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만 TSMC 본사와 반도체 웨이퍼 이미지. |
[비즈니스포스트] 대만 TSMC가 고객사 반도체 위탁생산 수요 부진에 따른 불황기를 겪으면서 기존에 내놓았던 1천억 달러의 대규모 투자 계획도 재검토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TSMC가 투자 속도를 조절해 물량 공세보다 수익성 확보를 중점에 둔 전략을 선택한다면 경쟁사인 삼성전자가 중장기적으로 경쟁에 유리한 환경에 놓일 수 있다.
4일 디지타임스 등 해외언론 보도에 따르면 TSMC 주요 고객사로 꼽히는 애플과 엔비디아, AMD가 일제히 최근 반도체 위탁생산 주문량을 축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엔비디아는 TSMC 4~5나노 미세공정을 활용해 생산하기로 한 차세대 GPU(그래픽처리장치) 물량을 줄이고 있으며 AMD는 6~7나노 공정 기반의 기존 반도체 생산물량을 축소하고 있다.
TSMC 최대 고객사로 알려진 애플 역시 아이폰14 프로세서 주문량을 기존 9천만 개에서 10% 가량 낮추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인플레이션에 따른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 영향으로 전 세계 PC와 스마트폰 수요가 크게 줄어드는 데 대응해 주요 반도체기업들이 출시 계획을 보수적으로 조정하는 흐름이 뚜렷하다.
디지타임스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그래픽카드 RTX40 시리즈 출시 시기를 올해에서 내년 1분기로 늦추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당분간 수요 부진이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TSMC는 올해 상반기 사상 최대 매출을 낼 것으로 예상되고 주요 고객사의 미세공정 반도체 수요도 크게 늘어나는 데 따라 적극적으로 가격을 인상하고 생산을 확대하며 대응해 왔다.
최근 TSMC가 3년 동안 반도체 파운드리사업에 1천억 달러(약 130조 원)에 이르는 시설 투자를 벌이겠다는 계획을 내놓고 파운드리 단가를 여러 차례 인상한 점도 이런 자신감을 반영한다.
그러나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반도체시장 상황이 빠르게 바뀌어 가면서 주요 고객사의 주문량이 잇따라 줄어들어 TSMC 실적에 상당한 타격을 입힐 것으로 예상된다.
파운드리 최대 경쟁사인 삼성전자도 그동안 반도체 호황에 힘입어 TSMC와 비슷한 전략으로 파운드리 단가를 인상하고 공격적 투자 계획을 제시하며 대응해 왔다.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주에 170억 달러(약 22조 원) 파운드리 신공장 건설을 포함해 반도체 등 핵심 산업에 2026년까지 450조 원 투자를 예고한 점도 이런 배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엔비디아와 AMD 등은 삼성전자가 노리는 주요 파운드리 고객사에도 해당하는 만큼 이들의 반도체 위탁생산 주문 축소는 삼성전자에도 부정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 삼성전자 반도체 파운드리 생산공정에 쓰이는 웨이퍼 이미지. |
삼성전자는 그동안 TSMC의 공장 가동률이 최대수준으로 높아진 데 따라 고객사 물량 일부를 수주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TSMC 반도체 생산이 줄어들면 수혜를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다만 TSMC가 반도체 위탁생산 물량 축소로 사업 확장에 다소 자신감을 잃게 된 점은 중장기적으로 경쟁 판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로 자리잡게 될 수 있다.
TSMC가 올해 초 130조 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발표할 때까지만 해도 반도체 파운드리업황은 최소한 내년까지 장기간 호황기를 지속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었다.
그러나 주요 고객사들을 중심으로 반도체 주문 축소 움직임이 확산되면서 TSMC도 기존에 내놓았던 수준의 시설 투자를 무리하게 강행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에 놓였다.
위탁생산 물량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생산투자를 진행하고 공장 가동을 시작한다면 생산라인 가동률이 낮아 수익성에 큰 악영향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TSMC가 이런 상황을 고려해 기존에 내놓은 시설투자 계획을 다소 늦추고 속도를 조절하는 쪽으로 반도체업황 변화를 고려한 전략을 쓸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나온다.
삼성전자가 TSMC의 물량 공세 약화에 중장기적으로 반사이익을 노리게 될 수 있는 셈이다.
삼성전자는 아직 반도체 파운드리사업에서 벌어들이는 매출과 영업이익 규모가 크지 않아 TSMC와 맞설 정도로 단기간에 투자를 확대하는 데 분명한 한계를 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TSMC가 압도적 생산 능력을 확보해 고객사 반도체 주문 물량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과 원가 경쟁력을 모두 갖춰낸다면 불리한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반도체업황 부진이 이어져 TSMC가 공격적으로 투자를 늘리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면 삼성전자가 꾸준한 투자와 기술 개발로 추격에 속도를 낼 기회를 잡을 공산이 크다.
TSMC는 최근 미국 반도체공장 투자에 생각보다 많은 비용이 들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유럽공장 투자 계획에 선을 긋는 등 이전보다 투자 확대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최근 TSMC가 고객사들의 반도체 위탁생산 대금 결제시한을 앞당기고 가격을 3차례에 걸쳐 인상한 점도 실적 전망과 재무구조가 불안해지는 데 따른 결정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TSMC의 130조 규모 시설투자 계획이 결국 예정대로 실현되기 어려워지면서 삼성전자가 반도체 위탁생산시장에서 격차를 좁힐 수 있는 발판이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삼성전자는 최근 TSMC보다 앞서 세계 최초 3나노 미세공정 반도체 양산에도 성공하며 확실한 기술 우위를 증명했다.
TSMC의 투자가 주춤한 사이 삼성전자가 3나노 등 최신 공정 중심으로 생산 투자를 확대하고 고객사 확보에도 속도를 낸다면 앞으로 경쟁에서 더욱 유리한 위치에 설 것으로 전망된다. 김용원 기자