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사태에서 정작 당사자인 우크라이나보다 미국과 러시아의 대결구도에 시선이 쏠린다.
일부 전문가들은 긴장의 고조가 두 강대국에게 손해될 게 없다는 이유에서 대립을 인위적으로 연출하고 있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어떤 전략적 가치가 있길래 미국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충돌하게 된 걸까?
이번 사태의 직접적 발단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움직임이다.
이에 안보 위협을 느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지대에 군사력을 배치한 데서 시작돼 지금에 이르렀다.
이른바 나토의 동진정책이 러시아의 반발을 일으킨 방아쇄가 됐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는 것을 자기 세력권인 우크라이나를 미국에 빼앗기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래서 러시아는 전쟁까지 불사하며 우크라이나를 사수하려고 하고 있다.
미국도 나름대로 유례없는 경제제재 조치를 꺼내들며 응수하고 있다.
두 강대국이 우크라이나에서 충돌하게 된 이유는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가치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유럽과 러시아(더 크게 보면 아시아)의 교차로, 흑해를 경유해 중동으로 연결되는 길목이다.
예로부터 우크라이나 지역은 유럽이 아시아로 진출할 때도, 아시아의 유목민들이 유럽으로 향할 때도 거쳐가는 길이었다.
지리적 방해 없이 넓게 펼쳐진 평원지대이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대도시가 밀집해 있는 러시아 서부와 우크라이나 대부분은 이른바 동유럽 평원이라 불리는 넓은 평원지대다. 그리고 이 평원은 그보다 더 넓은 유럽 평원의 일부분이다.
넓은 유럽 평원이 프랑스에서 북독일, 동유럽을 거쳐 러시아의 심장부까지 지리적 방해 없이 펼쳐져 있다.
평원지대는 사람 살기 좋고 경제활동을 촉진하는 지리적 배경을 제공하지만 군사전략상으로는 방어하는 데 더 많은 자원이 소요되는 불리한 요건이다.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해 확실한 서방 편에 속하게 된다면 러시아로서는 드넓게 펼쳐진 평원지대를 서방세계에 노출하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안보위협이 증가한다는 뜻이다.
러시아가 해양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우크라이나를 장악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러시아는 국토대부분이 추운 지역에 위치한 탓에 바다와 면한 쪽은 대부분 얼어 있어서 러시아제국 시절부터 부동항을 마련하는 게 군사전략상 0순위 목표였다.
과거 소비에트연방 붕괴의 한 원인이 됐던 소련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소련에게 아프가니스탄이 중요했던 이유도 인도양으로 나아가는 해양 전략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부터 사실상 병합한 크림반도의 항구도시 세바스토폴은 흑해 제해권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꼽힌다. 물론 러시아 해군이 흑해에서 대양으로 나가려면 보스포러스해협과 지브롤터해협을 지나는 만만치 않은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그나마 이 경로는 러시아가 대양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통제권이 있어야 흑해의 제해권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크라이나의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가 지닌 잠재력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우크라이나 인구는 4320만 명 정도다. 세계에서 35번째로 많다. 면적은 한반도 약 3배로 프랑스와 독일보다 큰 유럽 최대 영토국가다. 다양한 광물자원을 지닌 원자재 부국이자 비옥한 토지에서 밀과 옥수수를 생산해 세계에 공급하는 농업대국이다.
소비에트연방 시절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이 군산복합체의 전략산업을 담당한 덕분에 철강, 항공, 우주, 조선, 핵발전분야의 첨단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가치 때문에 미국과 러시아 모두에게 우크라이나는 바둑판의 급소라 볼 수 있다. 내 돌이 있으면 유리하지만 상대 돌이 놓여 있으면 내가 위태로워지는 곳인 셈이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종속되면 중동부 유럽과 구소련 지역에 미치는 미국의 영향력이 헐거워질 수밖에 없다. 러시아가 소련 시절처럼 패권국이 될 발판을 마련하게 되고 미국의 지정학적 안보 이익은 크게 줄어든다.
반대로 러시아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자신들의 지역 패권을 지켜줄 핵심 지역이다. 우크라이나가 서방으로 완전히 넘어가면 러시아가 주도하는 지역 질서에 큰 균열이 생기게 된다.
이런 배경 속에서 미국과 러시아 두 강대국이 충돌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적대적 공존의 양상을 보인다는 분석이 나온다.
홍완석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미국과 러시아의 격렬한 대립은 표면적으로는 헤게모니 투쟁이지만 그 이면엔 다양한 수준의 전략적 의도가 내포돼 있다”며 “다분히 적대적 공존 성격을 지닌다”고 보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지렛대로 한 극한 대립을 인위적으로 연출함으로써 두 나라가 실질적으로 얻고자 하는 지정학적 노림수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미국은 나토에서 리더십을 다시 공고히 하고 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이른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는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유럽연합도 자신들 나름대로 독자 노선을 추구하며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던 터다.
우크라이나를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인접해 있는 유럽에게 러시아가 안보위협이 될수록 유럽은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미국의 셈법이 이 사태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부수적으로 우크라이나 사태가 미국의 방위산업체와 에너지산업체의 이득에도 맞아 떨어지는 측면을 눈겨겨 보는 전문가들도 있다.
러시아는 이 사태를 통해 유럽을 미국으로부터 떼어내려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 그림에서 러시아는 천연자원을 무기로 활용할 게 분명하다.
미러 갈등에 러시아가 천연가스 공급을 조절하면 힘들어지는 것은 유럽이다. 그래서 유럽은 미국과 미묘한 입장차가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을 향한 불만이 누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게는 군사력을 과시하며 과거의 강한 모습을 회복하려는 의도도 있다. 과거 소비에트연방은 미국과 함께 세계질서를 양분하던 패권 세력이었지만 붕괴 이후 쪼개지고 지금의 러시아는 그동안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질서가 미국과 중국의 양극체제로 재편되는 와중에 러시아의 존재감이 점점 희미해진 것도 사실이다.
러시아는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를 다시 존재감을 보이며 유라시아 패권국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는 계기로 만들려고 하는 의도를 품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의 국내 정치상황을 현상황과 결부시키는 분석도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은 올해 말 열리는 중간선거를 통해 국정운영 중간 성적표를 받게 된다. 하지만 지지율은 곤두박질치고 있다. 국외 상황은 국민들의 관심을 돌림과 동시에 바이든 대통령이 지금까지와 다른 정치적 이미지를 만드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상원의원 시절 외교위원장을 지내기도 했고 부통령 시절에도 외교와 안보 쪽에 적잖이 관여했다고 한다. 모처럼 주특기를 발휘할 수 있는 이슈를 접한 것이다. 또 이를 계기로 낮은 지지도를 끌어 올릴 수도 있다.
푸틴 대통령도 최근 비교적 낮은 지지도를 보였는데 그가 여태껏 지지도 하락세를 극복한 효과적 방법 중 하나는 국외 분쟁 상황이었다.
게다가 러시아에서는 푸틴 대통령의 장기집권 피로도가 점차 누적되는 상황이라 그 역시 관심을 외부로 돌리고 국민들을 결집할 필요성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채널Who 류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