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싱가포르의 관광자원은 자연적이거나 역사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 대부분 정부의 관광이니셔티브에 따라 치밀하게 기획된 것이다. 사진은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에 위치한 싱가포르의 랜드마크인 '마리아 베이 샌즈 호텔' 이미지. <마리아 베이 샌즈 호텔 홈페이지 캡쳐> |
외국에서 손님이 올 때마다 나는 망설인다. 어디를 데려가야 하지?
외국인 손님의 목적은 비즈니스 협의지만, 사실 공식적인 협상은 짧다. 손님이 한국에 체류하는 많은 시간, 그의 눈과 입을 즐겁게 해야 하는 것은 비즈니스맨의 숙제이다. 문제는 서울이든 부산이든 그들을 흐뭇하게 할 ‘핫플(핫플레이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요즘 케이푸드(K-food)가 글로벌하게 뜨고 있기 때문에 입을 즐겁게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꿈틀거리는 산낙지나 푹삭은 홍어회 같은 음식들은 ‘유흥거리’가 되면서 추억거리를 제공한다.
문제는 갈 곳, 볼 곳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을 여러 번 방문한 사람일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반 만 년의 유구한 전통과 문화를 가진 금수강산이지만 그 향취는 오래 한국에 살면서 차근차근 느낄 수 있는 것.
단기 방문객들이라면 승패는 소위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것에서 결판이 난다. 그런데 사실 외국인들에게 서울이나 부산하면 떠오르는 ‘랜드마크’가 무엇일까? 잘 떠오르지 않는다.
서울의 경우에는 경복궁과 같은 고궁이나 최근 개방한 청와대 등 몇몇 곳을 손꼽을 수 있고, 제2의 도시 부산도 해운대나 광안리 해수욕장 정도가 꼽힌다.
경험을 빌자면, 외국 손님들은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를 모두 알고, 강남역이나 청담동에 가서 여기가 ‘강남 본류’라고 하면 신기해 하며 두리번거린다. 그리고 끝이다. 첨단IT국가, 케이팝(K-Pop), 콘텐츠 강국 등등의 국가 이미지는 있어도 도시 이미지는 없는 듯하다.
관광전문가는 아니지만, 경험으로 말하면 관광대국 혹은 세계적인 관광도시들은 그들만의 특별함이 있다. 우선, 자연 대국이다. 캐나다의 로키나 스위스의 알프스 같은 것들이다. 또 하나는 선조들이 남긴 엄청난 문화유산을 가진 국가나 도시이다.
또 다른 유형이 있다. 엄청난 자연이나 문화유적이 없더라도 스스로 ‘랜드마크’들을 만들어 관광으로 큰 성공을 이루고 있는 도시나 국가들이다. 나아가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역사 도시들도 현대적인 ‘랜드마크’를 만들어 자신들의 가치를 높인다.
내가 다녀본 많은 도시들 중 싱가포르와 스페인의 발렌시아가 제법 인상적이다.
출장 차 지난해 싱가포르를 몇 차례 간 적이 있는데 이 나라는 정말 나를 감탄하게 만든다. 721제곱킬로미터의 조그만 국토, 인구 530만 명의 소국이지만, 연간 1천만~1400만 명 이상이 찾는 관광대국이다.
싱가포르의 관광자원은 자연적이거나 역사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 대부분 정부의 관광이니셔티브에 따라 치밀하게 기획된 것이다. 대표적인 관광명소인 센토사섬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이 섬 역시 버려졌던 섬을 1972년 매립으로 넓히고 관광리조트로 개발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섬에는 유니버셜 스튜디오가 들어와 있다.
센토사섬과 함께 싱가포르의 또 다른 랜드마크로 꼽히는 마리나베이샌즈 호텔, 100만 제곱미터 규모로 만들어진 세계 최대의 인공정원 ‘가든바이더베이’ 등이 꼽힌다.
