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삼성전자의 2023년은 얼핏 잿빛으로 보인다. 핵심사업 메모리 분야의 악화한 업황을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글로벌 거시경제 환경이 어려운 시기는 강자를 더욱 강자답게 만들어 주는 때이기도 하다.
삼성전자가 업황이 나쁠 때 125조 원에 이르는 막대한 현금성 자산으로 투자를 더욱 강화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메모리 후발주자와 격차를 더욱 벌릴 것이라는 전망도 만만치 않다.
▲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023년을 파운드리 분야에서 대만 TSMC를 추격하는 데 속도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 |
그런데 삼성전자에게 메모리 분야 위상 강화보다는 올해 기대를 걸어볼 만한 분야가 따로 있다.
바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이다. 삼성전자는 3나노 공정 신기술을 앞세워 2023년을 파운드리 세계 1위 TSMC를 추격하는 원년으로 삼을 가능성이 있다.
겉으로만 보면 아직은 삼성전자 파운드리에 기대를 걸 만한 요인이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파운드리업계 뉴스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각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019년 4월 '2030년 시스템반도체 1등'이라는 포부를 세상에 내놓은 뒤에도 시스템반도체의 핵심인 파운드리사업은 큰 변화가 없었다.
이 회장이 야심찬 선언을 내놓은 뒤 4년이 다 되어 가는 동안에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은 오히려 정체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와 달리 TSMC는 애플, AMD, 퀄컴, 엔비디아 등 세계 최고의 IT기업 주문을 싹쓸이하다시피 하며 파운드리 세계 최강자의 위상을 과시했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TSMC는 세계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3분기 기준 56.1%에 이른다. 같은 기간 삼성전자 점유율(15.6%)의 4배에 가깝다.
그동안 'TSMC 보유국' 대만의 언론들은 이런 상황을 즐기듯 보도했다.
삼성전자가 투자재원을 메모리와 파운드리에 나눠 투입하는 동안 TSMC는 파운드리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점 등 각종 이유를 들며 삼성전자가 TSMC를 영원히 쫓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바라봤다.
삼성전자와 TSMC의 지금까지 시장점유율 차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파운드리 사업을 시작한 TSMC의 업력은 35년에 이른다.
이와 달리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사업을 시작한 것은 2005년이다. 초기 연구단계까지 포함한 전체 업력부터가 TSMC의 절반밖에 안 된다.
더구나 삼성전자가 사업부를 꾸려 파운드리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2017년부터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사업에 진심으로 뛰어든 뒤 단 5년 만에 세계 2위까지 올라선 것이다.
삼성전자가 아무리 메모리 세계 1등이라고 해도 이는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메모리와 파운드리는 같은 반도체산업 같지만 완전히 다른 성격의 사업이다.
메모리는 소품종 대량 생산으로 업황에 크게 좌우받지만 파운드리는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업황 보다는 고객과 관계가 더욱 중요한 분야다.
TSMC와 삼성전자 사이에 파운드리 사업에서 격차는 아직 크다. 가장 큰 원인으로는 TSMC가 일찌감치 투자에 나선 덕분에 감가상각이 끝난 설비에서 생산을 하면서 수익성이 월등하다는 점이 꼽힌다.
또 오랜 업력 탓에 생산 안정성이 좋아 반도체 설계기업(팹리스)이 한번 파운드리를 선택하면 쉽사리 바꾸지 않은 업계 속성상 TSMC는 파운드리 세계 최강자의 지위를 오랫동안 지켜낼 수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지난해 6월 세계 최초로 3나노 파운드리 공정 양산에 나서면서 판도가 달라지게 됐다.
특히 삼성전자는 3나노 공정부터 반도체 구성요소인 트랜지스터 구조에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기술을 적용했다.
GAA는 트랜지스터에서 전류가 흐르는 ‘채널’과 채널을 제어하는 ‘게이트’를 4면에서 맞닿게 해 전류 흐름을 더 세밀하게 조절하는 기술을 말한다. 기존 '핀펫' 기술보다 반도체 전력 소비와 성능을 크게 개선할 수 있다.
TSMC 역시 삼성전자보다 6개월가량 늦은 지난해 말부터 3나노 공정 양산에 들어갔지만 기존 핀펫을 약간 개선한 수준의 기술을 적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자국 기업에 편파적인 디지타임스 등 대만언론에서는 TSMC가 삼성전자보다 3나노 공정 수율(양품비율)이 높고 3나노 다음 세대 공정도 삼성전자보다 빠르게 개발할 것이라는 보도를 내놓고 있다.
하지만 TSMC의 3나노 공정 생산능력은 아직 미미한 수준에 그치며 그마저도 최대 고객인 애플 물량을 소화하는 데 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더구나 올해부터 고성능 컴퓨팅용 반도체 수요가 빠르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 확장현실기기 시장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그런 만큼 반도체 전력 효율과 성능 향상이 더욱 중요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신기술에 따라 파운드리 업계의 판이 흔들릴 공산이 커진 셈이다.
삼성전자가 신기술 GAA를 앞세워 3나노 공정을 올해 빠르게 안정화해 고객사를 늘려나간다면 지금까지 TSMC가 왕좌를 지켰던 구조와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충분하다.
팹리스들이 파운드리 업체를 바꾸는 데 따른 위험(전환비용) 때문에 쉽사리 TSMC를 떠나지 못했던 것처럼 3나노 이하 최첨단 공정에서 삼성전자를 선택한 뒤 TSMC로 다시 가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TSMC는 중국과 대만의 지정학적 긴장 고조에 따른 불확실성에도 휘말려 있다. 안정적 파운드리 생산을 보장한다고 믿기 힘들어졌다.
삼성전자는 아직 파운드리 분야 매출을 따로 발표하지는 않는다. 증권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지난해 파운드리에서 사상 최대 매출을 올린 것으로 바라본다.
삼성전자 역시 지난해 4분기 실적 관련 콘퍼런스콜에서 파운드리사업을 놓고 "첨단공정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이를 중심으로 고객을 다변화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분위기는 올해 더욱 강화될 공산이 크다.
삼성전자의 기업가치를 가늠해 보기 위해서는 앞으로 파운드리 분야를 좀 더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특히 파운드리에 어떤 규모로, 어떤 방식으로
이재용 회장이 투자에 나설지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박창욱 산업부장·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