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2024년, 한국 전자산업이 위기에 놓였다. 가격경쟁력을 앞세운 중국 기업이 디스플레이를 비롯해 배터리, TV, 가전 등 전방위적으로 국내 기업과 경쟁을 벌이며 시장점유율을 확대하고 있다. 여기에 오랫동안 침묵하던 일본 전자 기업들도 부활하고 있어 자칫 한국 전자산업이 '넛크래커'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기술 초격차를 유지하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에서도 머지 않아 중국의 도전을 받을 것이라는 위기감까지 생기고 있다. 현재 한국 기업들이 맞딱드린 상황을 짚어보고 이를 해결할 방안을 3회에 걸쳐 싣는다.
[비즈니스포스트] 대한민국 산업계가 글로벌 시장을 선도할 차세대 먹거리로 배터리가 주목을 받고 있지만 녹록치 않은 상황에 노출되고 있다.
중국기업들이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글로벌 시장에서 영향력을 급속도로 키워가는 가운데 장기적으로는 일본과 유럽도 ‘K배터리’를 견제하는 경쟁상대가 될 가능성이 떠오른다.
▲ K배터리업계가 가격경쟁력을 앞세운 중국의 공세와 함께 장기적으로 일본과 유럽의 견제를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2일 배터리업계에 따르면 중국 CATL의 글로벌 시장 잠식 추세가 이어진다면 올해는 중국을 제외한 글로벌 시장에서도 LG에너지솔루션이 1위 자리를 넘겨 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배터리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가 집계한 2023년 11월 글로벌(중국 제외) 전기차용 배터리 사용량조사를 살펴보면 LG에너지솔루션은 78.5GWh의 사용량을 보이며 선두를 차지했지만 CATL(78.4GWh)과 격차는 0.1GWh 안팎으로 좁혀졌다. 점유율로 따졌을 때 두 회사 모두 27.7%로 무의미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
중국까지 포함한 시장점유율에서는 CATL이 LG에너지솔루션을 크게 앞지른지 오래다. LG에너지솔루션은 중국 포함 시장점유율에서는 CATL뿐 아니라 또 다른 중국업체 BYD에도 밀리며 3위에 머물고 있다.
CATL이 글로벌 배터리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대하고 있는 속도를 고려하면 올해에는 중국을 제외한 통계에서도 LG에너지솔루션을 앞지를 가능성이 작지 않은 셈이다.
중국 배터리 기업의 가장 큰 경쟁력은 저렴한 가격이다.
물론 중국기업들이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광대한 자국 내수 시장과 정부 차원의 전폭적 지원도 빼 놓을 수 없지만 CATL과 BYD와 같은 상위권 배터리기업들은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중국기업의 주력제품인 리튬인산철(LFP)배터리는 국내 기업들의 삼원계배터리와 달리 코발트와 니켈 등의 고가 원료를 쓰지 않아 생산비용이 30%가량 덜 든다. 전기차 원가에서 배터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40%를 넘는 만큼 저렴한 배터리는 전기차가 가격 경쟁력을 갖추는 핵심 요소일 수밖에 없다.
가격 경쟁력은 시장의 대중화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경쟁 요소로 꼽힌다. 전기차 침투율이 늘어날수록 완성차업체들이 점차 저가의 리튬인산철배터리 채택률을 높이는 이유다.
게다가 중국은 배터리 원료와 각종 소재, 셀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공급망을 구성해 놓았다.
핵심 금속인 리튬을 보더라도 중국의 글로벌 영향력이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은 리튬 매장량 순위만 놓고 보면 세계 10위권이지만 제련 공정 점유율은 세계에서 압도적 선두를 차지하고 있다. 블룸버그 자체 조사에 따르면 2023년 중국의 리튬 제련시장 점유율은 70%에 다가섰다.
