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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코 교황 |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찾는다. 25년 만의 교황방문에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 종교의 지도자를 넘어서 세계를 대표하는 지도자다. 그는 즉위한지 1년 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그의 영향력은 내로라하는 강대국의 지도자를 넘어서고 있다.
역사상 수백 명의 교황이 있었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세계인들의 환호를 받는 교황은 일찍이 없었다. 왜 세계는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주목하는 것일까?
◆ 프란치스코 교황, 우리시대 중심에 서다
타임은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낸시 깁스 타임 편집장은 “프란치스코 교황은 9개월의 재임기간에 우리시대 핵심대화의 중심에 있었다”며 “그는 교황의 자리를 궁전에서 거리로 옮겼고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가난한 이들과 직면하게 했으며 정의와 자비의 균형을 맞췄다”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겸손하고 청빈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권력자와 부자가 아닌 가진 것 없고 소외받는 사람들 편에 서고 있다. 교황이 주목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권위적 교황이 아니라 인간미 넘치고 친근한 교황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연설 도중 단상에 뛰어올라 교황을 안고 장난치는 아이를 내쫓지 않고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아이가 교황의 의자에 앉아도 그대로 놔뒀다. 이 모습이 전 세계에 퍼지면서 친근한 교황의 이미지는 더욱 넓어졌다.
교황은 거리에서 마주친 병자를 거리낌없이 끌어안고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 병자의 얼굴은 기형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런 일로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이들의 교황이라는 사실이 거듭 확인됐다. 그리고 교황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교황의 이름만 봐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추구하는 바가 잘 드러난다. 프란치스코는 13세기 수도사로 부잣집에서 태어났으나 재산을 모두 포기하고 청빈한 삶을 살며 ‘가난한 자들의 친구’라 불렸다. 프란치스코는 생전에 사제로 서품받은 적은 없었으나 사후 성인으로 시성됐다.
역대 교황 중 프란치스코를 교황명으로 선택한 교황은 프란치스코 이전에 단 한 명도 없었다. 또 교황 이름으로 이전의 교황들이 사용하지 않았던 이름을 선택한 것도 1100년 만에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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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코 교황 |
◆ 여성과 무슬림에게도 세족식
교황은 200명이 넘는 전임 교황들 가운데 누구도 갖지 않았던 이름인 ‘프란치스코’를 선택한 것처럼 취임하자마자 어느 교황도 하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
교황은 처음으로 여성과 무슬림에게 세족식을 거행했다.
세족식은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 앞서 열두 제자의 발을 씻어준 것을 본받아 거행하는 예식이다. 교황들은 매년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성 목요일을 맞아 12명의 발을 씻어줬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전례에 따라 지난해 3월28일 로마 근교 카살 델 마르모 소년원을 찾았다. 그는 소년원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언론 취재를 허락하지 않은 채로 열두 명의 소년원생들의 발을 씻겼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이들의 발을 씻은 후 발에 입을 맞췄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세족식은 다른 교황들과 달랐다. 세족식을 했던 열두명 가운데 여성 두 명과 무슬림 두 명이 포함돼 있었다.
이전의 교황들은 예수의 열두제자가 남자였기 때문에 남성의 발만을 씻었다. 대부분은 사제였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초로 여성과 무슬림에 세족식을 거행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족식 후 미사에서 “주님은 가장 높은 분이고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은 남을 도와야 한다”며 “내가 여러분을 섬기라고 주님이 가르치셨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추기경 시절부터 교도소와 병원을 돌아다니며 세족식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 교황, 동성애자들을 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낮은 자들에게 몸을 굽히는 이런 행보는 시작에 불과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됐을 때 가톨릭 안팎에서 교황에 대해 사회문제에 진보적이나 교리에 보수적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곧 무색해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리를 떠나 낮고 소외된 이들에게 팔을 벌리고 다가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리에 따라 동성애 자체는 반대했지만 동성애자들을 포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7월 기자들과 간담회에서 “동성애자가 선한 의지로 신을 찾는다면 내가 그를 심판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비록 가톨릭이 동성애를 죄악으로 인정할지라도 사회가 동성애자들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또 “우리가 동성애자 커플의 가정이 신앙을 갖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 교황과 달리 동성애에 대해 전향적 태도를 보였다.
