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 CJ그룹 회장에 대한 항소심 5차 공판이 지난해 7월 열릴 때였다. 당시 이 회장의 변호인단은 CJ헬로비전을 역임한 이관훈 고문 등을 증인으로 내세워 재판부의 선처를 호소했다.
이 고문은 “이 회장이 내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화산업에 대한 신념을 관철시켰다”고 진술했다. 변호인단은 이 회장이 문화산업 강국을 실현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며 한국 문화산업에서 CJ그룹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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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JE&M이 운영하는 대학로 '컬처스페이스nu' |
CJ그룹은 문화콘텐츠 강자다. CJCGV, CJE&M은 방송과 영화의 제작 및 배급에서 확고한 위상을 구축하고 있다.
이재현 회장이 이사장을 맡고 있는 CJ문화재단은 연극이나 뮤지컬 등 공연 제작과 지원사업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그러나 문화산업 종사자들 사이에서 CJ그룹을 비롯해 대기업에 대한 불만이 높다. 막강한 자본력을 갖춘 대기업들이 문화산업에 진입하면서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최근 대학로 공연예술계가 빈사상태에 놓였다. 11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때 아닌 꽃 상여가 등장했다.
'대학로극장'이 폐관위기에 처하자 인근 소극장에서 활동해 온 연극인 100여 명이 “소극장이 죽어갑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선 것이다.
이들은 ‘피와 땀이 서린 곳, 소극장을 살려라’는 문구가 쓰인 만장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며 “문화융성 대학로, 오늘부로 죽었다”는 구호를 외쳤다.
대학로극장은 1987년 6월 문을 연 뒤 대학로의 대표적 소극장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건물주의 임대료 인상통첩을 받아 28년 만에 폐관위기에 처했다. 이 극장은 현재 대학로 소극장 가운데 샘터파랑새극장, 연우소극장에 이어 세 번째로 오래된 곳이다.
지난해 대학로 소극장 146곳 가운데 4곳이 문을 닫았다. 소극장을 위주로 활동하는 연극인들의 생존도 위협받고 있다.
관객이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에서 건물 임대료가 치솟은 탓이다. 연극인들은 영세한 소극장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질 것을 우려한다.
이들은 대기업 등 대자본들이 대학로에 진출하면서 대형극장들에 관객들을 빼앗기고 있다고 지적한다. 대형극장이 들어서면서 상권이 발달해 임대료 인상을 촉발한 것도 소극장을 고사상태에 빠뜨린 원인으로 꼽힌다.
정대경 한국소극장협회 이사장은 “대학로극장의 위기는 시장논리에 의해 무너지는 대학로의 위기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말했다.
대학로 공연장에 진출한 대기업은 CJ그룹과 롯데그룹이 대표적이다.
CJE&M은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근처에 지상 3층, 지하4층 규모의 ‘CJ아트센터’를 짓고 있다. 1030석이 들어가는 대극장과 중극장(570석), 소극장(270석) 등을 갖춘 복합공연장으로 완공되면 대학로 최대 규모의 공연장이 된다.
CJ그룹은 대학로에서 2006년 예술마당 1,2관과 2010년 지상 4층 규모의 컬처스페이스nu를 개관해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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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로 소극장에서 활동해 온 연극인들이 지난 11일 '대학로극장'의 폐관을 우려하며 꽃상여 시위를 벌이고 있다.<뉴시스> |
롯데그룹도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근처에 올 상반기 지상 6층, 지하5층 규모의 총 1천석이 들어가는 공연장을 짓고 있다.
한국소극장협회 관계자는 “대기업 중심의 대형 공연장이 들어서고 공연에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면 영세한 소극장과 연극인들은 길거리에 나앉을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기업 자본이 대학로 연극판에 미칠 부작용은 또 있다. 대형극장에 맞춰 대규모 제작비가 투입되면 대형 뮤지컬이나 스타마케팅을 내세운 공연물만 넘쳐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 연극인은 “연극인들과 소극장들이 배고픔을 참아가며 닦아온 대학로 문화가 대기업의 자본논리에 밀려 다 사라질 판”이라며 “프랑스 등 유럽에서 수백 년 전통의 소극장이 대기업에 밀려 문을 닫는 경우는 없다”고 비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