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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 |
재벌은 영어로도 ‘Chaebol’이라고 표현된다. 사전적 의미로 총수나 그 가족이 지배하는 기업집단을 가리킨다.
원래 일본에서 유래한 용어로 알려졌지만 일본의 경우 2차 대전을 전후해 ‘자이바쯔’와 ‘게이레츠’라는 용어로 각각 재벌과 기업집단을 분리해 사용한다.
우리나라도 공정거래위원회가 대규모 기업집단이라고 별도로 정의하지만 잘 구분되지 않는다. 대기업=재벌이란 인식이 강한 것은 여전히 국내 대다수 기업들이 총수 일가의 가족경영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뒤에 가문(family)을 뜻하는 ‘-가’로 부르는 까닭이기도 하다.
롯데그룹은 국내 재계 5위의 기업집단이지만 롯데가의 위상은 어쩌면 그 이상이다. 현대가나 삼성가의 경우 1세대 창업주는 이미 고인이 된지 오래다. 롯데가에서 창업주인 신격호 총괄회장이 90대의 노령에도 건재한 것과 대비된다.
롯데가는 국내 재벌가에서도 화려한 혼맥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신 총괄회장은 5남5녀의 장남으로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 등 형제들까지 포함해 범롯데가의 혼맥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국내에서 재계와 법조, 학계에 거미줄처럼 뻗어있다.
롯데가는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성장사를 써온 덕분에 일본에서도 적지 않은 위상을 행사해왔다.
신동빈 회장만 해도 부인 오고 미나미씨가 일본 최대 건설사로 손꼽히는 다이세이(大成)건설의 오고 요시마사 부회장의 둘째 딸이다. 신 회장이 결혼할 당시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총리가 중매부터 주례까지 맡았던 것만 봐도 롯데가의 위상이 현해탄 너머에서까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런 롯데가가 사상 초유의 풍비박산 위기를 맞고 있다.
검찰은 26일 신동빈 회장에 대해 1700억 원대 횡령 및 배임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신동빈 회장의 이복 누이인 신영자 롯데장학재단이사장은 80억 원대의 비리를 저지른 혐의로 구속수감된 상태다.
검찰은 신격호 총괄회장과 장남인 신동주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 내연녀 서미경씨와 그의 딸 신유미씨에 대해서는 불구소기소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재벌기업 수사에서 일가가 한꺼번에 재판에 넘겨지는 경우는 아직까지 유례가 없다.
SK그룹은 2012년 시작된 비자금 수사에서 최태원 회장과 동생 최재원 수석 부회장이 횡령 등 혐의로 동시에 기소돼 형제가 나란히 실형을 선고받은 적이 있다.
효성그룹의 경우 조석래 회장과 장남 조현준 사장이 함께 나란히 기소돼 부자가 함께 유죄판결을 받았다.
태광그룹에서는 2011년 검찰 비자금 수사에서 이호진 회장이 모친인 이선애 전 상무와 모자 동시 법정구속 사태를 맞은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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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
전례에 비춰볼 때 롯데그룹 오너일가는 지금까지 재벌가 수사로 유례없는 불명예의 기록을 안게 된 셈이다.
일가 한두 명이 아닌 총수를 포함해 직계 가족 가운데 무려 5명이 재판정에 설 운명을 맞게 됐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벌어진 원죄는 이유를 불문하고 신 총괄회장을 비롯한 오너일가에 있다. 롯데그룹은 지난해 경영권을 둘러싼 진흙탕 싸움의 과정에서 구시대적이고 전근대적인 족벌경영의 폐해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손가락질로 임원을 해임해 ‘손가락 경영’이란 비아냥을 받기도 했고 쥐꼬리만한 지분구조의 취약성으로 지탄을 받기도 했다. 국내에서만 무려 90여 개 계열사를 거느린 거대기업의 족벌경영 폐해가 총수 직계가족 전원의 사법처리 위기라는 업보를 낳은 것이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신영자 이사장은 구속된 지 70여 일 만인 12일 법원에 보석을 신청한 상태다. 서미경씨 모녀는 수천억 원대 증여세 탈루 혐의를 받고 있으나 일본에서 체류하며 들어올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검찰수사와 구속이 이뤄지면 보석신청과 해외도피는 너무 뻔한 공식이다.
롯데그룹에 대한 검찰수사는 신동빈 회장의 구속영장 청구로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다. 검찰 역시 재계 5위인 롯데 수사에서 부담이 컸을 것이다. 전 정권의 비호를 받은 기업을 겨냥한 것이라는 등 이런저런 음모론도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롯데그룹의 기대와 재계 안팎의 예상을 깨고 신동빈 회장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한 이유는 앞으로도 국내 재벌기업에서 이런 유사 사례가 있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능력과 무관하게 경영권 세습이 당연한 일로 간주되고 가족이나 친인척 일감몰아주기 등의 관행이 끊이지 않는 한국식 기업문화가 여전한 지금, 이번 사태가 과연 롯데가의 위기일 수만은 없다.
롯데그룹 비자금 수사는 여러모로 국내 기업수사에서 재벌가와 관련한 상징적 의미가 크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