심지어 프란치스코 교황은 무신론에 대해서도 열린 시각을 보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탈리아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에 보낸 서한에서 “무신론자들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며 “진심어린 마음에 대해 신의 자비는 한계가 없다”고 말했다. 이는 라 레푸블리카 설립자가 “신을 믿지 않거나 믿음을 추구하지 않는 이들을 신이 용서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추기경 시절에도 파격적인 말과 행동을 많이 했다. 대표적 사례가 사생아에게 세례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추기경 시절 사생아에게 세례주기를 거부하는 동료사제들에게 맞섰다. 그는 “미혼모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주지 않는 사제는 현대의 위선자이며 주님의 백성들을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자들”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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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의 연설 도중 올라온 소년을 용납하는 등 친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 “물신주의는 비인간적 경제독재”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회적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그는 성직자들에게도 교회 밖으로 나가라고 촉구하며 “정치참여는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그는 예수회 학교를 방문했을 때 “정치적 생활은 공동선을 위한 다양한 방법 중 하나”라며 “평신도들은 반드시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은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서 거침없는 비판을 하기로 유명하다. 그러다 보니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회주의자라는 말도 듣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11월 펴낸 첫 번째 교황권고문 ‘복음의 기쁨’에서 현대 경제구조를 비판하며 나눔과 실천을 강조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는 안 된다”며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 죽는 것은 기사가 되지 않지만 주가지수가 조금만 떨어져도 기사가 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라고 한탄했다. 그는 “우리는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 냈다”며 “물신주의는 비인간적 경제독재”라고 비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모두가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눠 갖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이라며 “우리가 가진 재산은 우리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것”이라고 강조했다.
◆ “좋은 마르크시스트도 많이 봤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손을 신뢰할 수 없다”며 “어떤 이들은 낙수이론을 옹호하고 있는데 이는 한번도 입증된 적이 없으며 현존 경제체제를 신성화하는 순진한 발상”이라고 자본주의 이론을 통렬히 비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런 발언을 경계하는 이들도 많다.
가톨릭 내부의 보수파는 “교황은 마르크시스트”라고 평가하고 있으며 심지어 교황에 반대하는 이들은 적그리스도라는 말도 하고 있다. 월가의 금융인들도 “프란치스코는 붉은 교황”이라며 그의 반자본주의적 발언들을 비꼬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에 대해 “나는 마르크시스트가 아니며, 마르크시즘은 잘못된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살면서 좋은 마르크시스트들을 많이 봤다”며 “그래서 마르크시스트라는 말을 들어도 불쾌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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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코 효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인기는 높다. |
◆ 아르헨티나 독재정권에 침묵했나
프란치스코 교황의 본명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민온 철도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기술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한때 나이트클럽 경비원과 청소부로 일하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1세 때 예수회에 들어갔고 32세 때 사제수품을 받았다. 4년 후 종신서원을 하고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장이 됐다.
교황은 당시 아르헨티나의 독재정권에 대해 침묵했다고 비난을 받았다. 이 때문에 추기경이던 2010년 인권단체로부터 고발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취임 이후 그가 독재정권에 탄압당하던 반체제 인사를 숨겨주고 외국으로 도피시켰다는 증언이 나왔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은 “그는 박해받는 이들을 도왔지만 군사독재와 싸우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1980년대 독일로 유학을 가 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오기도 했으며 1992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 보좌주교로 수품을 받았다. 199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이 됐으며 2001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대주교 시절에도 대주교 관저 대신 주교관에 있는 아파트에서 청빈한 삶을 살았다. 그는 운전수를 두지 않고 버스 등 대중교통을 타고 다녔다. 음식도 직접 장을 봐서 해먹었다. 이 때문에 지하철에서 대주교를 마주친 사람들은 진짜인지 의심하기도 했다.
◆ 동성결혼 놓고 아르헨티나 대통령과 공방전
추기경 시절에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르헨티나의 동성결혼 법안 반대운동을 펼쳤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이를 놓고 ‘중세 이단심문관’이라고 교황을 공격했다. 이에 맞서 교황은 페르난데스 대통령을 ‘독재자 선동꾼’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되자 포클랜드섬을 두고 영국과 대화 창구가 돼줄 것을 간청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05년 콘클라베에서도 교황 후보에 오른 적이 있다. 가디언지는 2005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득표 수가 베네딕트 16세에 이어 2위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3월13일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됐다. 역사상 최초의 남미 출신 교황이다. 그는 비유럽국가 출신으로서 1282년 만에 교황이 됐다.
교황 선출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청빈한 삶을 살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싶다”며 교황 관저 대신 게스트하우스 마르타의 집에서 머물고 있다. 그는 여전히 운전기사를 두지 않고 1600cc의 포드 포커스를 직접 몰고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