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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팀 쿡 애플 CEO(왼쪽)와 버지니아 로메티 IBM CEO |
애플이 30년 전 PC시장에서 앙숙이었던 IBM과 손을 잡았다. 같은 시장을 두고 경쟁했던 두 기업이 시장환경의 변화로 서로의 취약점을 보완해주는 동지가 된 것이다.
PC시대가 저물고 모바일시대가 열린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는 생전에 IBM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는데 이번 동맹으로 애플이 '잡스의 애플'에서 '팀 쿡의 애플'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팀 쿡 애플 CEO와 버지니아 로메티 IBM CEO는 ‘iOS용 IBM 모바일퍼스트’라는 이름의 업무용 어플리케이션(앱)들을 공동으로 개발하는 파트너십 협약을 체결했다고 15일(현지시각) 밝혔다.
앞으로 두 기업은 아이폰과 아이패드 전용 기업용 앱을 100개 이상 개발할 계획이다. 소매업, 건강의료, 금융, 통신 등 각 산업 분야에 특화된 앱으로 보안, 데이터 분석, 클라우드 서비스 등을 지원한다.
IBM은 애플과 맺은 독점계약을 통해 기업용 앱을 탑재한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올 가을부터 기업고객에게 판매한다.
◆ 격변하는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 손 맞잡다
애플은 이번 제휴로 개인고객을 넘어 기업고객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또 IBM은 기업용 소프트웨어를 기업용 모바일 기기로 확대할 수 있게 됐다.
이번 제휴는 두 기업의 필요에 의해 서로의 취약점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이뤄졌다. 기업고객 유치가 필요한 애플과 모바일 시장에서 클라우드, 데이터 분석 솔루션 판매가 절실한 IBM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는 분석이다.
애플은 예전부터 회사의 주력 상품군인 아이폰과 아이패드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점이 문제로 지적받았다. 게다가 최근 개인고객 위주인 스마트폰 시장의 성장세가 둔화되고 있어 애플이 기업 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요구가 많았다.
그러나 애플이 당장 기업으로 눈을 돌리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기업시장은 보안성과 안정성이 중요하고 기업차원에서 기기 관리를 쉽게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제휴를 통해 애플은 한층 쉽게 기업시장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됐다.
팀 쿡 애플 CEO는 미국의 IT전문매체 리코드와 인터뷰에서 “애플은 모든 기업고객들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쪽으로 시선을 넓힐 필요가 있었다”며 “이번 제휴를 통해 애플은 큰 시장 공략의 문을 열게 됐다”고 말했다.
기업 업무용으로 아이패드 활용도가 높아지면 최근 주춤했던 아이패드 판매량도 다시 상승세를 탈 것으로 예측된다. 시장조사기관 IDC에 따르면 지난 1분기 아이패드 출하량은 전년 동기보다 16.1%나 감소했다.
IBM 역시 이번 제휴로 모바일 시장에 본격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됐다. 기업용 소프트웨어에 주력하고 있는 IBM은 최근 8분기 연속 매출이 하락했다.
미국의 경제전문매체 블룸버그는 “IBM이 모바일 시장을 새로운 수익원으로 설정한 만큼 이번 협약으로 클라우드 컴퓨팅 부문을 모바일로 이동시키는 데 속도를 붙일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IBM이 단순한 디자인과 손쉬운 사용성을 앞세워 수많은 팬을 만든 애플의 노하우를 전수받으면 신규 시장을 손쉽게 공략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버지니아 로메티 IBM CEO는 “애플이 혁신을 통해 개인의 삶의 방식을 바꿨듯이 산업체와 기업들의 방식 역시 바뀌게 될 것”이라며 “모바일 시장이라는 거대한 과제를 해결하는데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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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브 잡스는 IBM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
◆ PC시대에서 모바일시대로, 적에서 동지로
두 기업의 제휴는 비즈니스 세계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두 기업의 관계가 적에서 동지로 바뀐 것을 두고 PC시대가 저물고 모바일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분석도 나온다.
애플은 스티브 워즈니악이 1976년 세계 최초로 PC를 만들며 PC시장의 포문을 열었다. 그 뒤 IBM이 가격을 낮춘 PC를 선보이며 1981년 시장에 진입했다. 당시 스티브 잡스는 IBM의 PC시장 진입에 대해 “IBM을 환영합니다”라는 광고를 내는 등 여유있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IBM은 자신들이 정한 5년간 판매목표량 24만 대를 출시 1주일 만에 뛰어넘는다. 전세가 뒤바뀐 것이다.
애플은 1984년 매킨토시를 선보이면서 IBM을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에 비유하기도 했다. 당시 독점적 지위를 누리던 IBM을 비판하며 그 옹호자들을 독재자를 추종하는 무리로 묘사한 것이다.
이후 잡스는 PC의 판매부진과 경영전략을 놓고 그가 영입한 존 스컬리와 갈등을 빚었고 결국 쫓겨나다시피 애플에서 나온다. 잡스의 축출과 함께 애플도 PC시장에서 설 자리를 잃고 만다. IBM과 마이크로소프트(MS), 인텔이 합작해 '윈텔'(Win-tel) 연대를 만들고 전 세계 PC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가 다시 복귀한 1997년까지 애플은 전 세계에 10%도 안 되는 마니아들이 사용하는 PC를 만드는 기업으로 전락한다. 잡스는 IBM에 복수를 준비하면서 2007년 ‘아이폰’을 내놓는다.
스티브 잡스는 생전 IBM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IBM 역시 마찬가지다. IBM은 정보가 유출된다는 이유로 아이폰을 쓰는 직원이 애플의 클라우드 서비스 ‘아이클라우드’에 자료를 저장하지 못하게 했다. 아이폰의 음성인식 기능인 ‘시리’의 사용도 금지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 많은 것이 달라졌다. 두 기업은 예전처럼 단순하게 PC시장 주도권을 잡기 위해 다투는 경쟁자가 아니다. 각자 모바일 기기와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기업이 됐다.
애플은 지금도 PC를 판매하고 있지만 무게 중심은 아이폰과 아이패드 등으로 넘어온 지 오래다. IBM은 PC사업 부문을 2005년 중국 레노버 그룹에 매각했다.
팀 쿡은 월스트리트저널과 인터뷰에서 “1984년엔 경쟁자였지만 2014년엔 두 회사만큼 서로를 잘 보완해주는 파트너를 찾기 힘들 정도”라고 설명했다. 그는 아예 이번 제휴가 “역사적인 거래”라며 “IT 역사의 거대한 이정표로 기억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