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한국이 칩4동맹에 들어갔을 때 중국으로부터 당할 보복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일 것으로 예상된다.
14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에 ‘동아시아 반도체 공급망 네트워크(칩 4 동맹)’ 참여 여부를 8월까지 알려달라고 요청했으며 8월부터 이를 실현하기 위한 실무자급 회의를 진행할 것으로 관측된다.
미국 정부는 지금까지 중국의 '반도체 굴기(진흥)' 정책을 꾸준히 견제해 왔는데 본격적으로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한 움직임에 나선 것이다.
미국 기업은 반도체설계와 장비 등에서 강점을 갖추고 있지만 반도체 생산은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대만의 TSMC 등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 만큼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한국의 ‘칩 4 동맹’ 참여가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현재 애플 등 주요 미국 팹리스(반도체설계) 기업들이 반도체 생산을 의존하고 있는 대만은 최근 중국과 군사적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어 한국 반도체기업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5월 직접 삼성전자 평택공장을 방문한 것은 미국 반도체산업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무게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으로 평가된다. 이재용 부회장은 바이든 대통령에게 직접 평택공장을 안내하며 삼성전자가 갖고 있는 글로벌 반도체 산업 내 위상을 대외적으로 과시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애플, 퀄컴, 엔디비아와 같은 미국 기업은 현재 반도체의 거의 모든 제조를 대만에 주기 때문에 대만이 중국 손에 넘어간다면 미국의 기술부문은 황폐해질 것”이라며 “바이든 대통령의 한국 방문은 중국을 제치고 반도체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는 한국의 ‘칩4동맹’ 가입 요청이 반갑지 만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주도하는 칩4동맹에 한국이 들어간다는 것은 결국 중국과 관계 악화를 감수하겠다는 것인데 이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에 반도체 생산기지를 두고 있을 정도로 많은 부분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 낸드플래시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자사 낸드 생산량의 40%를 생산하고 있다. 또 SK하이닉스는 중국 우시 공장에서 자사 D램 가운데 50%를 생산한다.
게다가 SK하이닉스는 올해 말부터 3년 동안 우시 공장에 2조3940억 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 삼성전자의 중국 시안 낸드플래시 생산공장.
중국은 국내 반도체기업의 최대 수출국이기도 하다.
2021년 우리나라의 반도체 수출액 가운데 중국 본토 비중은 39%이고 홍콩을 포함하면 60%까지 늘어난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악화돼 수출에 차질이 발생한다면 막대한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국내 기업이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기초 원료에 있어서도 중국에 의존하는 비중이 크다. 반도체의 주요 원료인 갈륨은 95.7%, 텅스텐은 83.6%, 마그네슘 82%를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중국 관영매체 글로벌타임스는 6월 “미국 바이든 정부가 중국을 대상으로 반도체 관련된 규제를 지속한다면 결국 한국기업들이 손해를 떠안게 될 것”이라며 “미국이 중국 반도체산업 성장을 막기 위해 갖은 방법을 쓰고 있지만 기업들은 미국의 정치적 전략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13일 대한상공회의소 제주포럼 기자간담회에서 중국 시장과 관련해 "좋든 싫든 상당히 큰 시장인 만큼 포기하는 것은 선택지가 아니다"며 "경제적으로 계속해서 협력하고 발전과 진전을 이뤄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면 미국이 주도하는 칩4동맹에 들어가면 얻을 것이 더 많다는 시선도 나온다.
반도체 장비나 설계에서는 미국, 반도채 소재에서는 일본이 앞서고 있는데 이는 대체 불가능한 요소지만 중국의 반도체 원료는 충분히 다각화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성장동력산업연구본부 전문연구원은 “반도체 공급망이 재편된 뒤에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지금껏 유지했던 중립은 유지하기 어려워질 것”이라며 “반도체 원천기술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미국이 추진하는 동맹에 참여하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도 최근 몇 년 동안 탈중국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017년까지 3만 명대 중반을 유지하던 삼성전자의 중국 임직원 수는 2021년 1만8099명까지 줄어들었다. 중국에 두고 있던 공장도 계속 폐쇄해 현재는 시안 반도체 공장과 쑤저우 가전 공장, 반도체 후공정 공장만 남아 있다.
한국 정부는 아직까지 칩4동맹 가입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대통령실은 브리핑을 통해 “미국과 다양한 채널을 통해 반도체 협력을 강화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며 “지금 상황에서 대답드릴 만한 게 없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외교 전문매체 월드폴리틱스리뷰는 “한국 정부는 중국에서 한국 기업들이 위태롭게 될 것을 우려해 칩4동맹 가입에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이고 있다”며 “이는 미국과 아시아 국가의 칩 동맹이 분열되지 않기 위해서는 신중한 외교적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보도했다. 나병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