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諺文)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조선왕조실록’이 이처럼 훈민정음이 “옛 전자(篆字)를 모방했다”고 기록한 이래 한글의 어떤 글자의 모양을 본떴는지를 두고 수많은 가설이 나왔다.
▲ 백우진 칼럼니스트.
성현은 ‘용재총화’(1525년 간행)에서 한글이 범자(梵字ㆍ산스크리트 문자)를 모방했다고 주장했다.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한글이 몽고 글자를 참고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모방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한글을 본떠 ‘신대(神代)문자’라는 걸 만든 뒤 자기네가 ‘원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이는 일본에서도 진지하게 거론하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주장으로 국내에서는 ‘가림토문자’라는 공상이 등장했다. 단군조선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시쳇말로 ‘국뽕’ 설(조국이나 민족문화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이다. 이 또한 논의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모방설은 근래 들어서도 속속 다른 글자를 들고 나온다. 고대 근동지역 언어ㆍ역사학자인 조철수씨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새겨진 한국 신화의 비밀’(2003)에서 한글이 히브리 문자에서 유래됐다고 주장했다.
조선시대에 등장한 모방설을 반박해보자.
우선 '조선왕조실록'에 남은 "옛 전자(篆字)를 모방했다"는 기록은 형태와 관련한 것이지 제자 원리를 말하는 게 아니다.
‘용재총화’는 한글 창제와 관련해 사실에 어긋난 대목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사실을 기록한 게 아니라 설화를 모은 책이다. 게다가 한글 창제 이후 40년 넘게 지난 뒤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한글 창제 이후 약 300년 뒤에 쓰인 ‘성호사설’의 내용도 사료(史料)로서는 가치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모방설은 이론적으로 반박하는 편이 더 깔끔하다.
이론적으로 한글은 자질문자(資質文字ㆍ feature system)이며 최초이자 유일한 자질문자다.
자질문자로서 한글은 소리의 특성을 낱자의 형태에 반영하고, 비슷한 소리의 낱자는 기본형에서 파생시킨다는 원리에 따라 만들어졌다. ㄱ 에서 ㅋ 을 만들었고 ㅁ 에서 ㅂ 과 ㅍ 을, ㅅ 에서 ㅈ ㅊ 을 추가했다.
모방설은 자질문자로서 한글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낱자의 모양에 집착하는 오류에 빠졌다.
모양은 모양일 뿐이다. 한글 자음 ㅁ 은 한자 구(口)와 동형이다. 그렇다고 해서 ㅁ 이 구(口)를 본떴다고 우기는 격이다. 모방설을 주장하려면 낱자의 제자 원리가 한글과 같고 그 결과 모양도 닮은 글자를 찾아야 한다.
누군가 “영어에도 한글과 제자 원리가 같은 알파벳이 있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고 하자. “B와 P는 한글 ㅁ과 ㅍ에 해당하고, ㅍ 이 발성 방식이 비슷한 자음 ㅁ 에 획이 추가돼 만들어진 것처럼, B도 P를 바탕으로 제자됐다.”
그럴 듯하지 않은가? 여기에 “게다가 B는 소리를 내기 직전의 다문 입술을 옆에서 본 모양을 본떴다”고 추가할 수 있다. 상상의 폭을 넓히면 F도 기본형 P에서 갈라져 나온 자음이라는 분류가 가능하다. 나아가 알파벳 M도 B를 왼쪽으로 돌려놓고 받침 획을 지워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영어 알파벳의 이런 상상은 그러나 상상일 뿐이다. B와 P등에서 찾으려면 찾을 수 있는 이런 형태의 유사성은 우연의 산물이다. 그렇지 않고 의도적으로 그런 제자 원리를 적용했다면 더 많은 알파벳 낱자에 그런 원리가 적용됐을 것이다.
모든 모방설은 한글과 문자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왔다. 언어학자 스티븐 로저 피셔는 ‘문자의 역사’(2010)에서 “한글은 다른 모든 문자로부터 독립적이며 완전하다”고 분석하고 평가했다. “한글은 기존 문자를 개량한 게 아니라 언어학적 원리에 의한 의도적 발명의 산물”이라는 말이다.
나는 한글 자음 창제에 기존 이두 표기가 어느 정도 영감을 주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두는 한자의 뜻과 소리로 우리말을 표기했다. ‘없거든’은 ‘無去等’으로 적었다. 無는 뜻으로 읽었고 去와 等은 소리로 읽었다.
乙은 조사 ‘을’로 쓰였다. 또 돌(乭) 같은 글자를 만드는 데 받침처럼 들어갔다. 乭 은 예를 들어 사람 이름 돌손(乭孫)을 표기할 때 활용됐다. 이로 미루어 乙은 ㄹ 발음으로 통했고, 이는 한글을 창제할 때 참고가 됐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ㅁ 대신 쓰인 音도 이러한 예다. 音 역시 ㅁ 받침 자리에 들어갔다. 놈쇠를 老音金이라고 적었다. 金은 쇠로 읽었다. 흥미로운 대목은 ‘音’과 ‘음’의 형태가 유사하다는 것이다. 音을 흘려 쓴 초서는 더 비슷하다. 音의 초서에서 日은 ㅁ 처럼 쓴다.
끊이지 않는 모방설은 한글이 우수하다는 방증이다. 모방설의 심리적 뿌리는 ‘이렇게 뛰어난 문자가 갑자기 만들어질 리는 없다’, ‘이렇게 완벽하게 다듬어지기까지 중간 단계의 문자가 분명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일본에서 나온 신대문자 모방설은 부러움에서 비롯됐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모방설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소리가 그대로 문자가 되고 문자가 스스로 소리로 되살아나는 듯한 한글의 경이로움을 궁리하다보면 나도 ‘세종은 도대체 한글을 어디에 착안해(무엇을 모방해?) 만들었을까’ 상상하게 된다.
백우진은 글쓰기 강사로 활동한다. 책 '백우진의 글쓰기 도구상자', '글은 논리다'를 썼다. 호기심이 많다. 사물과 현상을 관련지어 궁리하곤 한다. 책읽기를 좋아한다. 글을 많이 쓴다. 경제·금융 분야 책 '그때 알았으면 좋았을 주식투자법', '안티이코노믹스', '한국경제실패학'을 썼다. 마라톤을 즐기고 책 '나는 달린다, 맨발로'를 써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