를 위해 KSC싱가포르는 매달 한 차례 이상 현지 벤처캐피털을 초청해 데모데이를 열고 연 2~3회 입주기업들과 공동 부스를 꾸려 주요 전시회에 참가한다.
KB금융그룹의 KB스타터스 핀테크랩이나 신한금융과 하나금융 등 국내 대형 금융지주들이 운영하는 현지 스터트업 육성 프로그램과도 교류하고 있다.
문 소장은 현지 네트워크의 핵심 축으로 강춘썬 디렉터의 역할을 높이 샀다.
문 소장은 "강 디렉터는 싱가포르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블록71(Block71)'에서 13년간 근무한 베테랑"이라며 "현지 창업 생태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입주 스타트업들이 어떤 기관과 PoC 및 오픈이노베이션을 진행해야 할지 도움을 준다"고 설명했다.
문 소장은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소속으로 올해 2월 3년 임기로 파견을 왔는데 현지 강춘썬 디렉터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이다.
강춘썬 디렉터를 비롯한 현지 직원들의 노력은 현지 핵심 기관과 실질적 협력으로도 이어졌다.
KSC싱가포르는 4월28일부터 30일까지 싱가포르에서 열린 글로벌 치안·보안 전시회 밀리폴테크X(MTX, Milipol TechX)에서 AI, 딥테크, 사이버 보안 분야 스타트업 6개사와 함께 전시관을 꾸렸다.
문 소장은 “행사 첫날 싱가포르 내무부 산하 홈팀과학기술청(HTX)의 공공안전 스타트업 육성 전담 자회사인 '테크엑스벤처스(TXV, TechX Ventures)'와 공식 업무협약(MOU)을 맺었다"며 "마지막 날에는 에드윈 통(Edwin Tong) 싱가포르법무부 장관 겸 내무부 제2장관이 정부 고위 관계자들, 글로벌VC와 함께 방문해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HTX와 오픈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하면 업계에 입소문이 나고 투자기관에서 먼저 연락이 온다”며 “앞으로 HTX의 엑설러레이팅이나 오픈 이노베이션 프로그램에 KSC싱가포르 입주기업들을 많이 참여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 KSC싱가포르가 입주한 공유오피스 전경. <비즈니스포스트>
KSC싱가포르의 지원은 성과로 증명되고 있다.
2025년 한 해 동안 KSC싱가포르 입주기업 중 12곳이 현지에서 약 696억 원 규모의 투자 유치에 성공하고 약 20여 건의 PoC(개념증명), MOU(업무협약), NDA(비밀유지계약) 및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문 소장은 투자 유치에 성공한 스타트업 대표(CEO)들을 직접 소개시켜주며 KSC싱가포르의 역할을 강조했다.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 ‘모닛(Monit)’의 박도형 대표는 이날 화상 인터뷰에서 “KSC싱가포르에 입주해 현지의 많은 의료시설과 기관들을 소개받았다”며 “한 곳에서 PoC가 성공적으로 완료되자 현지 병원들 사이에 입소문이 났고 싱가포르 최대 국립보건그룹인 NHG(National Healthcare Group) 계열 병원들로부터도 먼저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
모닛은 최근 KSC싱가포르를 통해 알게 된 대형 의료그룹 ‘뱅가드 헬스케어’와 ‘글렌이글스(Gleneagles) 병원’ 등과도 연이어 PoC 도입 계약을 맺었다.
모닛이 개발한 스마트 기저귀 모니터링 시스템은 자체 센서 기술을 바탕으로 환자의 기저귀 상태를 실시간으로 감지해 욕창 등 환자의 질환을 예방하고 간병 인력의 업무 부담을 줄인다.
박도형 대표는 "싱가포르 주요 의료기관에서 성과는 태국, 말레이시아 등 아세안 전역으로 파급 효과가 미치기 때문에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현지에 상주하는 산업용 디지털트윈솔루션 스타트업 ‘와이엠엑스(YMX)’의 김종현 이사는 이날 “싱가포르 정부가 국가 전체를 디지털 트윈으로 전환하는 ‘스마트네이션(Smart Nation)’ 정책에 관심이 높다는 점에 주목해 동남아 진출을 결정했고 올해 1월 KSC싱가포르에 입주했다”고 말했다.
YMX는 확장현실(XR) 기반 제조 공장, 대형 빌딩, 도시 인프라 등의 실제 물리적 환경을 가상세계에 정밀하게 구현하는 디지털트윈 솔루션을 제공한다. 주요 고객사로는 삼성전자 등이 있다.
김 이사는 “올해 PoC를 진행하고 소규모 도입을 거쳐 장기적으로 싱가포르 주택개발청(HDB) 등 공공기관 전체로 솔루션을 확대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싱가포르는 국토가 좁고 도시 인프라 밀도가 높아 도시 운영 효율을 높이는 디지털트윈 기술에 관심이 큰 것으로 평가된다. YMX는 이 같은 수요를 기반으로 KSC싱가포르와 함께 현지 공공 인프라시장의 문을 적극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올해 3월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 산하 비영리기관 테마섹트러스트(Temasek Trust)에서 투자를 받은 AI 기반 헬스케어 스타트업 '인졀미(injewlme)'도 있다.
인졀미 김지명 대표는 서면 인터뷰에서 “투자자 미팅, 바이어 연결, 싱가포르 대형 전시회 이노베이션 테크 페스티벌(SWITCH) 참가 지원 등 KSC싱가포르를 통해 피부에 와 닿는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문 소장의 목표는 KSC싱가포르의 지원을 거쳐 아세안 시장을 주도하는 한국계 글로벌 유니콘 기업을 지속적으로 탄생시키는 것이다.
그는 “자주 찾아와 소통하고, 요구사항이 많은 기업일수록 성과를 낼 확률이 높다”며 “최대 3년인 입주 기간 KSC싱가포르의 모든 네트워크와 자산을 활용해 기업들이 자생력을 갖추고 졸업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문 소장은 “현지에 진출한 국내 금융사들과 정부, 공공기관들이 낯선 땅에서 뛰는 국내 스타트업들을 위해 함께 판을 키워보자는 데서 든든한 동지애를 느낀다”며 “싱가포르를 발판으로 더 많은 한국 스타트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김민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