싱가포르는 사실 관광산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면 모두 오케이다. 영국 런던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런던아이’를 본떠서 2008년 ‘싱가포르 플라이어’를 만들었고, 영화 아바타가 전세계적인 히트를 치자 가든바이더베이 안에 ‘아바타 체험공간(Avatar: The Experience)’을 운영하고 있다. 이 영화를 만든 제임스 카메론 감독과 월트디즈니가 싱가포르와 협업한 몰입형 체험공간이다.
‘영화는 할리웃에서 만들었는데 돈은 싱가포르에서 버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더욱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역시 가든더베이 안에 있는 정원 중 하나인 ‘슈퍼트리’이다. 커다란 인공나무를 만들어 각종 조명장치를 만든 뒤 클래식 음악에 맞춰 현란한 조명쇼 (이른바 ‘슈퍼트리쇼-가든랩소디’)를 한다. 낮에는 인공나무에 붙어 있는 전등들이 다 보여서 그저 그렇지만 밤에는 음악과 어우려져 춤추는 몽환적인 조명쇼가 정말 볼 때마다 탄성을 자아낸다. 그리고 무료이다.
인상적인 것은 ‘관광자원이 없으면 세우고 만들겠다’는 싱가포르 정부와 국민들의 발상과 그것을 실현한 의지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2005년 ‘가족에게 매력있는 관광지’를 만들자는 분명한 목표 아래 ‘투어리즘2015’을 발표했고, 싱가포르의 대부분의 랜드마크나 관광명소들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기획된 ‘초현대식 관광자원’이다.
얼마전에는 스페인 패키지 여행을 다녀왔는데 발렌시아라는 도시에서 유사한 경험을 했다. 스페인의 다른 도시들처럼 발렌시아에도 많은 문화유산들이 있다. 그러나 세계적인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하고 아직까지도 건축중인 바르셀로나의 랜드마크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과 비교하기 어렵고,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의 명성에 비할 수 없다.
하지만 발렌시아에는 ‘예술과 과학의 도시’(Ciudad de las Artes y las Ciencias: CAC)라는 8개의 초현대적 미래형 건축물로 이뤄진 문화복합단지가 있다. 말 그대로 ‘과학의 힘을 예술로 승화시킨’, 해상의 미래도시 같은 전위적인 건물들과 화려한 야경으로 발렌시아의 보물이 됐다.
나의 패키지 여행 일정에도 이 곳이 포함됐는데, 발렌시아에서 간 유일한 곳이 바로 이 곳이었다. 다시 말해 CAC 한 곳을 보기 위해 5~6시간 버스를 타고 발렌시아를 찾아 갈 정도로 스페인에서도 손꼽히는 ‘랜드마크’가 된 것이다. 1998년 개관해서 연간 270만 명이 찾는다고 한다.
짧은 시간 동안 느낀 이 곳의 멋진 풍경보다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곳의 탄생 배경이었다. 발렌시아 정부는 20세기 후반 지역경제가 어려워지자 예술과 기술,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산업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 일환으로 ‘우리 도시에도 이를 상징하는 랜드마크를 건설해 보자’는 야심찬 계획에 따라 발렌시아 시내를 가로지르던 뚜리아강이 말라 버린 곳을 새로운 수(水)공간으로 조성했다고 한다.
CAC는 발렌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 등이 설계를 했다. 이를 위해 발렌시아 자치정부는 1996년 ‘예술과 과학의 도시 재단’을 건립, 12억 유로(1조7천억 원)를 들여 2000년대 후반 지금의 건물들을 모두 완공했다고 한다. 그 결과 CAC는 새로운 일자리 창출은 물론 다양한 전후방 효과로 발렌시아의 도약을 견인했고, 지금은 21세기의 도시혁신의 모델로 손꼽힌다.