리튬뿐 아니라 망간, 코발트, 흑연, 니켈 등 다른 원료 금속에서도 과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지난해 말 시행한 흑연 수출통제 정책은 중국이 공급망 영향력을 지렛대로 삼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준 단적인 사례다. 현재로서는 국내 배터리 관련 업체들이 받는 영향이 크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지만 중국 정부의 결정에 따라 언제라도 생산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판단 아래 긴장감이 유지되고 있다.
일본과 유럽도 K배터리의 경쟁상대로 떠오르고 있다.
일본 파나소닉은 지금도 중국을 제외한 배터리시장에서 LG에너지솔루션과 CATL에 뒤를 잇는 3위 회사다.
특히 테슬라를 핵심 고객사로 둔 덕분에 북미 시장점유율이 높은 편이다. 2022년 기준으로 파나소닉의 북미 시장점유율은 50%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일본 완성차기업 토요타의 전고체배터리 개발 움직임도 K배터리업체들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행보다.
전고체배터리는 현재 대다수 전기차에 탑재되는 리튬이온배터리보다 크기와 무게를 줄이고 주행거리를 크게 늘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는 차세대배터리다.
리튬이온배터리와 달리 액체 상태 전해질이 아닌 고체 상태 전해질을 사용하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더 단단하고 안정적이란 특징을 지니고 있어 폭발이나 화재 위험은 적지만 에너지밀도는 더 높다.
토요타는 삼성SDI와 함께 가장 적극적으로 전고체배터리 개발에 나서고 있는 기업으로 꼽힌다. 두 회사 모두 전고체배터리의 상용화 시점을 2027년으로 잡고 있다.
토요타의 전고체배터리 개발·상용화가 뜻대로 될 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성공한다면 전기차와 배터리 산업 전반에 걸쳐서 게임체인저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유럽 역시 자체적으로 배터리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유럽에는 경쟁력과 업력을 두루 갖춘 완성차기업 다수가 포진해 있는데 전기차 전환 흐름에서 제조원가의 상당 비중을 차지하는 배터리를 내재화해야 전기차 시대에도 시장 지위를 지킬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 스웨덴에 위치한 노스볼트 배터리 연구개발(R&D)센터. <노스볼트>
최근 스웨덴 배터리기업 노스볼트는 유럽 내에서 증설을 추진하며 빠른 속도로 유럽 시장점유율을 확대해 나갈 채비를 하고 있다. 스웨덴뿐 아니라 캐나다와 독일에 대규모 생산기지를 구축하며 공격적으로 사업을 넓혀가고 있다.
노스볼트는 BMW와 폴크스바겐, 볼보 등 유럽 완선차기업으로부터 550억 달러(약 73조2천억 원)의 수주를 확보한 것으로 파악된다.
물론 K배터리업체들이 선제적으로 미국과 유럽에 경쟁사들보다 한 발 앞서 생산능력을 갖춰놓은 만큼 향후에도 K배터리의 시장 지위가 유지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미국과 유럽 모두 전기차와 배터리 생태계에서 중국기업을 배제하는 정책기조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전기차 3대 시장(미국, 유럽, 중국) 가운데 두 곳에서 생산능력이 가장 뛰어난 K배터리업체가 당분간 반사이익을 누릴 여지도 있다.
다만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유럽의 핵심원자재법(CRMA)와 같은 정책이 중장기적으로는 중국뿐 아니라 한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도 떠오른다.
나이스신용평가는 ‘미국의 산업정책과 신용위험 : 2차전지산업’ 보고서를 통해 “미국이 자국 전기차와 2차전지 산업 강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 의존도를 낮출 것이며 파나소닉을 포함한 일본 회사들과 노스볼트 등 유럽 신규 기업들의 시장 참여를 유도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장기적으로 IRA의 의도대로 미국 제조업 강화와 친환경/안보 측면에서 자국 2차전기 기업을 육성하고자 한다면 중국의 2차전지 산업 육성 방식과 유사하게 자국 기업을 향한 지원이 집중될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류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