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닛포스트] 최근 연이어 발생한 대규모 해킹 및 개인정보 유출 사고를 계기로 국회에서 피해자 구제를 위한 '집단소송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시금 높아지고 있다.

현행법으로는 대규모 피해에 대한 실질적 구제가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정치권에서 집단소송제 법제화 논의가 본격화될지 관심이 모인다.
 
SK텔레콤 KT 롯데카드 해킹사태 후폭풍, 국회 집단소송제 제정 목소리 커져

▲ 해킹사고로 수백만 명의 피해자가 발생하면서 정치권의 집단소송제 도입 논의가 본격화될지 관심이 모인다. 조좌진 롯데카드 대표이사 등 관계자들이 18일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에서 해킹 사고로 인한 고객 정보 유출 사태에 대해 사과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25일 정치권 안팎의 움직임을 종합하면 SK텔레콤의 유심(USIM) 정보 유출 사고와 롯데카드 해킹 사태 등 잇따른 개인정보 침해 사고가 터지면서 이들 사고의 피해자가 다수인 만큼 피해 구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집단소송제' 도입 필요성이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집단소송제는 다수의 피해자가 동일한 원인으로 피해를 입었을 때 피해자 일부가 ‘대표 당사자’로 소송을 제기하고 승소하면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나머지 피해자들에게도 그 판결의 효력이 미치는 제도다.

우리나라는 현재 증권 관련 손해배상 소송에 한정해 집단소송을 허용하고 있어 다른 분야의 집단적 피해를 구제하기는 쉽지 않다.

집단소송제도와 유사한 역할을 하는 다른 제도로 소비자 단체가 기업의 불공정 행위에 대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단체소송제도가 있지만 손해배상 청구가 아닌 '행위의 금지나 중지'를 구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때문에 개인정보 유출 사건과 같이 피해자가 다수고 피해 규모가 방대한 사건이 발생할 경우 소송 비용, 복잡한 절차 등으로 인해 소비자들이 거대 기업을 상대로 피해를 입증하고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소액 피해자들이 개별 소송을 포기하는 것을 막고, 소송 비용이나 시간을 절감하여 실질적인 피해 구제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집단소송제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져왔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을 보면 제22대 국회가 개원한 뒤 25일까지 집단소송제 도입 법안이 5건(이학영, 백혜련, 전용기, 박주민, 차규근 의원) 이 발의돼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가장 최근에 발의된 집단소송제 도입 법안은 더불어민주당 소속 이학영 국회부의장이 23일 대표발의한 ‘소비자 집단소송법안’이다.

이 의원의 법안은 현행 소비자기본법상 요건을 갖춘 소비자단체와 한국소비자원, 재정적 능력을 갖춘 비영리민간단체 등이 원고가 돼 소비자 집단소송을 주도할 수 있도록 했다.
 
SK텔레콤 KT 롯데카드 해킹사태 후폭풍, 국회 집단소송제 제정 목소리 커져

▲ 소비자 집단소송법안을 대표발의한 이학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학영 페이스북>


이 의원은 법안 발의 이유를 두고 "SK텔레콤(SKT) 유심 정보 유출 사건 등 소비자에게 피해를 입히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며 "이러한 사고들은 다수의 소비자에게 피해를 발생시켜 그 규모가 방대함에도 소비자가 거대 기업을 상대로 피해를 입증하고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어려운 만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대부분 기업의 낮은 보상으로 사건이 종료되는 게 허다했다"고 설명했다.

차규근 조국혁신당 의원도 디젤차 배기가스 조작 사례의 경우 집단소송제가 활발한 미국과 특별법으로 집단소송법을 도입한 독일에서는 피해자에 대해 충분한 손해배상이 이뤄졌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손해배상이 이행되지 않았다며 ‘포괄적 집단소송법안’을 발의했다.

정치권뿐 아니라 시민단체에서도 이번 해킹사고를 계기로 ‘집단소송제’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참여연대는 지난 18일 논평에서 SKT, KT, 롯데카드 등의 해킹 사고를 언급하며 “기업들은 본인들이 책임져야 할 ‘개인정보 유출’보다는 스스로 피해자로서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해킹 피해’ 또는 ‘해킹 사고’라는 용어로 책임을 희석시키려 한다”며 “가장 중요한 해결방법은 집단소송법 등 소비자보호법을 도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집단소송제도가 법률화되기 위해서는 재계의 거센 반대를 넘어야한다. 2005년 증권관련 집단소송법이 제정된 이후 2010년대 후반부터 다른 분야에도 집단소송을 허용하자는 요구가 거셌으나 소송 남발과 불필요한 비용 부담, 기업 이미지 손상, 영업 비밀 유출 등을 우려하는 재계의 반발로 법제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이던 2020년 9월 법무부는 50인 이상 피해자가 공동으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집단소송법 제정안'을 입법 예고한 바 있지만 갑론을박을 펼친 끝에 의결되지 못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이화실 전문위원은 박주민 민주당 의원의 소비자집단소송 도입법안 검토보고서에서 “집단소송은 개별 당사자들의 소송제기에 따른 비용이 매우 적게 들기 때문에 패소에 대한 부담은 적고 소송을 수임받은 변호사는 많은 보수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남소의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 전문위원은 “기업 입장에서는 집단소송이 제기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대외신인도가 저하되는 등 기업들의 경쟁력이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짚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스탠퍼드대 로스쿨과 코너스톤 리서치 조사 결과 2024년 기준 미국 상장기업들이 증권 집단소송 합의금으로 약 37억 달러(약 5조1천억 원)를 지급했다고 보도했다.

해당 조사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미국의 연간 집단소송 합의 건수는 적게는 72건, 많게는 105건이었고 주주들에게 지급된 합의금은 19억 달러(약 2조6300억 원)에서 74억 달러(약 10조3천억 원) 사이였다.

그러나 기업의 부실한 경영관리로 불특정 다수가 피해를 본 해킹 사고가 끊이지 않고 계속 발생한 만큼 이번에는 집단소송제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에 더욱 힘이 실릴 가능성이 높다.

백혜련 민주당 의원은 2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소비자 보호3법 세미나에서 "집단소송제 등 소비자권리보호법에 대해 이재명 정부가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고 국정운영 로드맵 수립 과정에서 대한변호사협회와 간담회를 열어 개선 방안을 논의한 바 있다”며 “소비자 권리 보호는 여야와 진영을 넘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시대적 과제”라고 강조했다.

민주당 경제형벌 민사책임 합리화 태스크포스(TF) 단장인 권칠승 의원도 지난 18일 2차 전체회의가 끝난 뒤 취재진과 만나 “여러 경제 문제에 발생하는 민사 문제를 제대로 구제하기 위해서는 민사 책임을 강화해야 하고 징벌적 손해배상, 집단소송제는 강화해야 한다고 논의했다”고 말했다. 김대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