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압박에 국제 에너지기구 '기후대응 합의' 실패, 글로벌 에너지 전환 공조에 파열음

▲ 18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본부에서 열린 국제에너지기구(IEA) 각료이사회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이 크리스 라이트 미국 에너지부 장관이 발언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비즈니스포스트] 에너지 전환을 위한 국제 공조가 이전보다 좀 더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이 국제회의에서 공개적으로 탄소중립 이행을 거부하고 다른 국가들도 동조할 것을 요구하고 있어서다.

19일(현지시각) 로이터와 파이낸셜타임스 등 주요 외신들에 따르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026 국제에너지기구 각료이사회'는 당초 목적으로 했던 기후대응 합의를 도출하는데 실패했다.

이번 회의에는 국제에너지기구 회원국 33개국, 가입추진 및 준회원국 17개국, 초청국 5개국 등 55개국 장차관급 인사들에 더해 국제기구 14곳, 글로벌 에너지 기업 49곳이 참석했다.

회의 목적은 에너지 시장의 불확실성이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진단하고 안전하고 깨끗한 에너지 전환을 향한 지속적 추진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회의 주제 선정에 강력히 이의를 제기하고 동참을 거부했다.

크리스 라이트 미국 에너지부 장관은 회의장에서 "지난 10년 동안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한다는 파괴적 환상에 사로잡혀 있던 집단적 사고방식이 너무 강했다"며 "미국은 우리가 가진 모든 압박 수단을 동원해 국제에너지기구가 향후 1년 안에 이 의제에서 벗어나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이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기 위한 구체적 수단으로 국제에너지기구 탈퇴가 거론됐다.

로이터에 따르면 미국은 국제에너지기구 연간 예산 2200만 달러(약 387억 원) 가운데 600만 달러(약 86억 원)를 대고 있다. 미국이 빠지게 되면 국제에너지기구는 향후 활동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게 되는 셈이다.

미국이 에너지 전환을 추진하는 개별 국가를 상대로 한 압박도 병행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앞서 17일(현지시각) 미국 연방정부는 캘리포니아주와 영국 정부가 국제에너지기구 회의를 앞두고 친환경 에너지,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 기후적응 등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하자 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미국 압박에 국제 에너지기구 '기후대응 합의' 실패, 글로벌 에너지 전환 공조에 파열음

▲ 18일(현지시각) 크리스 라이트 미국 에너지부 장관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에너지기구 각료이사회 현장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폴리티코와 인터뷰에서 “양측의 협정은 부적절한 행동”이라며 “영국은 이미 충분한 골칫거리인데 그(개빈 뉴섬 캘리포니아주지사)까지 엮였다”고 지적했다.

이어 “영국이 캘리포니아가 했던 짓과 똑같은 일을 한다면 성공적이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라이트 장관은 "많은 유럽국가들이 탄소중립 목표를 정치적 공약으로 내세우며 세계 무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열망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며 "국민의 봉기와 투표를 통해 이같은 목표를 내세운 정당을 몰아내는 것만이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국제에너지기구 회의에 참석한 유럽국가들은 에너지 전환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사를 내비쳤다.

롤랑 레스쿠르 프랑스 재무부 장관은 로이터를 통해 "프랑스와 유럽의 전략적이고 구조적인 해답은 전기화이고 장기적으로는 화석연료 의존도를 줄이는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라이트 장관과 얘기를 해본 결과 원자력 에너지를 포함해 우리가 함께 협력할 수 있는 공통 주제가 충분히 있다고 확신한다"고 설명했다.

에드 밀리밴드 영국 에너지부 장관은 파이낸셜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미국은 자국의 이익이라고 판단하는 바를 추구할 권리가 있고 다른 국가들도 그렇다"며 "그리고 대다수 국가들에 있어 친환경 에너지 전환은 멈출 수 없는 흐름"이라고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이번 회의는 공동성명문이 아닌 각국의 입장을 재확인하는 수준에 그쳤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국제에너지기구 각료이사회가 과거 여러 차례 합의에 이르지 못한 전적은 있어도 공동성명문까지 내지 못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미국의 방해에도 국제에너지기구 회원국들 가운데 과반수는 에너지 전환과 기후대응 필요성을 인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회의 요약본을 보면 "장관들 가운데 대다수는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에너지 전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명시됐다.

한국 기후에너지환경부도 국제에너지기구,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등과 협력해 에너지 안보 확보와 에너지 전환 지속에 관한 협력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호현 기후부 제2차관은 "이번 국제에너지기구 각료이사회는 ‘전기의 시대’를 맞아 재생에너지와 원전의 조화를 추구하는 우리나라의 에너지 정책이 국제사회의 흐름에 부합함을 확인하는 자리였다"며 "인공지능 시대를 뒷받침하기 위한 전력망 유연성 확보, 전력 시스템 최적화 등 이번 회의에서 논의된 의제들을 기반으로 전 세계 에너지 안보의 위상을 한층 강화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손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