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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해 11월 열린 '애널리스트 데이'에서 인수합병을 비롯한 중장기 전략을 발표했다. |
세계는 지금 인수합병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인수합병을 통해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한국은 인수합병 규모가 갈수록 줄고 있다. 국내 인수합병시장이 세계적 흐름과 정반대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규제뿐 아니라 기업가 정신 퇴색 등 여러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 인수합병 ‘빅뱅’의 세계 흐름과 반대인 한국
글로벌 인수합병(M&A)시장 규모는 7월 기준으로 2조 달러를 넘어섰다. 2007년 이후 가장 큰 규모다.
금융정보분석기관인 딜로직에 따르면 올해 글로벌 인수합병시장 규모는 3조51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전문가들은 1890년대 이후 세계 인수합병시장은 주기적으로 성장과 퇴보를 거듭했는데, 올해 큰 물결을 형성할 정도로 커지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한국은 이런 물결을 거슬러가고 있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국내기업의 인수합병 건수는 2010년 811건에서 2012년 525건으로 떨어지더니 지난해에 400건에 머물렀다.
국내에서 대규모 투자를 이끄는 대기업이 점점 인수합병을 주저하고 있는 게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다.
국내 대기업의 인수합병은 올해 1분기 4건에 머물렀다. 2012년 같은 기간에 12건이었던 데 비해 줄었다.
반면 사모펀드가 주도한 인수합병은 2012년 8건에서 11건으로 늘었다. 이는 정부가 지난 3월 ‘인수합병 활성화 방안’을 발표하면서 사모펀드 규제를 풀어준 것도 영향을 끼쳤다.
대기업은 정부의 경제민주화 정책으로 인수합병을 꺼릴 수밖에 없다고 볼멘소리를 낸다. 박근혜 정부에 들어 계열사간 상호출자와 순환출자 등이 제한을 받으면서 이를 해결하는 데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정부는 대기업이 중소 벤처기업을 인수합병을 하면 3년 동안 계열사 편입을 유예해주는 정책을 내놓기도 했다.
김정호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는 “순환출자 금지와 지주회사법상 지분율 규제 등으로 국내기업들이 인수합병에 적극 나서지 못하게 됐다”며 “기업들이 미래 먹거리 발굴에 애로를 겪고 있는 데다 투자의욕마저 위축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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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
◆ 대기업이 적극 인수합병에 나서지 않는 이유
우리나라 기업들이 인수합병을 꺼리는데 ‘기업가 정신’이 약해진 것도 한몫을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국내 대기업들은 창업초기 정부지원을 받아 성장하기도 했지만 창업주들의 과감한 도전이 기업성장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현대경영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이병철 정주영 구인회 회장 등 창업 1세대들이 과감하게 위기를 돌파한 사례들을 극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고 2000년대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기업들은 무리한 인수합병으로 도전하는 것을 꺼린다. 특히 국내 대기업들은 인수합병으로 성장을 거듭했던 STX그룹과 같은 곳이 갑자기 몰락하는 것도 지켜봤다.
국내 대기업은 오너 경영인이 주로 이끌어 간다. 그런데 이들이 인수합병에 소극적으로 변하면서 국내 인수합병시장 전체가 활력을 잃어가는 모양새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오너 경영인들이 인수합병을 주저하는데 대기업의 인수합병에 부정적 여론도 한몫을 한다.
한 리서치업체의 설문조사를 보면 대기업의 벤처기업 인수합병에 대해 조사대상자 가운데 47.3%가 ‘막아야 한다’며 부정적이었다. 인수합병을 ‘권장해야 한다’는 긍정적 답변은 29%에 그쳤다.
대기업들의 상황이 이렇다 보니 스타트업들은 창업할 때부터 대기업들의 투자를 기대하지 않는다. 스타트업들은 국내에서 사업을 하더라도 사무실은 미국 실리콘밸리 등으로 옮기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한 벤처창업가는 “우리나라는 키워놓은 기업을 팔기도 어렵고 제값을 받기도 힘든 환경”이라며 “해외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업모델이 비슷해도 해외에 사무실이 있으면 국내보다 회사 매각가격에 0이 하나 더 붙는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송병락 서울대 명예교수는 “정부의 정책 일관성이 떨어지고 노동유연성도 없는 데다 각종 규제에 시달리다 보니 기업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이라며 “기업들이 다시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해 투자에 적극 나설 수 있도록 새로운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 언제든지 인력 빼올 수 있는 뒷문도 한몫
대기업이 신생 벤처기업을 굳이 인수합병하지 않는 이유로 대기업이 기술인력을 언제든지 유치할 수 있는 뒷문이 열려 있는 점도 꼽힌다.
한정화 중소기업청장은 지난 8월 “대기업이 기술을 보유하고 싶으면 사람이 아닌 기술을 통째로 인수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기업이 벤처기업을 인수합병을 통해 제값 주고 사들여야 기술가치가 올바로 평가될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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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정화 중소기업청장 |
대기업이 인수합병을 통해 기술을 사들이기보다 ‘인력 빼오기’에 주력하고 있는데 그 원인 중 하나가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것이다.
산업통상자원부와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최근 5년 동안 기술유출로 기소된 719명 가운데 형확정자 464명이었다. 그런데 실형은 단 32명(6.9%)에 그쳤다. 집행유예 287명(61.9%), 벌금형 72명(15.5%) 등 대부분 가벼운 처벌로 끝났다.
백재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산업 기술유출 피해는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며 “어렵게 기술개발에 성공한 중소기업의 기술유출은 기업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인 만큼 정부차원의 대책이 시급하다”고 주문했다.
국내 대기업들이 검증된 기업만 원하기 때문에 눈높이를 맞추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시장의 경우 벤처나 중소기업들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더라도 ‘성장가능성’만 놓고도 인수합병이 곧잘 이뤄진다. 그러나 국내 대기업들은 가능한 검증된 기업만 인수합병하려는 분위기가 강하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사업실패에 관대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수 뒤 실패를 할 경우 경영능력에 의심을 곧바로 받게 된다"면서 "이런 문화 때문에 오너 경영자든 전문경영자든 검증된 기업만 찾게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