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의 마음] 상처가 왜 눈물 모양 하고 있지 않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 피해 사실이 알려졌을 때 우리는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5·18민주화운동 피해 증언자 모임 '열매' 관계자들과 5·18 성폭력 피해자 성수남 할머니가 11월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비즈니스포스트] 뉴스를 보다 보면 인간의 마음이란 얼마나 복잡하며, 얼마나 쉽게 단정지을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성폭력 피해에 대한 소식을 접할 때가 특히 그렇다. 

누군가의 피해 사실이 드러날 때마다 반복되는 광경이 있다.

사람들의 시선은 피해자의 ‘피해자다움’ 여부로 향하면서 그가 SNS에서 웃고 있는 사진이 심판대에 올라온다.

이어서 사건 직후 가해자 또는 지인과 나눈 대화가 캡처되어 돌아다닌다.

“정말 안 좋은 일을 당한 사람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할 수 있나?, “왜 명랑하게 지냈지?”, “왜 가해자와 즐겁게 연락을 했지?” 같은 질문들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피해자는 세상이 기대하는 모습으로 존재할 때만 인정할 수 받을 수 있다는 듯이.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정신의학과 심리학은 충격적 사건 후의 반응이 꼭 일관적인 슬픔처럼 예측 가능한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비일관적이고 모순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이야기해왔다.

피해 직후 울지 않고 평소처럼, 아니 심지어 평소보다 더 즐겁게 보이거나, 가해자와 친근하게 연락을 이어가는 행동은 거짓의 증거가 아니라 심리적 생존을 위한 자동 반응이다.

사람은 감당하기 버거운 충격에 직면했을 때 감정 체계를 일시적으로 꺼두는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정서적 마비(emotional numbing) 상태가 된다. 너무나 강렬한 감정을 그대로 느끼는 대신 차단함으로써 스스로가 붕괴되지 않도록 하는 일종의 보호 전략이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피해 이후 스스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로 말하고 웃고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다양한 강도의 해리(dissociation)를 경험할 수도 있다. 당장의 자아가 충격을 감당하기 힘들 때, 마음은 자신과 상황을 분리시킨다.

그렇기에 감정과 행동은 어긋나며, 마치 오토파일럿을 작동시키는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

그래서 피해자는 속으로는 두려움과 혼란을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하게 지내면서 주변인 또는 가해자에게 명랑한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인간은 위기를 겪을 때 오히려 평소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아니, 억지로라도 그렇게 행동하려 한다.

공포와 무력감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외부 세계라도 일단 ‘정상적’으로 유지시키려는 본능적 반응이다. 자신의 마음을 제외한 나머지 일상이 그대로이면 괜찮아질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반응은 꼭 강력한 사건의 피해자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일상의 크고작은 스트레스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반응할 때가 있다.

나 역시 스트레스를 몹시 받은 직후에 걸어가면서 단체방에 무심코 ‘ㅋㅋㅋㅋㅋㅋㅋ’를 보내며 웃고 농담을 던진 적이 있다.

그런 순간의 나는 진짜 즐거운 감정 때문이 아니라, 마음속 혼란을 들여다보지 않기 위해 일시적으로 더 ‘명랑해졌던’ 것이다. 이것은 연기와는 다르며, 무의식에서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기제이다. 
 
이런 비일관적인 행동은 심지어 강력 범죄 가해자의 행동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범죄행각 후 가해자가 치킨을 시켜 먹었다거나, 친구들과 클럽에서 놀았다는 보도가 나오면 사람들은 곧바로 사이코패스라며 엄청난 비난을 퍼붓는다. 물론 반사회적 성향이 그러한 행동을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충격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난 직후, 어떤 이들은 공포와 혼란 때문에 오히려 감정이 꺼진 상태에 빠질 수 있으며, 심리적으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 평소처럼 행동하게 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가해자를 옹호하기 위한 설명이 아니며, 심지어 가해자도 그렇다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단 하나, 겉으로 보이는 행동은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언뜻 이해되지 않는 그 모든 행동은 인간이 고통스러운 상황을 견딜 때 나타나는 생존 방식이다.

그러므로 피해 사실이 알려졌을 때 우리는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는지에 대해 물어야 한다. 

상처가 항상 슬픈 얼굴로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것, 상처의 모양은 다양하다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상처입은 이들이 겪은 진실을 더 잘 볼 수 있다.  반유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고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여성학협동과정 석사를 수료했다. 광화문에서 진료하면서, 개인이 스스로를 잘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친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책 '여자들을 위한 심리학', '언니의 상담실', '출근길 심리학'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