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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 파트리시아 보틴 산탄데르 CEO |
보수적인 유럽 은행계에 처음으로 여성 회장이 탄생했다.
스페인 대형은행 ‘산탄데르’의 에밀리오 보틴 회장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장녀인 아나 보틴이 회장에 올랐다.
보틴은 지난 30년 동안 은행업에 종사하며 산탄데르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 명의 반대도 없이 회장이 됐다.
산탄데르은행은 10일 이사회를 열고 아나 보틴을 신임 회장으로 임명하는 안을 만장일치로 통과했다고 밝혔다. 이사회는 “아나 보틴은 은행 내에서 자질과 경험을 충분히 쌓았고 스페인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명성을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유로존 18개국 주요 은행에서 여성 회장이 탄생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유로존 내 10대 대형은행에서 여성임원의 비율은 5%에 불과하다. 미국 10대 은행의 여성임원 비율이 16%인 것과 비교해 3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이 정도로 보수적인 유럽 은행에서 보틴은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아나 보틴은 세계 20대 은행의 현직 CEO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기도 하다. 또 지난 100여 년간 산탄데르은행 회장직을 맡았던 보틴가문은 4대째 경영승계라는 기록도 세웠다.
로이드 블랭크페인 골드만삭스그룹 CEO는 “아나 보틴은 이미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은행가 중 하나”라며 “그녀의 경험과 판단력, 강력한 경영 능력 덕분에 산탄데르는 앞으로도 세계적 금융기관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나 보틴은 에밀리오 보틴 전 회장의 여섯 자녀 가운데 첫째로 태어났다. 미국 펜실베니아주에 있는 사립여자대학교 브린 모어 대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수료했다. 이어 JP모건체이스 마드리드 지점에 입사한지 2년 만에 라틴아메리카 담당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그의 나이 24세 때였다.
보틴은 1988년 스페인으로 돌아와 산탄데르 은행에 합류했다. 2002년 산탄데르 은행의 자회사인 바네스토 은행의 최고경영자가 됐고 2010년 산탄데르 영국법인의 CEO가 됐다. 보틴은 영국법인 CEO로 일하며 고객을 크게 늘려 영국법인이 산탄데르 은행 전체 수익의 20%를 담당할 정도였다.
보틴은 스페인이 유로존 재정위기로 휘청대던 2012년 은행의 정상화를 이끌며 경영능력을 검증받았다. 2011년 포브스가 선정한 파워우먼 77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남자들과 경쟁하며 능력을 인정받아 그룹 내외부는 일찌감치 보틴을 차기경영자로 여겼다.
아나 보틴은 회장으로 지목된 뒤 발표한 성명에서 “아버지의 부재로 나와 가족에게 어려운 시기지만 이사회가 보여준 신뢰와 믿음에 감사하며 새로운 역할에 대한 책임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그의 아버지 에밀리오 보틴 회장은 지방은행에 불과하던 산탄데르를 시가총액 기준으로 유로존 최대은행으로 성장시킨 주역이다. 그는 ‘스페인의 비공식적 왕’이라고도 불렸다. 지난 9일 심장마비로 79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산탄데르은행은 1857년 스페인의 작은 지방은행으로 시작했으며 1909년 에밀리오 보틴1세가 회장직에 오른 후부터 경영권이 이어져왔다. 보틴2세는 산탄데르은행을 스페인의 7대 은행으로 키웠다.
3대 경영승계자 보틴3세는 적극적 인수합병과 해외사업 확장을 거듭해 2000년대 들어 산탄데르은행을 시가총액 기준 유로존 최대은행으로 키웠다.
다만 보틴3세는 중국 등 신흥시장으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해 지난 몇 년 동안 경영부진을 자초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보틴이 4대째 회장직을 이어받으며 산탄데르가 보틴가문과 인연을 끊을 기회를 놓쳤다는 비판도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보틴가문은 단 2%의 지분만으로 4대째 산탄데르의 경영권을 쥐고 있다”며 “인수합병으로 흐지부지된 은행의 장기전략을 보다 명확히 해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