▲ 2023년 4월5일 국제박람회기구(BIE) 현지실사단이 부산을 대표하는 시민단체 20여 명과 오찬을 한 뒤 기념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2030 부산세계박람회> |
최근 부산시에 근무하는 지인을 만났다. 그의 관심은 온통 2030년 세계 박람회(엑스포, EXPO)의 부산 유치에 쏠려 있었다. 엑스포는 5년마다 한번씩 개최되는 세계(등록)박람회와 중간중간 열리는 전문(인정)박람회로 구분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전문박람회만 대전(1993년)과 여수(2012)에서 두 번 개최한 바 있다.
부산은 이탈리아의 로마,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와 경쟁하고 있는데 두 나라 모두 만만찮은 상대. 현재 국제박람회 기구의 현지실사를 마쳤고, 6월 국제박람회기구 총회에서 회원국가들의 투표로 개최지가 결정된다.
우리나라는 대통령과 국무총리, 부산시 등 정부는 물론 대한상의 의장을 맡고 있는 최태원 SK 회장과 삼성전자 등 국내 주요 기업들이 전방위로 외교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부산에서 엑스포 유치 기원 공연을 한 BTS 역시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부산이 엑스포를 유치할 경우 생산 43조 원, 부가가치 18조 원, 고용 50만 명의 경제효과를 예상한다고 한다. 내가 엑스포를 바라보는 시각은 좀 다르다. 나는 당장의 경제효과도 중요하겠지만, 더 긴 안목으로 전세계가 주목하는 부산의 영구적 관광자원,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랜드마크가 만들어 졌으면 한다.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 시애틀의 스페이스니들 등 엑스포의 상징물이 그 시대와 그 도시, 그 나라를 상징하는 불멸의 문화유산이 된 것처럼 말이다. 더 중요한 것은 부산이 자연과 기술과 지속가능한 삶이 자연스럽게 연계되는 새로운 혁신도시의 전형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나는 부산시의 이러한 원대한 계획은 엑스포의 유치결과와 상관없이 계속 진행됐으면 한다. 부산시가 엑스포를 유치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부산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세계적인 관광도시이자 혁신도시로 만들기 위한 것이리라. 그리고 이를 위해 큰 청사진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장기적인 비전을 전 정부적이고 국민적 관심속에 만들 기회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중앙정부와 부산시가 당장은 단순한 엑스포의 유치에 전력투구해야 한다. 그러나 부산시가 세계적인 혁신도시이자 관광도시로 발돋움할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 본질이고, 엑스포는 이를 위한 도구라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이러한 확고하고 장기적인 관점에 서있지 않다면 설사 엑스포를 유치하더라도 절반의 성공에 그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유치한 평창동계올림픽 등 대규모 국제 행사가 한차례의 ‘국력과시’ 이후 국민들의 뇌리 속에 사라져 간 것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엑스포 유치에 성공한다면 이러한 노력은 더 쉽게 결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미래를 내다보며 뚝심있게 추진되어야 한다. 싱가포르 정부가 ‘관광입국’의 장기적 비전을 세우고 ‘마리나 베이 샌즈’와 ‘리조트 월드 센토사’를 만든 것처럼, 발렌시아가 자치정부 주도로 CAC를 건설해 도시를 혁신시킨 것처럼 말이다.
그래야 우리에게도 관광산업의 미래가 있다. 나의 외국 사업파트너에게 ‘부산 자랑’에 너스레를 떨며 KTX를 탈 날을 기대한다. 그리고 부산을 응원한다. 이태희 CUE코리아 대표
대학졸업 후 30년간 언론(한국일보)과 공무원(방송통신위원회), 국제기구(TEIN), 글로벌 기업(마이크로소프트) 등 공공과 민간의 영역을 넘나들며 사회의 ‘새롭고 긍정적인 변화’를 추구해왔다. 2020년부터 글로벌 마케팅·테크놀로지 기업인 CUE Group의 한국 대표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변화의 지향-사상의 자유시장과 인터넷의 미래'(나남, 2010)이 있으며, 몇 권의 공저와 학술논문들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